연타원 마원종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연타원 마원종 원로교무(77·淵陀圓 馬圓宗). 그는 고려대학교에 입학한 재원이었다. 개신교 신자였지만 대산종사와의 첫 만남 후 두 마음 없이 출가 서원을 굳힌 그. 그의 삶에 귀 기울여 본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지니라
개성에서 태어난 마 원로교무. 6.25 직전 서울로 이사했다가 1.4 후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가 10살 무렵부터 부산에서 초·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시절 그는 심심하면 길가에서 지나가는 사람들을 구경하곤 했다. 하루는 길 건너편에 비구니 스님 두 분이 나란히 올라가는 모습을 보고 자신도 모르게 ‘나도 언젠가 저렇게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려서부터 약했던 그는 몸이 안 좋다 보니 신경이 날카로운 데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쓰고 싶다’라는 갈망이 있었고,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해 살고 싶다는 생각을 은연중 마음속 깊이 하고 있었다.

그가 다닌 중·고등학교는 미션스쿨이었는데, 학생들에게 교회 출석을 권장했다. “교회를 다니면서 목사가 되고 싶었어. 그런데 당시만 해도 여자 목사를 찾아보기 힘든 시절이었어. 그럼 수녀가 될까 생각도 해봤지. 그런데 매일 검은 옷만 입고 다니고 머리에도 베일을 써서 땀이 엄청 많이 날 것 같았어. 차라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는 게 낫겠다는 생각도 했었지.”

그가 고등학교 1학년 때 친한 친구 한 명이 원불교 교도였다. 친구를 따라 동래교당을 방문했는데 그때 주임교무였던 숭타원 박성경 교무의 모습을 처음으로 보게 됐다. “교무님을 보는 순간, 내가 저렇게 돼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어.” 하지만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있던 시절이라 ‘나 외에 다른 신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라는 십계명이 마음에 걸림돌이 됐다. 그의 책상 위에는 내가 믿는 기독교,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 성경, 원불교 교전이 나란히 꽂혀있었다. 교무가 되고 싶다는 그의 소망은 이상하게도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내 일생을 결정지어도 되겠다
명석했던 마 원로교무는 고려대학교에 입학해 서울에서 대학공부를 시작했다. 고등학교 동기 한 명이 마침 익산 총부에서 간사근무를 하고 있어 1학년 여름방학 때 친구를 만날 겸 총부에 처음으로 방문했다. “처음 왔을 때 여긴 신선들이 사는 세상 같았어.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지. 며칠 지내다 보니 여기도 사람 사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게 됐어. 다만 부처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구나 싶었지.”

그는 겨울방학에도 또 총부에 들렀다. 사람들은 교회를 다니는 그가 단순히 친구를 보러 총부에 온줄 알았지만, 사실 그의 마음에는 출가에 대한 열망이 여전히 숨 쉬고 있었다. 그는 집에 가는 것도 잊은 채 총부에 있는 것이 마냥 좋았다. “마침 전종철 선진님이 부산에 갈 일이 있어서, 같이 부산으로 따라나서게 됐지. 그런데 부산으로 내려가는 길에 신도안에 들러 대산종사님을 뵙고 간다기에 너무 기뻐서 ‘제가 무슨 복이 있어서 종법사님을 다 뵈러 간데요?’라는 말이 절로 나왔어.” 대산종사에게 인사를 드리고 눈이 딱 마주치는 순간, 그는 오랜 고민에 종지부를 찍었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에 이 어른이라면 내 일생을 결정지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 외에 신을 두지 말라는 계문이 하나도 문제가 되지 않았지.” 대산종사를 뵙고 두 마음이 없어졌기에 그는 대산종사를 출가 연원으로 마음에 모시고 있다.

출가 서원을 세운 마 원로교무는 고려대학교에서 3년 정도 공부를 마친 후 출가할 계획이었다. 그런데 때마침 사업을 하던 아버지가 주식 투자로 재산을 다 날려버리게 된다. 전화위복으로그는 계획보다 일찍 2학년이 되던 해 봄, 바로 출가의 길로 들어서게 됐다.

 

“마음공부를 잘하면 사람들이 참 예뻐져”

부족함을 인정할 수 있는 힘
그는 서울 한남동에 있던 중앙여자원로수도원에서 간사생활을 마치고, 원기98년 퇴임 전까지 50여 년을 재무부, 서울사무소, 중앙총부, 서울회관, 전주보화당 등의 기관과 교동교당, 제주교당, 영동교당, 양정교당, 안산교당, 모현교당, 동대전교당에서 근무하며 교화와 사업에 힘썼다.

