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와 용서가 결여된 종교는
교양과 철학에 불과할 뿐,
사랑과 관용 없는 신앙은 죽은 종교

정인화 교무
정인화 교무

 

성찰
‘나는 그리스도는 좋지만 그리스도교 신자는 싫다’ 간디가 교회에서 쫓겨나면서 한 말입니다.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와 교인들은 싫다는 거죠. 이 말을 오늘의 우리에게 옮겨 보면 어떨까요. 소태산은 좋은데 교도나 교무는 싫다. 일원상 진리는 좋은데 원불교는 싫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오늘은 우리의 신앙을 점검하고 신앙인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져볼까 합니다. 지나온 날의 신앙 여정을 살펴보고 이를 통해 현재를 다져서 더 나은 미래를 열어보자는 성찰의 시간인 거죠. 한때 백만 명을 넘었던 그 많던 교도들은 모두 어디로 간 걸까요. 간디의 문제의식은 이런 거 아닐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를 관념적으로 믿고 입으로 신앙하면서 예수처럼 살지 않으니까 생활 속에서 진리가 묻어나지 않고 신앙의 향기가 묻어나지 않으니까 동의할 수 없고 공감할 수 없고 따라 하고 싶지 않고 동행하고 싶지 않다는 것! 이게 바로 오늘날 신앙인의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는 게 아닐까요. 과거 신앙의 선진님들께서 피와 땀과 눈물로써 이룩해 놓으신 거룩하고 견고한 신앙의 탑들이 오늘날에는 왜 맥을 못 추고 있는 걸까요. 그 중심에 지금 우리가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시나요? 

일원상이 심오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만 제대로 모르면 그저 동그라미로 보일 뿐이고 교법이 완벽해도 실존의 삶을 넘어서지는 못 합니다. 실천 없는 설교와 성가는 그저 울리는 징과 꽹과리 소리에 지나지 않고 자비와 용서가 결여된 종교는 교양과 철학에 불과할 뿐입니다. 사랑과 관용이 없는 신앙은 죽은 종교인 것입니다. 이제는 사람을 섬기고 이해하고 베푸는 일에 저부터 나서려고 합니다. 대종사께서 가신 길이 바로 자비의 길 사랑의 실천이었기 때문입니다. 

“한 제자 성행(性行)이 거칠어서 출가한 지 여러 해가 되도록 전일의 악습을 도무지 고치지 못하므로, 제자들이 대종사께 사뢰기를 그는 비록 백년을 법하에 두신다 하더라도 별 이익이 없을 듯 하오니, 일찍 돌려 보내시어 도량(道場)의 풍기를 깨끗이 함이 좋을까 하나이다. (중략)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무릇 불법의 대의는 모든 방편을 다하여 끝까지 사람을 가르쳐서 선으로 인도하자는 것이어늘, 만일 선한 사람만 상대하기로 한다면 그 본분이 어디 있겠는가. (하략) (『대종경』 실시품 5장)
 

신앙의 진화 
그래서 신학도 실천신학, 신앙도 실존 신앙으로 진화되어 왔지요. 돌아보면 일찌기 100여 년 전, 소태산 대종사께서는 실천 신앙, 실존 진리, 생활의 윤리를 통해 세상에 울림을 주기 시작했지요. 그것은 지구의 변방 국가, 식민지 국가, 그중에서도 버림받은 전라도 한 모퉁이에서 비록 작지만 종교의 원자폭탄처럼 시작된 인류 의식의 대전환을 알리는 서곡이 됐던 것입니다. 그야말로 새로운 종교혁명을 알리는 영성운동의 시작이었던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지금 우리들의 신앙은 다시 시작되어야 마땅하고 다시 쓰여 지는 종교의 역사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껏 누구에게 보여 지기 위해서 살아오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우릴 보고 잘 따라 오지 않습니다. 본받으려는 욕망이 안 생기는 거죠. 왜냐, 뭔가 재미있거나 감동스럽거나 함께 하고픈 의지가 생기지 않기 때문인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원불교는 따분하다거나 고립적이라고 말합니다. 그들만의 종교, 윤리, 문화를 가져서 보편적이지 못 하다고 외면합니다. 우리도 할 말이 많지만 이것이 현실입니다. 세상이 교당을 위해 있는 게 아니라, 교당이 세상을 위해 있다는 생각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신앙의 과정
보물섬 이야기를 잘 알고 계시지요. 보물섬이라는 소설도 있고 보물에 관한 이야기와 영화도 많이 봤습니다. 이 보물을 진리라고 생각해 보면 신앙인들의 처음 동기도 진리를 찾기 위해서이고 궁극의 목표도 이 진리 찾기라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진리를 아는 순간, 진리를 찾았다고 생각합니다. 착각하는 것이지요. 예수님을 아는 순간 하느님을 알고 진리도 알고 구원도 받았다고 생각해버립니다. 이게 신앙이라고 맹신하거나 시작하자마자 다 알았다고 더 이상 진행하지 않는다면 이건 바로 과정이 생략된 채 오류에 빠진 신앙생활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대종사를 만나고, 교법을 알았다고 꽃발심이 생기고 종교의 궁극을 찾았다며 기뻐합니다. 진리를 알게 되고 깨쳤다며 환희에 빠지기도 하지요. 저도 지금까지 신앙의 과정을 보면 이렇게 커다란 착각에 빠진 채 도인의 삶을 흉내내고 현실감각이 떨어진 채 생각과 입으로 신앙을 하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신앙의 절차와 구체성이 결여된 관념의 신앙이 오늘날 수도인의 모습이 아닐까요. 신앙이란 믿음이고 믿음은 사람에 대한 믿음이어야 하는데 신앙의 중심 대상에서 사람에 대한 사랑과 용서가 사라진 채 인과라는 차가운 관념만이 우리의 머리에 남아있는 건 아닐까요? 

