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산 오철환 종사(喜山 吳喆煥 , 1912~1986)

원기62년 3월 20일 대산종법사 추대식에 참석한 군산교도들이 총부영모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원기62년 3월 20일 대산종법사 추대식에 참석한 군산교도들이 총부영모원 앞에서 기념촬영을 했다.


자력을 길러주는 혜안
서울 남대문 뒷골목에 있는 ○○여관. 아침 일찍 이 여관 문을 나서서 남대문시장 좁은 골목길을 지나가는 신사가 있었다. 
적당히 뚱뚱하면서도 한없이 덕스러워 보이는 40대 중년의 신사. 그가 시장 입구에 들어섰을 때 이른 아침부터 손님과 흥정하느라 떠들썩한 한 상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꼭 일천 이백환은 받아야 하는데 오늘 마수걸이라 이백환은 감해줄 테니 천환만 내고 가져가시오.” 

하지만 지게가 필요 없었던 이 중년 신사는 그 앞을 무심히 지나쳐 가던 길을 재촉했다. 
그런데 중년 신사가 시장을 거의 빠져나갈 무렵 낯선 20대 청년이 갑자기 나타나 그 앞길을 가로 막았다. “선생님 저 좀 살려주십시오.” 갑작스런 돌발 상황에 깜짝 놀란 중년신사는 가던 길을 멈추고 그를 찬찬히 바라보았다. 생김새로는 구걸이나 하며 살아갈 것 같지는 않은 허우대가 멀쩡한 청년이었다. 


청년은 더 이상 버틸 힘도 없다는 듯이 중년 신사에게 하소연을 했다. “사람들이 서울에만 가면 돈을 벌 수 있다기에 무조건 시골에서 올라왔는데 현실은 달랐습니다. 여기저기 취직을 하려고 돌아다녔지만 받아주는 곳은 없고 가지고 온 돈은 떨어져서 어제부터는 굶고 있습니다. 선생님 제발 한번만 살려주십시오.” 
청년의 말을 한동안 묵묵히 듣고 있던 중년 신사는 조금 전 길거리에서 지게를 흥정하던 상인이 생각이 떠올랐다. “자네, 그러면 내가 시키는 대로 무슨 일이든 할 텐가?” 
“네, 돈벌이만 된다면 무슨 일이든 못하겠습니까?”


중년 신사는 우선 돈 백 환만 건네주어도 낯선 청년이 허기를 면할 수 있으리라 생각이 들었지만, 일시적인 도움을 주는 것보다는 장차 그 미래를 위한 대책을 마련해 주는 게 옳다고 생각을 했다. “내가 조금 전 시장을 지나오다가 지게장사를 보았네. 자네에게 지게를 사주면 그것을 가지고 돈벌이를 한번 해보면 어떤가?” “네, 아무 일이든 좋습니다. 돈벌이만 할 수 있다면 무슨 일인 듯 못하겠습니까?” “자네 몸에 맞나 져보게.”


지게를 진 청년은 모처럼 만면에 환한 웃음을 지었다. 지게를 진 모습은 그리 어색하지도 않았고 제법 청년에게 잘 어울려 보였다. 그때 멀리서 두 손에 짐을 가득 든 부인이 지게를 진 그 청년을 손짓으로 부르는 것이 보였다. 짐꾼이라 생각하고 이것저것 사놓은 물건을 집으로 지고 가기 위해 부른 것이다. 숨 돌릴 사이도 없이 일거리가 생긴 청년은 당장 품삯을 얼마나 불러야 할지가 걱정이 되었다. “선생님, 저 짐을 지고 가서 얼마나 받아야 할까요?”


중년 신사는 웃음을 지으면서 말했다. “저 아주머니가 얼마를 줄까 하고 물어보면, 얼마입니다 하고 가격을 정해 대답하지 말고 적당히 알아서 주시라고 하게. 그리고 자네 이 지게로 돈을 모으면 그냥 써버리지 말고 손수레를 사서 일을 해보게. 그래서 또 돈이 모아지면 트럭을 사야겠다는 포부를 가지고 일을 하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을 걸세.” 
아주머니의 짐을 지게에 지고 가는 청년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흐뭇한 미소를 짓던 중년신사는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다시 가던 길을 재촉했다. 
이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중년 신사는 군산 교화의 거목 희산 오철환 종사의 일화다.

 

열반 5일 전인 원기 71년 3월 24일 대산종법사께서 문병차 오셔서 마지막 법문을 내려주셨다.
열반 5일 전인 원기 71년 3월 24일 대산종법사께서 문병차 오셔서 마지막 법문을 내려주셨다.

