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4년 11월~12월 교학대서원관 훈증법문

 


“일원은 사은의 본원이요 여래의 불성으로, 무생법인無生法印이요, 대적광전大寂光殿이요, 복혜원천福慧源泉이요, 무진장보고無盡藏寶庫요, 삼세제불의 도본圖本이자 천만경전의 근원이니라.” 『대산종사법어』 교리편 10장


본성, 진리와 내가 가까워지는 힘
대종사님께서는 정전 일원상의 진리 장에서 ‘일원은 우주만유의 본원本源이요, 제불제성의 심인心印이며, 일체중생의 본성本性이다’ 하시며, 본원과 심인, 본성 자리를 밝혀주셨습니다.
이것은 일원상과 우리가 어떤 관계에 있는지를 표현해 주신 것입니다. 나와 우주만유의 본원은 어떤 관계인가? 나와 제불제성의 심인은 어떤 관계인가? 나와 일체중생의 본성은 어떤 관계인가? 
이를 다시 두 가지로 설명하자면 ‘본원과 심인’입니다. 본원은 우주만유 전체를 살려내시는 진리의 한량없는 위력과 무한동력으로 ‘사은의 본원’을 말합니다. 제불제성의 심인과 일체중생의 본성은 여래의 불성, 여래부처님의 성품으로 우리 모든 중생이 본래 부처임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일원상의 진리에서 ‘제불제성의 심인’이라 하시면 되는데 왜 ‘중생의 본성’을 함께 밝히셨을까요? 만일 본성을 말씀하지 않았다면 진리와 내가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대종사님의 대자대비이십니다. 
본성을 밝혀주지 않았다면 공부에 힘을 얻기 어렵습니다. 될 사람과 안 될 사람이 따로 있고, ‘나는 안 되는가 보다’라고 스스로 포기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미 가지고 있고, 내 것이니까 공부해볼 만한 것입니다.
내가 젊었을 때를 생각하면 “내가 부처다”라는 소리가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찾아봤습니다. 어디가 부처인지. 아무리 내 속을 뒤집어 봐도 부처가 안 보였습니다. 그래서 스승을 찾아뵙고 말씀을 듣고 있으면 그때는 이해가 됐지만, 나오는 순간 없어져 버렸습니다. 공부하면 변화가 된다 하셨는데 좀처럼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다가 한 오십이 지나서야, “아~ 하고 하고 또 하다보면 되는구나”라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지금 자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무생법인처無生法印處에 귀의하라
대산종사께서는 일원을 ‘무생법인無生法印’이라 말씀하셨습니다. 무생이란 ‘남이 없다’라는 뜻입니다. 남이 없으면 멸도 없습니다. 생사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무생법인이란 생멸이 없는 자리, 우리 각자의 불생불멸한 성품을 뜻합니다.
지금까지 마음이 일원상이 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우리가 평소 쓰고 있는 마음은 ‘생멸법生滅法’인가요? ‘무생법無生法’인가요? 현재 우리가 쓰는 마음은 생멸법입니다. 마음이 나타났다가 없어졌다 합니다. 그런데 이 생멸법으로 찍으면 원圓이 안됩니다. 법인法印이 나오지 않습니다. 무생법인이라야 일원상인 것입니다. 
무생법인은 ‘주한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는 것’이요,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말이 아닌 실제로 행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생활 속에서 수행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마음을 내서 쓰는 것은 생멸법이라 했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주착된 마음을 씁니다. 성인들은 겉으로 볼 때는 마음을 쓴 것이지만 주착이 없이 마음을 썼기 때문에 마음을 쓴 것이 아닙니다. 화를 내지만 화를 낸 것이 아닙니다. 이것이 여래의 심법입니다. 
우리의 온전·생각·취사가 바로 여래의 심법입니다. 온전하다는 것은 주착한 바가 없는 자리며, 텅 빈 공이기 때문입니다. 
보통 우리는 나타난 마음의 세계에서만 살고 있습니다. 마음이 나타나기 이전 세계를 돌이켜 반조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대부분 생멸법으로 무생이 아닌 유생有生의 집착심으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근六根이 육경六境에 끌려가며 살아가는 자신을 ‘무생법인’의 자리, ‘남이 없는 그 자리’, ‘일념미생전一念未生前’ 자리에 돌이켜 비춰보고 또 비춰봐야 합니다. 
주착했다가도 자신의 본성 자리에 얼른 거둬들이고 또 거둬들이는 단련을 계속 해야 합니다. 
나도 그 자리에 마음을 대고 녹이는 노력을 오래 하다 보니 옛날 같으면 한 10년이나 갈 일도, 이제는 많이 가면 일주일 안으로 해결되는 경험을 합니다. 마음이 났다가도 없는 그 자리를 비춰봅니다. ‘무생법인’, 참 좋은 공부법입니다.
크게 고요하고 빛나는 집
대적광전大寂光殿은 크게 고요하고 빛나는 집으로, ‘남이 없는 그 자리’, 무생법인과 같은 자리입니다. 


