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교당 우윤전 교도

인과법문, 원망을 감사로 돌려내
문산교당 창립주, “보은 해야지요”

우윤전 교도 / 부산교당
우윤전 교도 / 부산교당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향타원 박은국 종사의 기도 일념이 배어있는 기도승지 배내청소년훈련원의 기도 프로그램은 30년이 훌쩍 넘었다. 대종사는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이 특별한 인물이라고 했다. 원기 74년에 시작된 일원탑 건립을 위한 보름기도 32년 동안 배내훈련원으로부터 기도 근속상을 두 차례나 수상하며 꾸준히 기도 적공을 쌓아온 전타원 우윤전(85·全陀圓 禹潤全·부산교당) 교도를 만나 오랜 기도의 동력에 대해 들어봤다. 

“젊었을 때는 혼자 장사하며 사느라 법회는 가끔 빠졌지만, 3일·5일씩 진행하던 월초기도, 특별기도 등 기도에는 빠진 적이 없어 주변에서 ‘기도만 오는 아줌마’로 불렸어요. 배내보름기도도 거의 빠진 적이 없는데 벌써 30년이 넘었네요.”

그가 원불교를 만난 계기는 전부를 뺏고 전부를 준다는 진리의 뜻으로 밖에는 해석이 되지 않는다. 아들 셋을 낳고 막내가 젖도 떼기 전인 28세 때, 영국아동구호재단에서 일하던 남편이 업무 차 큰돈을 들고 나갔다가 행방불명 됐다. 갑자기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남편을 찾아 헤매느라 인사불성으로 딱 죽게 됐을 때 지인이 원불교로 이끌었다. 

낯선 종교, 법당에 불상도 없어 사이비가 아닌가 의심하며 들어섰던 부산교당에서의 첫 날을 잊을 수가 없다. 마루 밑에 신발은 바글바글한데 수십 명이 앉아 입정 중인 법당은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훈타원 양도신 교무의 이임식이 있던 그날의 법문도 하필 인과법문이었다.

“아, 이런 이치가 있었구나 눈앞이 확 밝아지더군요. 남편과의 결혼 생활이 더 이상 바랄 것 없이 행복했는데 나에게 왜 이런 일이 닥쳤는지 억울하고 원망스러웠습니다. 그게 다 내가 지은 것을 받고 있는 것이라 하시니 더 이상 할 말이 있겠습니까.”

이것이 업이고 이 업을 오롯이 다 받으려면 정신을 차려야겠다 싶었다. 폐인이 된 몰골을 벗고 그길로 머리도 감고 정신을 차려 교전을 사러 갔다. 이후 먹고살기 위해 충무동 자갈치 시장 근처에서 건어물 장사를 시작하며 시간 날 때마다 교당에 갔다. 항타원 이경순 교무가 새로 부임했고 뭐든 좋은 건 다 교당에 주고 싶었다. 

“빨간 돼지 저금통을 사놓고, 그날 첫 마수한 돈과 계산하고 남은 자투리 돈, 크게 들어온 돈 10분의 1은 무조건 다 넣었고 저금통이 가득 차면 교당에 들고 갔어요. 어떻게 모은 돈인지 다 아시는 교무님이 이 돈은 총부에 올려 중요한 일에 써야 한다면서 크게 반색하시곤 했습니다.”

남편 없이 혼자 건어물 장사를 하며 세 아들을 키워내느라 정신없이 바쁠 때, 배내훈련원에 보름기도가 생겼다는 소식을 들었다. 가게 일을 거들고 있던 김군에게 이틀을 맡기면 현금 장사인 그날의 수익은 눈먼 돈이 될게 틀림없다고 주위에서 말렸다. 

“오늘밤이라도 죽으면 다 버리고 갈 재산, 김군이 쓰고 남는 것만 받겠다 각오하고 갔어요. 나 없을 때 김군이 마음껏 쓸 수 있는 그런 날도 있어야지 싶더라구요.” 

김군에게 그날의 수익을 다 뺏겨도 된다는 각오와 함께 배내행은 그렇게 시작됐다. 이후 기도뿐만 아니라 봉공활동하면서 여름만 되면 풀 뽑으러 갔다. 지금은 잘 가꿔져 모든 방문자들에게 오롯한 쉼을 제공하는 배내의 자연도 처음에는 풀 구덩이였다. 뽑아도 뽑아도 끝이 없었다. 향타원 종사와 둘이 나란히 쪼그려 앉아 풀을 뽑으며 나눈 법담도 얼마나 많던지.

“내생에 도반으로 만나자는 말씀이 어찌나 크게 들리던지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어요. 감히 내가?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어리석어요. 공부해서 안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만일기도가 될 동안 30여 년을 오로지 기도만 하고 다녔지 다른 생각을 못했었다. 얼마 전에 출간된 향타원 종사 법문집을 읽고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고 지금이라도 공부해야겠다 싶어 당장 가까운 프로그램부터 등록했다. 2박 3일간 진행되는 선체험 프로그램인 배내휴명상을 30년 만에 처음으로 참가하며 공부심을 다졌다. 

이 좋은 원불교가 남편의 고향인 진주 문산에도 있었으면 좋겠다 싶어 빠듯한 형편이지만 남편 이름으로 물려받은 집을 교단에 바쳐 원기63년에 문산교당이 설립됐다. 

“시어른들의 추억이 담겨있는 집이 교당이 돼 부처님오신날 마당에 등이 가득 달려있는 모습이 얼마나 뿌듯하던지요. 다음 생에는 전무출신 할랍니다.”

우연히 젊은 간사에게서 요즘 교학과 지원자가 너무 없어 큰일이라는 말을 듣고 나 하나라도 보태야겠다 서원을 세웠다. 

“부족한 공부를 하는데 몇 생이 걸리더라도 전무출신으로 이 회상에 보은자가 돼야겠다 대중 강연 때 서원을 밝혔습니다.”

명절만 되면 구두소리에 귀 기울인 원망의 세월이 얼마인지 모른다. 이 법이 그토록 절절했던 원망생활을 감사생활로 돌려놨다. 절로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됐다. 

“처음에는 이 배내가 황량하게 넓어 막 심기 시작한 나무들이 무릎 밑에 왔어요. 지금은 그 나무들이 울창하게 우거져 숲이 됐고 이 나무만큼 내 공부도 자라도록 열심히 해볼랍니다.”

[2020년 8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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