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산 권세영 원로교무

지산 권세영 원로교무
지산 권세영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무(無)에서 유(有)를 창출해 내는 열정의 삶을 살아온 지산 권세영 원로교무(85·芝山 權世英). 교단 초기 선진들의 삶이 대부분 그러하겠지만 특히나 그의 인생에는 창립의 역사가 많다. 이리교당 학생회 창립, 서울교당 대학생회 창립, 원불교 청년회 창립, 학교법인 해룡학원 해룡중·고등학교 창립 등. 영산 근원성지 발전에 서원을 세우고 한평생 노력해온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정산종사에게 받은 법명
전북 무주군 설천면 두길리. 무주 구천동 하늘 아래 첫 동네라 할 만큼 깊은 산골에서 그는 태어났다. 아름다운 산골 마을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는 초등학교에 가기 위해 전주로 나오게 된다. 그의 아버지 권수철 교도는 독학으로 공무원 시험에 합격해 전라북도 도청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어느 날 전주교당을 방문했던 그의 아버지는 그곳에서 대종사를 뵙고 교도가 됐다.

“대종사님이 아버지를 많이 예뻐해 주셨어. 그래서 신심이 나셨지. 그런데 왜정 말기 일제가 너무 잔학스럽게 공출을 받아가고, 가정에 놋그릇도 빼앗아가고 그런 일들을 공무원에게 시켰어. 그게 싫어서 아버지가 공무원을 그만두시고 다시 무주 구천동으로 귀향했어”

무주에는 학교가 없었기에 아버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권 원로교무는 집에서 구구단을 외우고 한글 공부를 했다. “그 당시만 해도 한 면에 중학교 다니는 애들이 불과 1~2명일 때야. 아버지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며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과정에 해당하는 고등공민학교를 만들었지.” 그는 아버지가 설립한 고등공민학교에 입학했고, 그가 졸업하기 전 학교는 정식 중학교로 인가를 받는다. 중학교 시절 그는 꼴등으로 학교에 다닐 만큼 학교 공부를 따라가기가 힘들었다. “중학교 졸업 후 1년간을 쉬었어. 그때 아버지가 혹독하게 훈련을 시키셨어. 어린 애한테 똥장군까지 지게 만드시고 여러모로 많이 단련을 시키셨지.” 

그가 쉬는 동안 익산에서는 원광고등학교가 설립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다음해 원광고등학교 1기생으로 입학하게 된다. 아버지는 그를 익산으로 보내며 보화당약국에 있는 공산 송혜환 어르신을 찾아뵙고 지도를 받으라고 당부한다. “공산 어르신을 찾아뵀더니 그렇게 반가워하시면서 나를 총부로 데려가 정산 종법사님께 인사시켰어. 정산종사께서 권수철 교도 아들이냐며 무척 예뻐하시며 세영이란 법명을 직접 내려주셨지.”
 

학생회·대학생회·청년회 창립
그는 법명을 받고 정식으로 교도가 되어 이리교당에 다녔다. “전주, 군산 등지에서 학생회 활동이 활발하게 일어날 때였어. 그래서 우리도 만들자고 해서 이리교당에 원불교 학생회를 만들고 초대회장을 맡았어. 교무님들에게 귀여움을 독차지하고 사랑을 많이 받았지. 그래서인지 이슬비에 옷 젖듯이 나도 모르게 신심이 나서 열심히 활동했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를 가라는 권유를 많이 받았지만 그에게는 출가 못지않은 재가교도 1호가 되어보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수많은 설득이 있었는데 그때는 고집을 부리고 그 말을 듣지 않았어. 서울에 가서 대학을 다녔는데 서울교당을 다니면서 대학생회를 만들었지. 거기에서도 초대회장을 했어.”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익산에 내려와 서울에서 인연 맺은 사람들과 중심이 돼 총부에 원불교 청년회를 만들고 초대 원불교 청년회장을 맡아 활동한다. “그 당시 총부 어른들이 아직 원불교 청년회는 시기상조라고 하셨지만 그 말씀을 거역하면서까지 꼭 해야겠다는 신념으로 청년회를 만들어 냈어.” 

그는 원불교 청년회장을 하며 청소년 교화의 중요성에 대해 교무들에게 간절히 호소했다. 교무선 중에 있던 총회에 나가 “할머니, 할아버지 교도 100명보다 젊은 사람 한 명 교도 만드는 것이 더 소중합니다. 원불교 교화는 앞으로 이렇게 가야 할 것 같습니다. 학생들을 소비하는 교도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투자한다고 생각하고 각 교당에서 우리 청년들을 교화해 주십시오”라고 그는 힘줘 말했다. 
 

해룡중·고등학교 창립
청년회 활동 중 그는 성지 참배를 위해 영광에 방문한다. “영광에 처음으로 방문했는데 성지를 참배하고 영광교당에 들렀지. 거기서 도양교당에서 운영 중인 도양원광고등공민학교가 극심한 운영난에 처해 있다는 말을 듣고 내가 가보겠다며 겁 없이 쫓아갔지. 가서 보니까 벽은 허물어져 있고 엉망 진창이었어. 아이들의 불만은 하늘을 찌를 정도였지.” 그는 아이들을 설득해 임시 수습을 해 놓고 총부로 돌아가 상황을 보고했다. 청년회장이 가서 임시로 학교를 좀 맡아 달라는 교정원 부장들의 부탁에 그는 1964년 교장 서리로 발령받아 영광으로 가게 된다. 

