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 105년 5월 23일 영산선학대학교 훈증 법회


“도가의 명맥命脈은 시설이나 재물에 있지 아니하고, 법의 혜명慧命을 받아 전하는 데에 있나니라.”
『대종경』 요훈품 41장

 

 

만일 하나만을 취하라 한다면
나도 교단에 들어와서 산지가 5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이제 퇴임을 하고 일생을 마무리할 때 ‘무엇을 챙겨서 갈까?’ 그 생각을 곰곰이 해봤습니다. 
이렇게 상당한 세월을 살다보니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아지는 것이 있습니다. 교법도 좋고 법력도 중요하지만 그중에 하나! 오직 하나만을 취하라고 한다면 나에겐 ‘신심信心’이 그 답이었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우리가 일생을 통해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또 잘해도 대종사님의 경지에는 오를 수 없습니다. 우리 회상에 여래如來가 나오셨기 때문에 아마 여래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대종사님 되기는 어렵습니다. 
여래도 천층만층이요, 출가위도 천층만층이며, 항마위도 천층만층이니 누구라도 이 법으로 여래위에 오를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공부가 깊어져서 여래가 됐어도 끝은 아닙니다. 더 높으신 대종사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대종사님이 계시기에 그 어른의 법을 받들어 우리는 나아가야 합니다. 그러려면 이 회상을 영원히 떠나지 않고 다시 찾아와야 합니다.

 

양산 김중묵 종사의 적공
양산 김중묵 종사님이 계셨습니다. 이분은 대종사님 당대에 들어오신 어른이기에 신심과 서원은 말할 수 없이 대단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어른이 돌아가실 것을 미리 아셨던지, 열반 1년 전부터 정전 100독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너무 연로하셔서 힘이 약해지셨기 때문에 당신 목소리로 정전을 녹음해 그 음성을 들으면서 마음을 챙기셨습니다. 어느 날 새벽, 안 나오셔서 가보니 녹음기는 계속 돌아가고 있는 상태에서 앉아 있는 자세로 입적하셨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 그렇게 정진하고 가셨습니다.
나는 그때, ‘대종사님께 신성을 다 바치시고 일생을 적공하신 어른이 다시 몸을 받아 돌아오셔서 원불교를 만나면 바로 전무출신 하실 것 같은데 왜 정전 100독을 하셨을까?’하는 의문이 생겼습니다.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못하고 계속 연마를 하다가, 1년이 지난 후 ‘아~ 이 어른이 참으로 진리를 아시는 분이구나’하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생사거래의 길이 얼마나 중한 일입니까? 지금 이 순간도 우리의 마음은 수없이 작용합니다. 생각은 그렇게 움직여도 이 몸이 있기 때문에 안정이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열반을 하여 이 몸의 제약이 풀리면 생각이 나가는 그 순간, 그곳으로 바로 가게 됩니다. 육신이 없는 세계는 그렇게 불안정합니다. 영혼의 세계에서는 마음 한번 잘 못 먹으면 여지없이 거기로 빨려 들어가는 것입니다.
이 이치를 아셨던 양산종사께서는 평생 생사문제에 전념하시다가 마지막 정전을 외우면서 그 한 마음을 뭉치고 가신 것입니다. 그만큼 오고 가는 문제가 쉽지 않습니다. 몸 한번 바꾸고 와서 다시 이 회상을 찾아 입문하고, 전무출신의 길을 걷는다는 것이 그렇게 어려운 일입니다. 생사거래를 내 힘 가지고 자유로 왕래할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신심을 챙겨야 합니다. 나는 이 신信을 마지막까지 챙기고 가야겠다고 서원했습니다. 그렇게 마음을 굳게 먹었습니다. 

