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의 생사관 구조는
유무상 세계의 조화,
삶과 죽음의 일상성,
업으로부터의 자유, 성장 위한 윤회

[원불교신문=원영상 교수] 원불교는 불법시생활 생활시불법을 내세우는 개혁불교, 현대불교, 참여불교이다. 존재 자체를 중시하는 소태산 대종사의 죽음에 대한 인식 또한 원불교의 이러한 성격과도 깊은 관계 속에 있다. 물론 초기 및 대승불교의 핵심 교의도 수렴하며, 보다 창의적인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있다. 여기에 한국 전통의 생사관도 엿보인다. 이러한 역동성은 소태산이 각득한 통합적이고, 현실적이며, 유기적인 세계관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시공간의 비초월성
소태산의 사후인식에 대한 특징은 먼저 시공간의 비초월성이다. 천도재에서 “생생에 사람의 몸을 잃지 아니하고”라며 축원한다. 대종경 천도품에서는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라는 이치를 설한다. 또한 사람의 행할 바 많은 도를 요약하면 “생과 사의 도”라고 설한다. 이것은 인간 삶의 비중이 이를 초월한 어떤 타계나 천계보다도 큼을 보여준다. 한편 ‘일원상서원문’에서 일원은 모든 이원적인 세계를 넘어선 “유무초월의 생사문”인 동시에 사은으로 현현해 현실 세계를 구성한다. 여기서 내면의 진여법신은 유무상에 걸림이 없다. ‘일원상 법어’에서 생사를 실존하는 춘하추동처럼 보는 것 또한 이러한 이유에서이다.

불타는 “어떤 것이 무여열반인가? 비구는 마땅히 이와 같이 수행해야 한다. (중략) 그 비구는 동방으로도 가지 않고, 서방·남방·북방과 사유(四維)·상·하에도 가지 않으며, 곧 현세 세상에서 식적멸도(息迹滅度)할 것이다”(『선인왕경』)라고 설한다. 열반의 세계는 8고로 얽힌 이 세상을 초월한 어딘가에 있다. 육도윤회로부터의 자유는 이 법문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러나 천도품에서 보듯, 선종의 생사일여를 계승하는 동시에 전통 유교의 입장과도 통하는 현실중시는 지옥도 천국도 우리의 한 마음이 창출하기 때문이다.


중음 세계의 현존
이것은 두 번째 특징인 중음 세계의 현존과도 연동된다. 중유(中有)라고도 부르는 중음은 임종의 순간인 사유(死有)로부터 다음에 태어나는 순간인 생유(生有)까지를 말한다. 소태산도 이러한 불교의 중음관을 계승한다. 그는 중음을 악도와 선도의 갈림길로 보고 있다. 그리고 깨달은 자, 혹은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자는 오히려 다음 생을 예비하는 ‘자유지대’이자 더 높은 차원의 수양을 위한 세계로서 기능하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러한 해석은 전통적인 불교와는 다소 다른 차원을 보여준다. 티벳 사자(死者)의 서에서는, 죽음의 전 단계에서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중유로 넘어가 깨침을 얻을 때까지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소태산은 중유는 깨달은 자에게는 현실과 더불어 자유자재로 넘나들 수 있는 공간이며, 영단으로 자유롭게 드나드는 세계이기도 하다. 중음을 적극적으로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들과 교신이 가능하다는 점에서는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이러한 ‘주관적 진실’은 월간원광사가 펴낸 죽음과 천도에 생생하게 기록되어 있다. 사자에 의한 빙의(憑依) 사건, 임종인과 꿈속에서 대화한 것, 천도재 집전자와 사자와의 교감 등 여러 방면에서 중음으로 건너간 사자와의 교신에 대한 생생한 사건을 전하고 있다.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원불교의 중음관이 하나의 문화적 차원에서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유무상 세계의 조화
다음으로 소태산의 생사관 구조는 유무상(有無相) 세계의 조화, 삶과 죽음의 일상성, 업으로부터의 자유와 성장을 위한 윤회, 이 세 가지를 들 수 있다. 먼저, 교의는 유무상 세계 내의 모든 이원적 구조를 하나로 회통시키고 있다. 기본적으로 이사, 영육, 자타, 변불변 등의 이원구조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를 따르는 생사관 또한 일원상 진리의 체용의 원리에 기반한다. 정산종사는 열반의 의미를 자성의 공성(空性)을 회복함이라고 하며, 이를 떠나지 않고 극락을 수용함을 열반락이라고 설한다.

생사편에서는 “본래 생사가 없고 생사가 둘 아닌 자리”를 깨달아 알고, 체 받아 지키며, 베풀어 활용하라고 한다. 대승불교의 ‘생사즉열반’의 구조와 일치한다. 말하자면, 생사의 유전은 진실불변의 진여 세계를 바탕으로 전개되기 때문에, 알고 보면 중생의 생사 또한 열반의 경지에 다름이 아니다. 

