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대종사는 새 정법회상에 참예한 사람들이 마땅히 받아 지켜야 할 계문으로 보통급, 특신급, 법마상전급에 각 10가지 계문을 정해 줬다. 계문 가운데 단 한 가지도 삭제할 것이 없다고 했고, 설령 한두 가지 계문을 범하더라도 나머지를 충실히 지키면 그에 상응하는 무량복덕을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법강항마위부터는 각자 심계(心戒)를 가지고 수행한다고 했다. 이처럼 계문은 원불교에 입문한 이후 여래에 이르기까지 누구나 지켜야 할 신앙과 수행의 표준이다. 

원불교 계문의 특징 중 하나는 ‘연고 없이’라는 표현이 있다는 점이다. 계문을 중시하는 일부 사람들은 적어도 전무출신의 경우 ‘연고 없이’를 떼고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무척 조심스럽다. 계문은 비단 출가자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원불교에 입문한 모든 사람이 받아서 지켜가야 할 신앙과 수행의 기본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직업이나 상황에 따라 부득이 계문을 범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발생한다. ‘연고 없이’는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도 정법회상에 참예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사용된 것임을 알아야 한다. 

과거 불교에도 계율(戒律)이 있다. 그런데 불교에서는 ‘계’와 ‘율’을 구분해서 설명한다. 곧 계가 개인의 수행을 위해 지켜야 하는 주관적 도덕이라면, 율은 재가출가가 승가에서 지켜야 할 집단 규범을 뜻한다. 계는 개인의 양심에 기반한 도덕적 실천이요, 율은 집단에서 규정한 법규로서 강제성을 지니는 것이다. 원불교에도 계문과 법규가 엄연히 따로 존재한다. 만약 누군가 전무출신에게 ‘청정도량’을 요구하고 싶다면 계문의 ‘연고 없이’를 떼라는 것이 아니라 법규에 관련 내용을 강화해 지키도록 하면 될 것이다. 계문은 재가출가 누구나 자발적으로 지켜가도록 하는 것이 이치에 맞다. 계문의 강제적 규범이 강해지면 오히려 중생 제도의 문이 좁아지기 때문이다. 

정산종사법어 법훈편 5장에서는 “소소한 계문부터 중히 지키라. 이 법을 우리가 중히 지켜야 세상 사람들이 중히 여기나니라”라고 했다. 만약 마음공부를 한다는 사람이 계문을 지키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결코 탐·진·치라는 악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탐·진·치의 굴레에 빠진 사람은 오직 ‘나’만을 위하므로, ‘무아’의 진리를 깨달아 ‘봉공’을 실천하는 삶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계문을 지키는 것은 원불교 신앙과 수행의 출발점이요, 곧 깨달음의 출발점이 된다. 걸음마도 못하는 아기가 들판을 뛸 수는 없듯이 계문을 지키지 않는 사람에게 깨달음의 길이 있을 수 없다. ‘한 조항 쯤 범하는 것이야’ 하는 안일함을 위해 ‘연고 없이’가 주어진 것은 결코 아니다. 누구도 ‘연고 없이’의 삭제를 요구하지 않지만, 신앙과 수행의 삶을 통해 스스로 하나씩 삭제해 가는 것이 가장 바람직한 실천이 아닐까.

 /영산선학대학교

[2020년 8월 14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