 

“원불교에 미친 사람”
희산 오철환 종사. 그는 1912년 3월 10일 전북 임실군 임실면 신안리에서 부친 오성조 선생과 모친 홍영명화 여사의 2남 3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28년 임실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열일곱 나이로 부산으로 내려가 직장을 잡았다. 타고난 근면 성실함으로 일본인 병원장의 눈에 든 희산 종사는 그의 도움으로 현해탄을 건너가 상업학교를 졸업할 수 있었다.
1937년 고국으로 돌아온 희산 종사는 부산 범일동에 태전약원을 개업해 생활의 터전을 마련했다. 그러나 1945년 해방이 되자 고향과 가까운 군산으로 이사를 해 태전약방을 개업하고 호남굴지의 약업사로 발전시켜나갔다. 희산 종사는 사업이 어느 정도 안정이 되자 원기38년(1953) 외사촌인 홍정관 교도(상주교당)의 인도로 원불교에 입교했다.


입교한 지 며칠 되지 않아 구타원 이공주 종사 초청 교리강습회가 있었다. 희산 종사는 일주일간 계속된 이 강습회에 하루도 빠지지 않고 출석해 열심히 들었다. 일원상 진리, 사은사요 삼학팔조 등등 모두가 처음 듣는 말이었지만, 희산 종사는 물 속에 담근 솜처럼 구타원 종사가 일주일 동안 설한 법문을 온통 그대로 받아들였다.
당시 군산 교화는 그다지 활성화 되어 있지 않아서 법회에 나오는 교도들이 20여 명 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새회상 만난 기쁨으로 희열에 찬 희산 종사는 일요일 아침이면 이른 아침부터 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다니며 법회에 가자고 순교를 했다. 희산 종사는 자신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교무님의 설법을 한번이라도 들으면 꽃발신심이 날 것으로 믿었다.
하지만 그를 보고 원불교에 미친 사람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사람도 없지 않았다. 어느 날은 이른 아침 친구 집을 찾아갔다가 면박을 당한 일도 있었다. “아, 이 사람아. 일어나기나 하면 그때 와서 원불교를 가자고 하던지 해야지 곤하게 자는 사람을 깨우면 어떻게 하는가.” 희산 종사는 그렇게 교도불리기에 온통 정성을 다했다. 

 

생활 속 교법실천 철저
그는 이 교법에 대한 확신으로 조석심고와 사종의무는 물론 계문하나까지도 실생활 속에서 철저히 지켜나갔다. 어떤 고단한 일이 있어도 아침 좌선과 독경을 빼는 일이 없었고 법회 출석을 생명으로 알았다. 부산이나 서울 등 먼곳으로 출장을 갔다가도 일요일 법회시간에는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참석했다.  
우선 당장 교당에 다니기 전까지 하루 3갑 정도 피우던 담배와 취미로 즐기던 낚시와 식사 때면 거르지 않았던 반주를 모두 끊었다. 집무실 책상에는 항상 교전이 펼쳐져 있어 책상에 앉으면 언제나 교전을 읽을 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고, 시간이 날 때마다 빨간색으로 줄을 치며 교전공부에 열정을 다했다. 


희산 종사는 교당을 짓는 일은 삼세업장을 녹이는 일이라며 교당불리기에도 남다른 공적을 쌓았다. 자신의 회갑을 기념해 원기57년 대야, 장항, 도순교당을 설립했으며, 원기59년에는 월명, 경암, 남군산교당이 설립될 수 있도록 힘썼다. 이밖에도 경장, 부여 등등 전국 각지의 교당들이 설립될 때마다 그는 아낌없이 정재를 희사했다.
희산 종사는 원기71년 3월 29일 지병으로 열반에 들었다. 대산종사는 그의 영전에 “교당의 큰 기둥이 무너진 듯 큰 보배를 잃은 듯 가슴 허전함과 애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라면서 “무념 무상의 불사로 교화사업회를 밑받침하게 하였으니 앞으로 백천의 교당이 세워질 그곳이 모두 희산이 되어 일원의 법화가 만발할 것”이라며 그의 열반을 기렸다. 
 

희산 오철환 종사 약력
1912년 전북 임실 출생
원기38년(1953) 5월 3일 입교
군산교당 교도회장
교화사업회 회장
원기71년(1986) 3월 29일 열반
원기73년(1988) 종사 추서

 

[2020. 6. 26. 마음공부14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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