“영광에 살면서 보니까 지역에서 원불교의 위상이 말이 아니었어. 성지를 이렇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지. 원불교가 이 지역에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이겠는가 고민하다 교육사업이 떠올랐어. 그리고 그 일을 내가 맡아야겠다 결심했지. 고등공민학교로는 안될 것 같아 폐교를 하고 해룡농업기술학교로 인가를 받았어. 선생님들 봉급은 줘야 하는데 돈은 나오지 않고 생활비도 없을 정도로 운영이 많이 어려웠어.”

농촌 사정이 조금씩 좋아지던 1970년 정부에서는 1면에 1개의 중학교를 설립하자는 정책이 시행됐고 이 시기 그는 학교법인 해룡학원을 만들고 해룡중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학교 설립을 준비하며 고군분투하던 중 그는 도저히 방도가 없어 총부에 방문해 교정원에 지원을 요청한다. 하지만 당시 교단은 서울회관 사건으로 여력이 없을 때라 아무런 도움도 받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실의에 빠진 그가 원광고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중산 정광훈 선진을 만나 고민을 털어놨다. “그때 익산에 처음으로 장만한 집이 있었어. 그 집을 팔아 학교부지를 사야겠다고 했더니 정광훈 선진이 미쳤다며 그럴 용기가 있냐고 물으시더라고. 그래서 내가 당당히 큰소리를 쳤지. 그런데 자고 일어났더니 반대할 것이 뻔한 아내가 걱정되고 부모님에게도 불효가 될 것 같아 갈등이 됐어.” 

정광훈 선진은 그를 대산종사에게 데려가 사정을 전했다. 대산종사는 권 원로교무를 바라보며 “참으로 미치면 못할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 한마디가 내 뇌리를 팍 쳤어. 걱정으로 가득했던 생각들이 저만치 멀리 사라졌지. 성지사업을 내가 맡아 꼭 해내겠다는 다짐을 했어. 대산종사께서 정말 할 수 있겠냐고 몇 번 다짐을 구했는데 정말 할 수 있겠다고 했지. 그랬더니 네가 정말 미치긴 미쳤구나, 그런 정신이면 할 수 있다며 교단도 믿지 말고 원망도 하지 말고 열심히 해 보라고 응원해 주셨어.”

그의 정성에 하늘도 감응했는지 학교설립과정의 여러 난관을 극복하고 그는 중학교에 이어 해룡고등학교 설립까지 거뜬히 해냈다. 그는 학교설립과정에서 큰 도움을 준 황도영·조추연 부부교도에 감사를 전했다. 서울교당 청년회 활동을 할 시절부터 권 원로교무를 아껴오던 부부는 그가 힘들 때 경제적 지원을 이어오며 해룡중·고등학교 설립에도 큰 희사로 힘이 되어줬다. 마침 황도영 교도가 광주지방검찰청 목포지청장의 직위에 있었기에 그가 참석한 해룡중 기공식은 지역의 유지들도 함께하는 자리가 됐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설립된 해룡중·고등학교는 명실상부한 명문 사학으로 성장해 지역 사회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그는 성지를 성지답게 만드는 데는 교육기관이 꼭 있어야겠다는 사명을 새기고 또 새겼다. 해룡중·고등학교가 있기에 영광이 발전한다는 말을 들을 수 있을 정도의 교육기관, 이것은 그에게 하나의 신앙이 됐다. 

“성지사업이기 때문에 반드시 된다는 신념이 있었어. 지금도 교만심이 생기지 않는 이유는 내 힘으로 했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이야. 내가 해서 된 것이 아니라 성지사업이기 때문에 되었고, 대종사님 이하 역대 종법사께서 기도해주시고, 힘을 밀어주셨기 때문에 된 것이라 생각해.” 

 
열정과 패기, 용기 있어야
그가 후진들에게 전했다. “앞으로는 중도 아니고 속도 아니고 그런 시대는 지나갔어. 숨은 공부인, 나는 그것을 전문가라고 표현하고 싶어. 앞으로 교화를 하려면 전문가가 돼야 할 것이야.”

그는 또 젊은이들에게 열정과 패기, 용기를 당부했다. “열정을 빼면 젊은이의 생명은 끝이야. 죽기 살기로 이것만은 내가 기어코 해내야겠다는 열정이 필요해. 남이 만들어 놓은 것을 지키기만 하는 것보다 내가 무엇을 이뤄봐야겠다는 그런 열정이 아쉬워. 또 할 말이 있을 때 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해. 내가 이 말을 하면 손해 보지 않을까, 누구에게 찍히지 않을까 그렇게 앞뒤를 재면 젊은이가 아니야. 특히나 개인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공을 위한 것이라면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패기가 필요해.” 

그는 마지막으로 대중의 신임을 강조했다. “어느 개인의 신임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신임을 받도록 노력해야 해. 줄을 잘 서야 앞길이 훤히 트인다는 사고방식은 위험해. 대중의 신임을 받는 게 중요해. 신심 있고 공심 있으면 그렇게 될 수 있어.”

그는 내생에도 이 회상을 떠나지 않을 것 같다고 했다. “이번 생에는 이판승보다는 사판승인 삶을 살았던 것 같아. 내생에는 사판승보다는 이판승이 되면 좋겠어.”

[2020년 7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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