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호 중앙교구 여산교당 교도

대산종사 비닐하우스 제작
창립부터 17년간 교도회장 수행

김대호 교도 / 여산교당
김대호 교도 / 여산교당

[원불교신문=최지현 기자] 지역복지와 연계한 교화시스템으로 농촌교화의 성공사례로 꼽히고 있는 중앙교구 여산교당. 군교화를 위해 첫 출발을 내딛었던 여산교당이 어느 덧 17년을 맞았다. 창립부터 교도회장을 맡아 17년간 교도회장직을 수행하고 있는 호산 김대호(66·鎬山 金大鎬)교도회장은 여산교당의 역사이자 지킴이다. 12일, 고추씻기가 한창인 여산교당에서 김대호 교도회장을 만났다. 송글송글 맺힌 땀방울과 마디마디 굵은 손, 합장 인사를 하는 그의 투박한 손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저는 일찍이 건축일을 했습니다. 젊은 시절 사우디에 가서 외국 근로자로 근무도 했지요. 12살에 상경해서 일을 했는데, 28살때 나라에 큰 일이 생겨서 건축일이 들어오지 않아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습니다. 고향에 내려와 교당을 다니고 있는데, 당시 전제환 교무가 원불교 완도 철산농원에 가서 농사를 지어보라고 권하셨습니다. 일이 없어서 식구들이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에 ‘같은 농사라면 원불교 농사가 좋지 않겠냐’라는 생각이 들었고 부모님과 동생 내외, 저희 집 식구들까지 총 11명이 완도로 내려갔습니다. 그렇게 처음 원불교 일을 맡게 됐습니다.”

약 2년간 철산농원과 소남훈련원에서 일하던 그는 당시 종법사였던 대산종사를 만나게 된다.  

“대산종사님이 2년간 여름에 완도에 오셨습니다. 종법사께서 오시니 훈증을 받기 위해 대중 200여 명이 따라왔지요. 완도에는 그만큼 많은 대중들이 모일 건물이 없었고, 제 전공을 살려서 소남훈련원에 가건물을 지었습니다. 어느 날 제가 대산종사의 손을 잡고 훈련원에 올라가고 있는데, 대산종사께서 법명이 뭐냐고 물으셨습니다. 법명을 말씀드리니 ‘참 좋다! 너 앞으로 이름값 해야겠다’라고 하시며 대중들에게 박수를 치라고 하셨습니다. 그때 그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한 통의 전화를 받게 된다. 원불교 공원묘지(영묘묘원)가 생겼으니 그곳으로 가서 일하라는 연락이었다. 그는 이번에도 망설임없이 영묘묘원으로 향했다. 

“당시 영묘묘원은 3칸으로 이뤄진 가건물이 있었습니다. 1칸은 대산종사님께서 사시고, 2번째 칸은 시자들이 살고, 나머지 1칸을 내어주시면서 ‘자네가 솜씨가 좋다니 이곳을 고쳐서 살게’라고 하셨습니다. 겨울동안 혼자 와서 수리를 했고 가족들이 모두 이사를 와서 영묘묘원에 살게됐죠. 이 곳에서는 청소와 건물 수리, 묘를 쓰는 작업을 주로 했습니다.”

어느 곳이든, 모두 사은님의 뜻이라고 생각해 두말없이 이동한 김대호 교도. 비닐하우스의 성자로 잘 알려진 대산종사의 비닐하우스도 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대산종사께서 영묘묘원에 계시면서 잠시 바깥에서 바람을 쐴 공간이 필요했고, 바닥에 흩어져있던 철재를 모아 바람막이 역할을 해줄 비닐하우스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에는 작게 지었는데 방문객들이 늘면서 장소가 협소해졌고 조금 더 크게 손수 지었습니다. 그러나 전국에서 백단위의 많은 교도들이 찾을 때면 자리가 턱없이 부족했고, 결국 당시 건축일을 하던 김형관씨가 대중접견을 위한 목재건물을 새로 짓게 됐죠. 그렇게 영묘묘원과 함께한 세월이 13년입니다.”

13년간 대산종사 가까이에서 법문 말씀을 받들고 살아온 그는, 대산종사 열반 후 잠시 방향을 잃었다. 영묘묘원에서 함께 지내온 인연들이 하나 둘 떠났고, 3년간 방황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던 중 여산교당 건축장면을 보게된다. 너무도 우연한 만남이 인연이 되어 17년째 지킴이가 됐다. 

“대산종사 열반 후 갈 곳을 잃은 사람처럼 3년간 방황을 했습니다. 마음둘 교당이 없어서 찾고 있던 중에 여산교당을 보게 됐습니다. ‘아 이곳이다’라는 마음이 들었고, 창립부터 교도회장이 되어 함께하게 됐습니다. 여산교당은 군교화를 위한 특수한 지역으로 약 3년 동안 200여 명의 부사관 후보생들의 법회를 담당했습니다. 지금의 충용교당이 생기기 전까지 저와 몇 안되는 교도들이 200인분의 라면과 간식을 준비하며 군교화의 교두보 역할을 해왔습니다.”

충용교당이 봉불하면서 여산교당의 출석인원은 6명이 됐다. 교무가 1년마다 바뀔 정도로 교화가 어려웠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교도회장으로서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교무를 보필 보좌하며 노인대학, 노인복지센터등으로 교화시너지를 냈다. 

“여산교당은 노인대학, 마한노인복지센터 운영을 통해 여산을 비롯 인근 농촌 어르신들이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이를 통해 출석인원도 6명에서 30명으로 늘었습니다. 아직은 짧은 역사를 가진 교당이지만 창립부터 함께해 온 사람으로서 ‘교당의 주인’이라는 마음가짐으로 매사에 임하고 있습니다. 제 별명은 ‘청법제일’입니다. 한번 들은 법문은 잊는 일이 없습니다. 앞으로도 정기훈련과 상시훈련에 최선을 다하고 교도의 사종의무를 잘 지키는 모범적인 교도회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에게 최종 목표를 물었다. “여산교당이 2~3급지가 되는 것”이라고 답하는 김대호 교도회장. 17년동안 묵묵히 교당을 지켜온 그가 있기에 여산교당의 앞날이 더욱 든든하다. 

[2020년 8월 2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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