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타원 장세진 원로교무

왼쪽부터 우타원 정대안 교무, 인타원 장세진 원로교무, 하타원 정안신 교무
왼쪽부터 우타원 정대안 교무, 인타원 장세진 원로교무, 하타원 정안신 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2시쯤 눈이 뜨였다. 정신이 초롱초롱 지금 내가 존재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홍복인가 감사하다. 천지개벽 시대에 대종사님 일원대도에 입문하게 해주신 인연…만겁에 만나기 어려운 기회를 만났으니 죽기로써 정진해야 한다.” (원기90년 9월 20일 일기 中)

98세 되던 지난해 4월까지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기재한 인타원 장세진 원로교무(99·仁陀圓 張世眞). 새벽 2시면 자연히 일어나 단전송을 일만독씩 염송해온 그. 천 개의 염주알을 얼마나 돌렸던지 한알 한알이 맨들맨들 빛을 발하고 있다. 


꿈에서 뵌 대종사
광주에서 태어난 장 원로교무는 어려서부터 명석했다. 우수한 성적으로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21세 때 일본 명치 법대를 졸업한 정기현 선생과 혼인해 슬하에 명숙, 안신, 대안 등 3명의 딸을 두었다. 

장 원로교무가 30세 되던 해 한국전쟁이 발발해 광주지방법원에서 법조인으로 일하던 그의 남편과 사별하게 된다. 남편과 사별한 장 원로교무는 방황하는 마음에 신앙처를 찾다 친구였던 양우전 교도의 소개로 광주교당을 방문했고, 법당에 걸려있던 대종사의 진영을 보고 그만 깜짝 놀라고 만다. 

“입교할 무렵 꿈에서 대종사님을 뵈었는데, 친구 따라 교당에 갔더니 꿈에서 뵈었던 분이 법당에 모셔져 있어 이게 도대체 무슨 인연인가 했지.” 

그후 정읍으로 이사를 한 장 원로교무는 32세 되던 원기38년 김창준 교무의 연원으로 화해교당에서 입교를 하고 원기56년 출가하기 전까지 신앙과 수행에 힘쓰며 화해교당 부회장 역할을 맡아 교당발전에 정성을 다했다. 


정산종사를 아버지처럼
“화해교당에 막 다니기 시작했을 때 김해운 선진으로부터 정산종사님에 대한 일화를 많이 전해 들었어. 꼭 한번 뵙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었지.” 

마침 그해 중앙총부에서 첫 선이 열렸고, 정산종사를 친견하는 기회를 얻게 된다. “정산종사님을 직접 뵙고 너무 기뻐서 손을 번쩍 들고 앞에 나가 질문을 드렸어. 성품에는 원래 선악이 없다 했는데 어디서 악이 나옵니까 하고 여쭈었더니 답변 대신 빙그레 자비의 미소만 보이셨지.” 

또 한번은 그가 직접 정산종사의 진짓상을 받드는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명태국이 나와 정산종사가 명태의 어원을 묻는 일이 있었다. “‘명천에 사는 태씨 성을 가진 사람이 잡았다 해서 지어진 이름이랍니다’ 하고 학교에서 배운 대로 말씀드리니 참 똘똘하다고 하시면서 후세에 이름을 남기려면 남다른 생활을 하라는 말씀과 함께 삼동윤리를 말씀해 주셨어.” 그는 마음공부 잘하라는 정산종사의 법문을 마음에 깊이 새기며 정산종사를 마음의 부모로 모시고 있다.


교화 현장에서
총부 첫선에 참석한 그는 출가해서 교무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가정 여건상 바로 출가를 하지 못하고 딸들이 성장한 후 50세가 되어서야 비로소 다산 김근수 종사의 추천으로 출가를 하게 된다. 다산종사가 화해교당에 자주 와 법문을 했었기에 장 원로교무와 인연이 닿았고, 그는 다산종사의 가르침을 받으며 더욱 적공에 매진할 수 있었다.

늦은 나이에 출가해 만학도였던 그는 동산 선원에서 3년간 젊은 학생들과 일동일정을 함께하며 수학에 힘썼다. 교역자 고시 합격 후 대산종사의 명을 받들어 바로 득량교당 교무로 부임해 교화선상에 나섰던 그는 1년쯤 뒤 다시 대산종사의 명으로 미국으로 가게 된다. 