 

스승의 과도한 엄교중책도 다 달게 받고 조금도 불평이 없는 것
우리가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의 신성에 대한 법문을 받들면 가슴이 저릿저릿해집니다. 이중 대종경 신성품 1장은 신성에 대한 표준을 잡아주신 법문입니다. 처음 이 법문을 접했을 때, ‘나도 할 수 있겠다’고 아주 쉽게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이 갈수록 어려워졌습니다.
대산종사께서 자주 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 대중을 인도하실 때 조금 잘못 된 방향으로 가면 바로 잡아야 하겠는데 꾸중을 하면 그만 나갈 것 같으니, 혼을 내도 안 나갈 사람을 찾았습니다. 그분들이 바로 주산종사님과 대산종사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이 두 분이 대종사님께 대표적으로 혼나는 사람이 됐습니다. 잘 모르는 사람은 대종사님께서 이 두 분을 싫어하는 것으로 느꼈을 정도로 크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런데 대산종사님의 말씀이 더 놀라웠습니다. “대종사님께 아무 잘못도 없이 혼을 나도 나는 한 번도 그 일로 서운한 적이 없었다.” 스승이 나를 혼낼 때 내게 잘못이 없으면 억울하여 자칫 마음에 간격이 생길 수 있는데, 대산종사께서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다 하셨습니다. 이것이 참으로 어려운 심법입니다. 
예전에 신도안에 가서 대산종사님을 뵈었을 때, 처음 몇 번은 반갑게 아는 척을 해주셨는데, 나중에는 “왔냐?”하는 정도로 대하시고, 후에는 왔는지 갔는지 무심하게 대하시니, 내 마음에 “저 양반이 나를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모르겠네”하고 서운한 마음이 일어났습니다. 마음에 섭섭한 마음이 생기면 불평이 나오기 마련입니다.

 

스승의 지도에 오직 순종할 따름이요, 자기의 주견과 고집을 세우지 않는 것
여러분들은 주견主見과 고집固執이 있는 편인가요? 아직은 크게 없을 겁니다. 원불교학과 4년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가면 조금 달라집니다. 교무로 발령 받지는 않았지만 그때부터 교무라고 부르니 마음에 뭔가가 생기게 됩니다. 그것이 생기면 지도를 잘 안 받게 되고 신심에 하자가 생깁니다.
신심이란 것은 묘하게 1학년 때가 제일 살아있습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마음에 주견이 생겨납니다. 자기 나름대로 옳고 그름이 생기니, 그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교무가 되어서 현장교화에 나갔을 때, 자기 주견을 내려놓고 “나는 저 어른을 모시고 살 동안에는 저 어른이 나다, 나는 없다”하고 살 사람이 여기에 있을까요? 다 자기 주견으로 살기 마련입니다. 그걸 나쁘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주견이 생긴 만큼 자신의 발전이 더딘 것은 확실합니다. 내 주견이 생겨서 스스로 어른이 되면 일을 그르치기 마련입니다. 이 주견 놓는 공부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므로 신심이라는 것이 ‘누구나 절대 있는 것!’ 이렇게 생각하면 큰일 납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나가는데, 제일 먼저 나를 살피고 또 살피고 또 살펴야 할 것이 바로 신입니다. 이것을 한 뒤에 선도 하고 교리공부도 하고 보은도 하는 것입니다. 신이란 것이 제일 밑바탕입니다.
이 말은 결코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내 마음을 이러한 신심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문제입니다.

 

교단 장래 위한 대종사의 열 가지 부촉
대종사님께서는 광대하신 원력으로, 목숨이 열이면 그 열을 다 바칠 자세로 이 회상을 여셨습니다. 그러나 교화하셨던 시기가 일제강점기였고, 조선총독부에서 원불교를 없애려고 만반의 준비를 다 했던 차인지라 당신이 계획하신대로 만전을 기하지 못하시고 명을 줄이시면서까지 열반에 드셨습니다.
그런 상황을 살펴보면 대종사님께서 얼마나 마음이 바쁘셨을까요. 대종경
부촉품 5장에서 “요사이에는 관변의 지목이 차차 심하여 가니 내가 여기에 오래 머무르기 어렵겠노라. 앞으로 크게 괴롭히는 무리가 더러 있어서 그대들이 그 목을 넘기기가 힘들 것이나 큰일은 없으리니 안심하라”고 하셨지만 당신의 경륜을 실현하기 위해 부촉의 말씀을 자주 하시게 된 것입니다. ‘교단의 장래를 위한 대종사님의 열 가지 법문’(대종경 선회록)은 대종사님께서 열반 전 간절히 강조하신 말씀이기에 그 어떤 법문보다 중하며 깊게 새겨야 합니다. 

