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역사학자 카(E·H Carr)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끊임없는 대화’로 정의했다. 이 과정에서 과거는 재탄생하고 역사는 생명력을 얻는다. 우리가 매년 법인성사라는 역사적 사실을 되새기고 현재적 의미를 찾고자 고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다. 

소태산 대종사는 9인 제자와 기도를 시작한 배경을 이렇게 설명한다. ‘지금 물질문명은 그 세력이 날로 융성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의 정신은 날로 쇠약하여, 개인·가정·사회·국가가 모두 안정을 얻지 못하고 창생의 도탄이 장차 한이 없게 될지니, 세상을 구할 뜻을 가진 우리로서 어찌 이를 범연히 생각하고 있으리요.’(대종경) 임계점을 넘어 질주하는 물질문명에 대한 문제의식과 지속적으로 고통 받을 중생을 구제하려는 성자적 자비심의 발로로 볼 수 있다.  

기도의 목적은 무엇이었나. ‘옛 성현들도 창생을 위하여 지성으로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를 감동시킨 일이 없지 않나니, 그대들도 이때를 당하여 전일한 마음과 지극한 정성으로 모든 사람의 정신이 물질에 끌리지 아니하고 물질을 사용하는 사람이 되어주기를 천지에 기도하여 천의에 감동이 있게 하여 볼지어다.’ 절체절명의 문명사적 위기 상황에서 모든 사람들이 정신개벽의 주체가 되기를 기원했다. 물질문명과 정신문명의 조화를 염원하며 간절한 진리불공을 감행했다. 여타의 목적은 없었다.

기도를 위해 무엇을 희생했나. 기도의 궁극적 순간에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들에게 목숨을 내던지자고 한다. 물론 대의를 위해 신명을 바치려는 간절한 마음을 확인하는 것으로 육신의 희생을 대신했다. ‘이제, 그대들의 몸은 곧 시방세계에 바친 몸이니…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으로 공부와 사업에 오로지 힘쓰라.’는 준엄한 당부에는  사사로운 마음을 버리고 공변된 마음을 살리려는 소태산 대종사의 본의가 드러난다.

100년 전 보다 교단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졌지만 법인정신에 비춰본 오늘의 교단은 여러 면에서 부끄럽다. 과연 물질문명의 거대한 물길을 돌리겠다는 각오는 여전한지, 혼탁한 세상을 맑히고 있는 것인지, 오히려 거기에 점점 물들어가는 것은 아닌지, 또한 우리의 바람이 너무 잡다한 것은 아닌지 뼈아픈 성찰이 필요하다. ‘그 끌림 없는 순일한 생각’이 빠진 공부와 사업은 더 이상 소태산 대종사가 강조하는 공부와 사업이 아니다.

교단은 부와 권력과 명예와 지위를 구하는 곳이 아니다. 우리의 일터는 보통의 직장이 아니라 보은과 마음공부를 위한 일터여야 하고, 우리의 공부는 정신개벽을 위한 목적을 위해 초점 맞춰진 공부여야 한다. 교단의 크기는 우리들의 희생의 크기에 비례한다. 초기 교단이 작아도 무한히 컸던 이유다. 법인절을 지내며 우리들은 오늘 무엇을 위해 무엇을 얼마나 희생하고 있는지 돌아보자.

[2020년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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