따라서 천도법문에서는 생사의 이치가 부처님이나 중생이 다 같으며, 성품 자리도 “본연 청정한 성품이며 원만 구족한 성품”이므로 그 근원에 돌아와 해탈하기를 기원하고 있다. 이러한 체성을 확보해 죽음을 초월하게 되면, 영가에게는 오히려 열반의 기회가 된다. 세계를 둘로 나눠 보는 것은 생에 대한 착심과 죽음에 대한 불안을 버리도록 하는 기제일 뿐이다. 자연의 변화에 비추어 보면 생사는 순환하는 작용과도 같다. 그 중심인 영원불멸한 성품은 언제나 회생(回生)을 위한 근거이다. 진여의 성품은 모든 이원구조를 조화롭게 하는 원천이다. 
 

삶과 죽음의 일상성
두 번째는 삶과 죽음의 일상성으로 소태산은 “이 육신이 한 번 나고 죽는 것은 옷 한 벌 갈아 입는 것”, “사람의 생사는 비하건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 “숨을 들이 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것”, “잠이 들었다 깼다 하는 것”과도 같다고 한다. 이는 여러 선지식들의 생사관과 다름이 없다. 소태산은 철저히 현실 긍정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즉 석존이 깨달은 연기의 세계를 우리가 늘 체감하는 무량한 대은으로 새롭게 해석했다. 따라서 사은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존재’의 방식이 된 것이다.

소태산은 “현묘한 진리를 깨치려고 하는 것은 그 진리를 실생활에 활용하고자 함이니 만일 활용하지 못하고 그대로 둔다면 이는 쓸데없는 일이라.”(교의품)라고 설하며, 진리가 현실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불공도 진리불공과 함께 실지불공의 행위로써 불성의 현현인 모든 존재를 불법의 대해로 합류시킨다. 원불교의 이러한 은혜와 불공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만유와의 절대적인 윤리 관계를 드러낸 것으로 볼 수 있다. 

소태산은 이러한 현실계, 즉 우주만유를 “법신불의 응화신”으로 보고, 즉자적으로 생사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설한다. 생사의 해결은 선불교의 묘유(妙有) 중심적 사고에 기반하고 있으며, 따라서 죽음의 문제를 사후의 ‘삶의 연장(예를 들면, 타방 정토)’ 속으로 끌고 가지 않겠다는 인식이 자리하고 있다. 극락과 지옥에 대한 물음에, “죄복과 고락을 초월한 자리에 그쳐 있으면 그 자리가 곧 극락이요, 죄복과 고락에 사로잡혀 있으면 그 자리가 곧 지옥”(변의품)이라고 한 것에서도 알 수 있다. 이러한 즉자적인 해결방식은 생사의 번뇌를 삶의 현장에서 해결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게 한다.
 

업으로부터의 자유와 성장을 위한 윤회
마지막으로 업으로부터의 자유와 성장을 위한 윤회이다. 소태산은 사람이 죽어 비록 영식이 착심으로 인해 윤회하지만, 이 윤회로부터 자유로운 방법은 착심을 버리고 업을 초월하는 데에 있다고 본다. 비록 생전의 업력을 극복할 힘을 갖추지 못했어도 천도의식을 통해 해결할 수도 있다. 소태산은 이러한 기능을 곡식에 대한 인간의 돌봄이나 전기와 전기가 서로 통하는 것으로 비유한다. 영가를 위한 생자의 모든 천도 행위가 영향을 끼치며, 심지어는 영가가 살 때 짊어진 타인에 대한 빚의 삭감이나 다음 생의 복을 장만하기도 한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스로 하는 천도의 행위이다. 핵심은 “서원 일심과 청정 일념”이다. 이를 위해 전통적으로는 예수재(豫修齋)를 마련해 자기천도를 생전에 준비하기도 한다. 정토불교에서는 최후 일념을 임종정념(臨終正念)이라고 한다. 주로 임종자로 하여금 “나무아미타불” 10념을 외게 한다. 임종정념은 “최후 일념이 내생의 최초 일념”이 되기 때문이다. 


생사가 주는 의미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생사가 주는 의미는 무엇일까. 정산종사는 부친의 임종 직전에 송(頌)을 통해 최후를 “부처되어 제중하기 서원하시고, 청정한 한 생각에 귀의하소서”라고 부탁하며, 사후에도 성불제중의 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기원하고 있다. 천도의례에서 “성불제중의 대과를 원만성취”하도록 염원하는 것은 사후에도 그것이 최종목표이기 때문이다. 소태산은 불법이야말로 최고의 가치라고 선언하며, 생사의 큰일을 해결하는 가르침을 그 첫 번째로 들고 있다. 생사법문에 익숙한 불자들은 죽음을 언제나 새로운 탄생으로 인식한다.

결국 소태산은 죽음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를 생명 진화를 위한 기회로 삼아야 된다고 보고 있다. 종교학자 존 바우커는 동서양 종교의 죽음에 대한 연구를 통해 “죽음은 패배와 형벌로부터 해방과 기회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으로 이해되어 왔다”(세계종교로 보는 죽음의 의미)라고 말한다. 소태산이 바라보는, 업으로부터의 자유와 영적 성장을 위한 윤회 또한 세계 종교들이 내놓은 죽음에 대한 보편적인 해석학의 연장선에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죽음에 대한 최종적인 의미가 세계종교의 맥락과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ㆍ원광대학교
ㆍ원불교 생명윤리연구회 위원

[2020년 6월 2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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