기관에서만 근무하다 교당에 발령받아 갔을 때, 교도들로부터 설교를 못 한다는 뒷말을 듣기도 했다. “마침 친구가 교당에 다니고 있었어. 그 친구가 교도들이 너 보고 설교 못한다고 하더라고 말을 전해줬지. 그 말을 듣고 내가 바로 긍정을 했어. 내가 생각해도 못해, 그러니까 그 사람들이 그렇게 말하는 게 당연하지.” 

그는 설교를 하면서도 이 기막힌 교리를 제대로 전달을 못한다는 답답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친구에게 들은 이야기를 교감교무에게 전했다. 알고 보니 교감교무는 교도들의 말이 마 원로교무 귀에 들어갈까 쉬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마 원로교무가 하나도 기가 죽지 않고 멀쩡한 것을 보고 “자네, 배짱 한 번 참 좋네”라고 했다. 마 원로교무는 “지금은 아닐지라도 언젠가는 혼을 흔들어 놓는 설교를 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자신의 부족함에 주눅 들지 않고, 성장의 동력 삼아 발전해 가는 힘이 있는 당찬 그였다.

또 한 번은 교도들이 그의 흉을 보고 다니는 것을 전해 듣고는 “내가 못하는 것이 많아서 흉이 많은 것은 안다. 나를 흔들어 대는 것은 괜찮지만, 나를 위해서 그러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교화를 위해서는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교도들에게 짚어 말해주기도 했다. 
 

교법으로 훈련하면 얼굴도 예뻐져
마 원로교무는 교법으로 교도들을 철저히 훈련 시키는 데 힘썼다. 처음 부임할 때부터 퇴임하던 해까지 연말이면 어김없이 교도들과 함께 신분검사를 했다. 교법을 표준 삼아 성장 정도를 가늠할 수 있게 한 것이다.

그가 압구정교당에서 근무할 때, 매년 여름이면 11과목으로 교도들을 훈련시켰다. 어린이, 학생, 청년, 일반 남자, 여자, 노인을 그룹별로 나눠 주말 1박 2일씩 교당에서 11과목을 모두 다 체험할 수 있게 지도했다. 아침 좌선 1시간, 저녁 염불 30분, 강연 등 어린이도 예외가 없었다.

“어느 날 교도님이 와서 이야기하더라고. 한 아이를 원불교 학생 훈련에 보냈더니 재미있더래. 그런데 송광사에서 하는 훈련도 다녀왔는데 굉장히 힘들었지만 머리에 남는 것은 송광사 훈련이었다고 말하더래. 아이들을 재미있게 해주는 것보다 원불교 교법에 뿌리를 두고 철저히 훈련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어린이나 학생들에게 훈련 과정 중 뭐가 제일 재미있었냐고 물어보면 강연이 제일 좋았다는 이야기가 많았어. 밥 먹으라고 해도, 시간 아깝다고 엎드려 강연 준비를 하곤 했지.” 그는 매주 법회 때마다 교도들이 돌아가며 강연을 할 수 있도록 권장했다. 처음에는 저항이 많았지만 그의 간곡한 설득에 결국 교도들도 마음을 합해 줬다. 

각자의 마음을 바라보며 마음 일기를 기재할 수 있도록 교도들을 공부시키는 데도 그는 공을 들였다. 4살 어린이부터 70대 노인까지 교도들의 생생한 마음일기를 모아 내 마음이 울퉁불퉁 일기 모음집과 마음이 크는 사람들이라는 교도들의 강연, 감상담, 일기 등 공부 모음집을 발간하기도 했다. “마음공부를 잘하면 사람들이 참 예뻐져. 교도님들도 서로 예뻐졌다고 인증을 했어. 그런 것을 많이 봤어.”
 

지금 있는 자리가 꽃자리
그가 후진들에게 당부를 전했다. “어려운 곳에 처했다고 안 좋은 게 아니야. 어느 곳에 있든지 주어진 자리가 내 자리이고, 꽃자리이고, 내 앞길을 열어가는 자리야. 제주도에서 9년을 살고 나왔어. 그때는 초창기라 참 어려울 때였는데, 거기서 살고 나니 어디에 가서도 살 수 있는 힘이 길러졌지. 은생어해(恩生於害)라고 힘든 자리가 나쁜 자리가 아니고 좋은 자리야.”

세세생생 이 회상을 떠나지 않고 출가의 길을 가고 싶다는 그. “내가 상근기가 못되고 근기가 낮아. 그래도 어떻게든 이 회상에서 구르고 싶어. 교단에 와서 큰일은 못하더라도, 한쪽 구석에서 무엇을 하더라도 이 속에서 살고 싶어.” 

[2020년 6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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