 

도가의 생명은 법의 혜명을 이어받아 전하는 일 
그런데 이 법문을 다시 크게 보면 두 가지 내용입니다. 그 하나는 ‘도가의 생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가 회상에 입문해 공부할 때 제일 중한 것이 무엇인가요? 대종경 
요훈품 41장에 “도가의 명맥命脈은 시설이나 재물에 있지 아니하고, 법의 혜명慧命을 받아 전하는 데에 있나니라”고 하셨듯이 법의 혜명을 이어가는 일이 가장 중요한 일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이 세상을 좋은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을 내놓으셨습니다. 그 방법이 바로 교법입니다. 이 교법의 본의를 우리는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해가야 합니다. 이것이 법의 혜명을 전하는 일입니다. 
‘법의 혜명을 이어 받아라’ 하신 것은 대종사님께서 직접 나에게 부촉하신 것입니다.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고, 공을 위해서는 사를 놓는 대의의 가풍을 진작하라
두 번째는 위법망구爲法忘軀, 위공망사爲公忘私의 정신입니다. 바로 전무출신 정신입니다.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어야 합니다. 내 몸이 하자는 대로 자꾸 가다보면 법과는 멀어집니다. 대종사님께서 가르쳐주신 법의 본의를 따라 하다 보면 내 몸으로 인해 생기는 욕심이 놓아지게 됩니다. 만일 법을 놓고 몸을 챙기려 한다면 그것은 전무출신의 정신은 아닙니다. ‘몸을 놓고 법을 챙기는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욕심에 동하면 자비심은 나오지 않습니다. 자비심은 몸을 잊어야 합니다. 공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공을 위하려면 사적인 것을 희생해야 합니다. 사적인 것을 다 추구하면 공이 서질 않습니다. 그래서 위공망사, 공을 위해서는 사를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위법망구·위공망사의 정신은 법위로는 어느 위나 될까요? 만일 특신급에서 이 신이 제대로 서면 ‘일초직입여래위一初直入如來位’ 한다 하셨습니다. 푹 뛰어서 바로 여래위에 오릅니다. 제일 쉬운 공부는 특신급에서 위법망구·위공망사하면 됩니다. 우리가 무늬만 전무출신이 되지 말고 참 전무출신이 돼야 합니다. 겉과 속이 다르면 스스로도 괴롭지만 교단과 교도들에게도 큰 고생입니다. 
 이러한 분들이 주인이요, 주인으로 사는 분은 대의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전무출신 정신으로 사는 사람은 어디를 가든지 해를 입히지 않습니다. 오직 공을 위해 살기 때문입니다. 전체 일을 내 일로 아는 분들이 많아질수록 단체가 좋아집니다. 그러므로 10가지 말씀의 핵심은 이 두 법문에 다 들어있습니다. 이 두 법문을 체 잡으면 됩니다. 

 

사의私意로 사법私法을 내어 교법을 어지럽히는 일이 없게 하라
한 가지 더 주의해야 할 것은 ‘사의私意’로 ‘사법私法’을 내어 교법을 어지럽히는 일입니다. 우리가 공부를 해서 아는 것이 생기면 뭔가를 하려는 생각이 나옵니다. 그럴 때 일수록 대종사님께서 가르치신 법의 본의에 맞게 ‘줄 맞는 공부’를 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가 스승을 모실 때 스승의 자격 중 제일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분이 위로 바른 스승을 모시고 있나’를 봐야 합니다. 스승이 없으면 스승의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개인 법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반드시 그분이 위로 대종사님과 맥락이 닿는 신맥을 바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럴 때 스승의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대종경 선외록
유시계후장遺示啓後章 말씀을 전무출신의 도를 그대로 담아놓으셨습니다. 우리 모두 몸을 놓고 법을 챙기는 공부에 신명을 바치고 공을 이뤄갑시다. 또한 법의 혜명을 받아 전하는 일은 오직 독실한 신심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020. 8. 28. 마음공부16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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