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정창현 소장] 전 세계적으로 인공지능과 빅데이터에 기반한 4차혁명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사회변화의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라졌다. 북한도 ‘새세기 산업혁명’을 표방하고 사회변화를 시도하면서 주민들의 사고도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남북협력과 종교교류를 위해 꼭 알아야 할 김정은시대 북한의 지향과 변화를 키워드(시대어)를 통해 살펴본다. 
 

평양 식료공장 내부에 걸려 있는 ‘최첨단을 돌파하라’라는 구호판. 북한은 2009년부터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세계적 추세의 기준으로 ‘최첨단 돌파’를 강조하고 있다.
평양 식료공장 내부에 걸려 있는 ‘최첨단을 돌파하라’라는 구호판. 북한은 2009년부터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라는 구호를 내세우며 세계적 추세의 기준으로 ‘최첨단 돌파’를 강조하고 있다.

시대와 사회 변화에 따른 신조어 등장
 ‘시대어(時代語)’란 한 시대의 정신과 가치를 담아 쓰는 말이다. 특정 시기에 집중적으로 사용되는 구호, 사자성어, 단어 등의 시대어는 그 시기나 시대의 지향과 특징을 규정 짓는다. 시대어는 통상 신조어로 등장해 그 시기와 시대를 함축적으로 표현하지만, 과거에 썼던 어구가 새롭게 자주 쓰이면서 시대어가 되기도 한다. 최근 우리가 가장 많이 쓰는 시대어는 ‘스마트 폰’, ‘스마트 도시’, ‘스마트 팜’ 등 다양한 영역에서 사용되는 ‘스마트’일 것이다. ‘스마트 시대’란 용어까지 등장했다.

북한도 김정은시대에 들어와 다양한 시대어를 양산하고 있다. 그러한 시대어가 등장하게 된 배경과 지향을 이해한다면 북한의 정책방향이나 변화도 읽을 수 있다. 특히 북한에서는 시대어를 최고지도자나 조선노동당에서 제시해 각종 언론매체로 선전하고, 각 기관과 학교, 공장과 기업소, 협동농장 등에 걸어놓는다. ‘구호와 선전의 나라’라는 평가답게 시대어를 파악하기가 상대적으로 쉽다.    

과거 김일성시대를 상징하는 시대어는 ‘주체’와 ‘천리마(千里馬)운동’이었다. ‘주체’는 ‘우리식대로 살자’라는 구호에 잘 나타나듯이 자체의 힘으로 자주적으로 사회를 건설하자는 기본원칙을 표방한 것으로 후에 ‘주체사상’으로 격상돼 지금까지 북한의 근본 철학으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철학에 기초해 사회건설의 총노선으로 제시된 것이 천리마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천리마와 같은 속도로 사회주의경제를 빠르게 건설하자는 대중운동으로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천리마속도’, ‘천리마직장’, ‘천리마기수’, ‘천리마작업반’ 등의 신조어가 탄생했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통해 6.25전쟁으로 파괴된 사회와 경제를 빠르게 복구하고, 사회주의공업화를 달성했다. 1972년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에는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이라고 규정했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와 ‘고난의 행군’이란 신조어가 등장했다. 옛 사회주의권의 붕괴, 김일성 주석의 사망, 계획경제의 폐해, ‘100년만의 자연재해’ 등으로 북한은 최악의 경제난을 겪었다. 이 때를 북한은 ‘고난의 행군시기’라고 규정했다. 이 시기에 나온 구호가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 ‘오늘을 위한 오늘에 살지 말고 내일을 위한 오늘을 살자’ 등이다. 어려운 상황에서 좌절하지 말고 낙관적으로 미래와 후대를 생각하며 고난을 헤쳐 나가자는 지향을 담고 있다. 사자성어로 하면 도험소보(道險笑步)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험난한 길’을 극복하기 위한 방편으로 군대를 앞세웠다. 공장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는 상황에서 가장 조직화된 군대가 안보와 경제를 모두 담당해야 한다는 담론이었다. 이때부터 북한에서는 ‘선군(先軍)사상’, ‘선군정치’가 시대어로 자리 잡았다. ‘선군정치의 위대한 생활력을 더욱 높이 발휘하자’, ‘선군혁명 총진군’ 등의 구호가 거리마다 나붙었다. 
 