대산종사가 한창 미국교화에 전력하던 시절, 장 원로교무는 첫째 딸인 정명숙이 미국 시민으로 뉴욕에 살고 있었기에 가족초청으로 미국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는 뉴욕교당에서 승타원 송영봉 종사를 모시고 교화발전에 조력했다. 뉴욕교당에 문제가 생겨 교당이 쉬게 되었을 때는 큰딸 집에 법신불 일원상을 봉안하고 법회를 진행하기도 하는 등 교법을 미국에 전하기 위해 노력했다. 

원기66년 총부의 명에 따라 다시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원기73년 퇴임 전까지 용각교당에서 교화에 정성을 다했다. 그가 근무할 당시 입교한 조인수, 유효성 부부는 지금도 교도회장과 봉공회장으로 용각교당의 주인역할을 하고 있다.


딸들과 함께 전무출신의 길로
“평소에 부설거사와 같이 온 가족이 부처가 되는 길을 원해왔어. 자녀들이 세세생생 법신불 일원상에 뿌리를 내리고 많은 사람을 돕고 사는 넒은 세상에서 살도록 서원했지.”

어머니의 모습에 감화를 받은 그의 딸 정안신, 정대안 교무도 함께 전무출신의 길을 걸어왔다. 매일 새벽 일찍 일어나 정성스레 심고를 모시고 좌선을 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고 자란 그의 딸들은 잠결에 일원상 서원문, 반야심경을 자장가처럼 들으며 자랐다. 어린 딸들을 무릎에 앉히고 인과품이며 금강경이며 경전을 읽어주었기에 어린 나이부터 진리에 대한 가늠이 생겼다. 

“한 생이 아니라 영원한 세상이 있는데, 한 생만 전무출신을 잘 살면 네가 원하고자 하는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딸들에게 말했었지.” 딸들을 먼저 출가시키고 자신도 따라서 출가를 해 성불제중의 길을 함께 걸어온 장 원로교무는 그들의 어머니이자 스승이었다. 


쉼 없는 적공
장 원로교무는 물욕을 벗어나 견성성불을 목표 삼아 퇴임 후에도 신앙과 수행을 쉬지 않았다. 지난해 화장실에서 넘어져 무릎이 상하기 전까지 그는 노트에 바를 정(正)자로 표기하며 천염주로 단전송을 만독씩 매일 염송하며, 조석심고와 일기기재, 기도 생활을 하루도 거르지 않았다. 서울, 청주 등 우리선문화원에 다니며 선법회 참석에도 정성을 들였다. 

지극한 적공에 그는 자신도 모르게 방광(放光)하는 이적을 나투기도 했다. 원기93년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단전송을 염송하는데 중년 신사 한 사람이 그를 찾아와 무엇하는 분이냐고 물었다. 중년 신사는 영성 맑히는 단체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리스천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며 캄캄한 비행기 안에서 빛이 나서 찾아 왔다고 했다. 그와 함께 원불교에 대한 이야기를 한참 나누고 후일 미국으로 원불교 전서를 보내주기도 했다. 한평생 정진적공의 증표라도 되듯 현재 그의 백회 주변에는 다시 검은 머리가 자라나 두렷한 일원상이 새겨졌다. 곱고 고운 미소. 어찌 100세가 다 된 노인의 미소가 저리도 아름다울 수 있는지. 짧은 만남이지만 해맑은 미소와 온화한 기운이 그의 삶을 말해주는 듯했다. 


법신불을 부모와 같이
법신불은 부모와 같기에 꼭 옷을 바루고 양말을 신고 정확한 시간에 조석심고를 올린다는 그. 그가 후진들에게 전하고픈 메시지이다. 

“법신불을 부모님 모시듯 가까이에서 친근하게 모시고 궂은일이나 좋은 일이나 간에 내 업장을 녹여 주시는구나 하고 매사에 감사한 마음을 가지면 법신불께서 항상 나를 보호하고 도와주십니다. 이 법 만났을 때 부지런히 닦고 닦아서 부처 되십시다.”

[2020년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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