관성적으로 믿음도 머리로 해석하고 신앙도 지식과 경험으로 분석하는 이지적인 신앙, 말과 글로 공부하는 종교는 결코 21세기의 신인류를 견인할 수 없겠다는 결론을 내리게 됩니다,우리의 소태산 대종사께서 그랬던 것처럼 삽을 들고 땅을 파서 논을 일구고 엿을 만들어 파는 치열한 삶의 신앙이 없이는 우리들만의 리그로 이어지고 말 것입니다. 보물을 찾는 과정을 보노라면 진리를 찾는 과정 즉, 신앙이라는 절차를 보는 것 같다는 생각을 요즘 하게 됩니다. 보물 찾는 이야기를 보면 대부분 처음에는 보물의 가치를 알고 보물을 갖고 싶어 하게 되지요. 보물이 있으면 부자가 되고 부자가 되면 행복하게 살 것이다. 진리를 찾으면 인간은 행복해지고 죽음도 초월할 수 있다. 그 다음은 어떻게 하지요?

보물을 찾기 위해 먼저 보물이 숨겨져 있는 장소의 지도를 확보하게 됩니다. 교전과 교리도를 손에 넣게 된 거죠. 이어서 보물을 찾아 나섭니다. 홀로 가기가 두려워서 동행자를 만들고 심지어는 전문가들을 모으기도 합니다. 나를 인도해 준 연원과 함께 교당에 가는 겁니다. 드디어 배를 타고 험한 바다를 건너서 외딴 섬에 도착합니다. 

여기까지 오는 과정에 풍랑을 만나기도 하고 천신만고 끝에 섬에 도착했는데 이게 끝이 아닙니다. 섬에 도착해서 지도를 보고 이곳저곳을 찾아다니다가 마침내 보물이 숨겨져 있는 동굴을 찾게 되지요. 그런데 동굴 입구의 문이 굳게 닫혀 있습니다. 어렵사리 동굴의 문을 열고 동굴 안으로 들어가보니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동굴 문이 닫혀버립니다. 공포가 시작되지요. 경계가 시작된 겁니다. 교당만 가면 그곳에는 도인들이 가득하고 자비와 이해심이 넘치는 도반들이 나를 반겨주고 열린 사고를 지닌 교무와 교당일 줄 알았는데 놀랍게도 닫혀있는 거지요. 진영에 충실한 닫힌 종교인 겁니다. 놀란 일행에게 잠시 후에는 사천왕 같은 동물이 나타나 철퇴를 휘두르며 일행을 위협합니다. 위기를 만난 겁니다. 맞서지 않고 도망을 칩니다. 위기를 피하는 거죠. 동굴의 천정이 무너져서 돌들이 머리 위로 떨어집니다. 죽을 뻔 하고 다치기도 하지요.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보물! 진리를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교당에 소속이 되자 사람의 경계들이 신앙과 믿음을 흔들어 위협합니다. 수많은 위기, 경계를 헤치고 나와 천신만고 끝에 마침내 보물을 찾아냅니다. 그런데 이번엔 함께 갔던 사람들이 문제입니다. 보물을 어떻게 나눠야 할지를 놓고 싸움이 시작되지요. 혹 우리는 진리를 두고 다투지는 않나요. 깨달음을 두고 시샘하지는 않나요. 있다면 우리의 신앙은 다시 시작해야 마땅합니다. 진리 앞에서 겸손하지 못하다면, 진리를 알고도 용서하는 아량을 베풀지 못한다면 우리는 다시 시작하는 게 더 낫습니다.

/강남교당

[2020년 7월 3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