사실 대적광전하면 어마어마한 자리인 것 같지만 정전 정신수양에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다’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것이 ‘적광寂光’입니다. 두렷하다는 것은 빛을 말씀하신 것이고, 고요하다는 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래 부처님은 대적광전에서 사신다고 그러셨고, 출가위는 중적광전은 되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이는 적광이 안 되면 성인의 위에 올라가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대적광전은 일원상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대는 크다는 뜻이고, 적은 고요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요라는 것은 주변 환경이 고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내 힘으로 고요해 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 고요를 우리가 소유하게 되면 모든 것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이 나오게 됩니다.
지금 우리에게 어마어마한 슬픔이 닥쳤다고 할 때, 사람들은 자칫 죽을 생각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 고요의 힘을 얻은 사람은 자기 스스로 마음을 추슬러서 말 그대로 대적광전에 들어갑니다. 
그곳엔 슬픔도, 기쁨도 없고, 시공도 없고, 고요하고 고요하고 고요해 뭐라 할 수 없는 깊은 안식처가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값이 비쌉니다. 함부로 주지 않습니다. 엄청난 공을 들여서 겨우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자리는 고요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빛이 납니다. 그 빛이라는 것은 ‘혜광慧光’이요, 큰 지혜가 열린다는 소리입니다. 여기에서 지혜란 공부하면서 알아지는 지식과는 다릅니다. 배우지 않고 보지도 않고 알아지는 경지입니다. 이 지혜는 내가 더 얻어 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본래 그것이, 그 성격과 성질이 원만구족하게 갖춰있다는 것입니다.
앞에 큰 대大자를 쓰신 것은 시간과 장소에 구애 없이 내가 어느 때든지 그 적광에 들어가려고 하면 적광이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집은 여러분과나, 누구나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집을 노력해서 찾아간 사람이라야 주인 노릇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적광전에 가기 싫으면 하지 말고, 대적광전을 갖고 싶으면 부단히 정진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리 좋은 기쁨도 일생 이상은 못갑니다. 죽으면 그 순간 마쳐집니다. 그러나 다음 생까지 가지고 가는 기쁨은 이 대적광전 밖에 없습니다. 다른 것은 가지고 갈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그 소소한 기쁨을 얻으려고 일생을 허덕이고, 고락苦樂으로 살아가지만 대적광전을 알고 이것을 얻고자 하는 분은 소소한 것은 우선 조금 놓아두고 이것 얻기에 정성을 다합니다. 
여러분들이 아침마다 좌선을 하는데 비록 마지못해 나와서 하더라도 안 하는 것보다는 낫습니다. 괴로워도 허리를 세우고 졸음을 참고 몸의 습관이 조복되면서 기질이 변화되면 이 대적광전의 맛을 보게 됩니다. 그 다음부터는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됩니다. 그 발심이 일어나야 합니다. 

 

삼세제불의 도본圖本
일원은 과거·현재·미래 모든 부처님의 도본이라 하셨습니다. 예전에는 버선을 만들 때 버선본이 있었습니다. 그 도본을 놓고 본을 뜨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대로 오려서 꿰매면 버선이 됩니다. 그것이 도본입니다. 
삼세제불의 도본이라는 것은 일원상을 내 마음에 그대로 도본 삼는 것입니다. 내 마음이 삐져나왔으면 그것을 잘라 버려야 하고, 들어갔으면 끄집어내는 것입니다. 마음을 일원상에 맞춰가는 것입니다. 이는 자신의 마음공부에도 표준이 되지만 이 도본이 확실하면 어떤 분이 부처인지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어두운 시대에는 도인을 볼 때 그 분의 기운과 언변, 외형적 요소를 봤지만, 지금은 그 분의 마음을 찍어보면 아는 시대입니다. 옷을 남루하게 입었던지 좋게 입었던지, 얼굴이 잘생겼던지, 못생겼던지, 작던지 크던지, 그것과는 관계없이 그분의 마음을 찍어봐서 원이 나오면 그분이 바로 부처입니다. 
다시 말해 저 분이 부처인지 아닌지는 그 분의 마음세계를 보면 안다는 것입니다. 원근친소와 욕심에 끌리는가 안 끌리는가, 아상我相이 있는가 비었는가, 편협한가 원만한가, 그 마음 쓰는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공타원 조전권 종사님께서는 좋은 것 들어오면 오는 즉시 나눠주십니다. 그 분 마음에는 좋고 나쁨이 없으시기에 누가 오면 먼저 온 사람이 임자입니다. 최근 열반하신 전타원 윤성규 종사께서도 자신의 주머니를 다 털어서 있는 대로 다 주십니다. 나중에 차비가 없어서 옆에 사람한테 빌리시기도 합니다. 종로교당 만타원 김명환 종사께서도 화동침구를 운영하시면서 많은 분들께 아낌없이 베푸셨는데 그분 집에 한번 가보니 쓸 만한 가구 하나가 없었습니다. 그런 분들의 마음을 찍으면 무엇이 나오겠습니까. 원이 나옵니다. 
마음을 찍어서 원이 되는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교무가 부처고, 재가는 부처 아니고, 원불교 교도는 부처고, 교도 아니면 부처 아니고 그거 아닙니다. 그것 하고는 관계없습니다. 

 

천만경전의 근원
또한 일원은 천만 경전의 근원이다 하셨습니다. 이 수많은 경전은 바로 일원상의 진리에서 나왔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대종경 수행품 23장에 “경전이라 하는 것은 일과 이치의 두 가지를 밝혀 놓은 것이니, 일에는 시비 이해를 분석하고 이치에는 대소 유무를 밝히어, 우리 인생으로 하여금 방향을 정하고 인도를 밟도록 인도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대종사님께서도 일원상의 진리를 대각하신 후 진리의 근원을 깨달으신 순간 만 생령을 제도할 천만 경전이 나왔습니다. 또한 대종사님께서는 대종경 
수행품 22장에 수양·연구·취사의 실력을 얻어 출중 초범한 큰 인격자가 될 것을 부촉하시면서 무었을 말씀하셨나요? 천만 경전이 바로 이 마음을 일원상과 같이 원만하게 써야함을 강조한 것입니다. 
일원상의 진리가 삼세제불의 도본이요, 천만경전의 근원입니다.

 

[2020. 7. 24. 마음공부15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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