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코로나19의 이후 학자들은 인간중심주의와 이로 인한 환경파괴가 인류의 운명을 비극적 방향으로 이끌고 있다면서 자연과 인간이 공존하는 방향으로 인식과 행동이 전환돼야 함을 주장한다. 

그렇다면 인간중심주의란 무엇일까? 중세 유럽의 세계관은 신 중심이었다. 완전무결한 신 앞에서 인간은 덧없는 존재였고, 인간적인 것은 철저히 부정당했다. 그런데 이런 신과 결별을 고하고 인간 중심의 이성주의를 발달시킨 ‘근대’에는 중세 신학에 의해 통제됐던 과학이 발달한다. 특히 1895년 다윈의 진화론 등장하자 과학자들은 ‘인간은 신의 창조물이 아니라 진화과정의 최고의 산물로서 스스로 환경을 지배하고 문화를 창조하여 무한히 진보할 수 있다’라는 ‘진화론적 휴머니즘’을 주장한다. 

근대에 유행한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은 이러한 가치관을 수용한 것이며, 이러한 인식 위에 근대 물질문명은 발달해 왔다. 그리고 현재도 세계는 여전히 이러한 가치관이 주도하고 있다. 하지만 과학문명의 발달은 자연환경을 파괴시켰고 대량살상무기의 발달은 인류 절멸의 위기감을 폭증시켰다. 이제는 전쟁과 과학의 폭력에서 인간의 존엄을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고 있다. 

그런데 소태산 대종사는 ‘사람은 천지의 주인이요 만물의 영장’이라고 했고, 정산종사도 ‘사람이 만물 가운데 가장 영특하다’라고 했다. 그렇다면 대종사와 정산종사도 유럽식 인간중심주의를 긍정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대종사는 대종경 변의품 19장에서 인상(人相)에 대해 설명하며 ‘만물 가운데 사람은 최령하니 다른 동물들은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라 마음대로 하여도 상관없다는 인간 본위에 국한됨’이라 했고, 정전 정신수양의 목적에서는 최령한 사람은 욕심 때문에 자신을 망칠 수도 있으니 욕심을 제거하고 온전한 정신을 얻기 위해 정신을 수양하라고 했다. 사람이 다른 생명에 비해 최령한 것은 사실이나 지나치게 인간중심으로 치우칠 때, 최령함은 죄로 화해 자신·사회·세계를 파괴할 수 있는 것이다. 

대종사는 인상을 없애려면 ‘육도 사생이 순환 무궁하여 서로 몸이 바뀌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고 했다. 만물이 둘이 아니라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는 것으로, 인상은 아상(我相) 곧 자신에 대한 집착에 근원하는 것이니 아상을 끊는 것이 그 첫 출발이 된다. 그렇다면 아상을 끊기 위해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할까? 

정산종사법어 법훈편 2장에서는 ‘계정혜는 우리 정신의 의식주니라’라고 했다. 물질문명 발달의 주역인 사람이 물질적, 인간중심의 욕심만 추구하는 삶에서 벗어나 만물이 둘이 아니며 서로 뗄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을 알고, 일상을 통해 그 앎을 실천하는 삶을 살자는 것이다. 물질과 정신의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이 완성된 최령한 인간이 아닐까.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7월 1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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