김일성시대를 상징하는 1958년의 포스터.
김일성시대를 상징하는 1958년의 포스터.
김정일시대를 상징하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란 구호가 붙어 있는 평양 식료품가공장
김정일시대를 상징하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란 구호가 붙어 있는 평양 식료품가공장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
2009년 김정은 위원장 후계자로 지정되면서 북한사회에서는 ‘가는 길 험난해도 웃으며 가자’라는 구호가 내려지고, 새로운 상징 구호가 등장했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 눈은 세계를 보라’라는 구호였다. 자력갱생으로 민족고유의 훌륭한 것을 창조하는 동시에 다른 나라의 좋은 것은 대담하게 받아들이자는 뜻이다. 이 구호가 처음 북한엘리트의 산실인 김일성종합대학의 전자도서관에 나붙은 후 모든 기관, 공장 등에 내걸렸다. 김정은시대 북한의 사고와 정책 변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자기 땅에 발을 붙이고’라는 김일성·김정일시대의 계승을, ‘눈은 세계를 보라’라는 김정은시대의 지향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주체적 입장을 견지하되 모든 분야를 세계적 수준에서 발전시켜야 한다는 기본 목표를 제시한 것이다. 이 선전구호는 과거의 폐쇄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세계와 교류하며 최첨단 기술을 수용해야 한다는 변화의 기준점이 되고 있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집권 초기부터 ‘현실발전과 세계적 추세에 맞게 모든 분야를 부단히 개선해야 한다’라는 발언을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세계적 추세 수용’이라는 총적 방향에 따라 각론에 해당하는 시대어들도 속속 모습을 드러냈다. ‘세계적 추세’의 기준과 관련해서는 “최첨단을 돌파하라”라는 구호가 제시됐고, 선군시대를 대체하는 ‘지식경제시대’란 규정이 나왔다. 지식경제시대에 맞게 ‘새세기 산업혁명’을 추진해야 한다는 목표도 제시됐다. 또한 ‘천리마속도’를 대체해 ‘만리마속도’란 키워드가 등장했다. 북한은 “10년이 아니라 1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 말이 새로운 시대어”가 나타났다며 과학기술과 정보기술에 기초하면 과거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만리마속도’란 키워드에 담았다. 

국토관리와 관련해서는 ‘황금산’이란 키워드가 널리 사용되고 있다. 민둥산에 유실수를 많이 심어 “모든 산을 쓸모 있는 황금산으로 만들자”라는 것이다. 박정희 정권의 ‘산림녹화사업’을 연상시키는 구호다. 

주목할 대목은 북한이 과학기술을 비롯해 대부분의 분야가 세계적 발전 추세에 많이 뒤떨어져 있다는 점을 솔직히 인정하고, 해외 유학·연수·학습 등을 통해 세계와 소통하며 배우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는 코로나19로 해외교류가 중단되고, 북미·남북대화도 중단돼 있는 국면이지만, 향후 교류국면으로 전환되면 세계적 기준과 추세를 수용하려는 북한의 정책방향은 더 뚜렷하게 나타날 것으로 전망된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 정보통신기술에 익숙한 젊은 세대의 등장으로 이러한 추세는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될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

◀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
ㆍ서울대 국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
ㆍ중앙일보 통일문화연구소 전문기자
ㆍ북한대학원대학교와 국민대 겸임교수
ㆍ(사)현대사연구소 소장 역임
ㆍ조계종 민족공동체추진본부 정책기획위원 
ㆍ민화협 정책위원 등으로 활동

[2020년 6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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