곤산 박광수 원로교무

각산 신도형 종사 교전공부 원고 정리
원불교 100년 성업 원불교대사전 편찬위원장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수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에게 수학의 정석이 있다면, 정전을 공부하는 교도들에게는 각산 신도형 종사의 교전공부가 있다. 예비교무부터 현장에 있는 교무들까지, 그리고 깊이 있는 공부를 하는 재가 교도들에게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정전 공부의 길잡이. 곤산 박광수 원로교무(73·崑山 朴光秀)가 바로 그 책을 탄생시킨 장본인이다. 그는 1310쪽, 4536항목에 이르는 방대한 양의 원불교대사전의 편찬위원장을 맡아 원불교 100년 성업의 한 획을 긋기도 했다.
 

곤산 박광수 원로교무
곤산 박광수 원로교무

운봉에서 출가서원
남원 운봉이 고향인 박 원로교무는 교당에 다니던 어머니의 인연으로, 원불교 모태신앙이었다. 그가 6살 때 운봉교당에 어린이회가 결성돼 정식으로 입교를 했다. 운봉교당에서 근무했던 향타원 박은국 종사, 승타원 송영봉 종사, 균타원 신제근 종사 등 그는 교단의 큰 스승들 무릎에서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중학교까지 고향에서 공부하다 그는 광주에 있는 고등학교로 진학해 광주교당에서 하숙을 했다. 우여곡절이 많았던 고등학교 시절, 그는 자퇴를 하고 서울에 올라가 검정고시를 봤다. 연세대 공대를 목표로 했던 그는 대학입시에 떨어져 1년간 재수를 하기 위해 고향에 내려왔다. 그때 마침 30대였던 좌산상사가 운봉교당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는데, 박 원로교무에게 입시공부를 할 수 있도록 교당에 방을 하나 마련해 줬다. 

좌산상사가 제초작업을 할 때, 그가 옆에서 거들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좌산상사님을 안 만났으면 재수를 해서 대학에 갔을 텐데, 쭈그려 앉아 풀을 뽑으며 여러 인생 이야기를 듣다 보니 심적인 변화가 저절로 일어난 것 같아. 아웅다웅 살아가는 모습들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어. 여기 또 다른 세계가 있구나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있었지.” 출가하겠다는 그에게 어머니는 찬성도 반대도 하지 않았다. 교당의 밝은 면도 어두운 면도 너무 잘 알고 있었기에 스스로 잘 판단하라며 그의 의사를 존중해줬다.


『교전공부』 원고 정리
출가를 결심하고 그는 원광대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다. 군대에 갔다 복학한 3학년 여름방학 때 균타원 신제근 종사가 그와 김기원 교무를 불렀다. 균타원 종사는 동생이지만 스승으로 생각했던 각산 신도형 종사가 마흔도 안된 나이에 일찍 열반에 든 것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균타원 종사는 각산 종사가 동산선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던 강의노트가 잘 정리돼 있으니 그것을 어떻게든 살려야겠다고 생각하고, 각산 종사의 강의노트를 책으로 엮으면 좋겠다는 뜻을 전했다. 

“여름방학 내내 각산님의 강의노트를 원고화 했어. 교전공부의 초벌 원고를 다 정리해서 그해 겨울에 출판했지. 3학년 때 원고작업을 하고 교정도 보러 다니면서 따로 고시공부를 안 했던 것 같아. 그때는 그냥 균타원님의 뜻을 받들어 그렇게 한 것이었는데 이렇게 베스트셀러가 될 줄은 몰랐어. 많은 후진들이 교리공부를 하는 데 교본처럼 사용돼 보람을 느껴.”


교학상장(敎學相長)
균타원 종사는 박 원로교무에게 대학원에 진학하라며 첫 학기 등록금을 후원했다. 그 인연으로 그는 공부를 이어갔고 대학원 졸업 후 동산선원에서 3년, 원광보건대학교에서 3년 근무 후, 1984년부터 퇴임 전까지 원광대학교에서 학생들을 30여 년간 가르쳐 왔다.

“교법의 총설에 세계의 모든 교지를 통합 활용하라 했는데, 우리에게 이웃 종교라는 것은 동양에 불교, 유교, 도교 정도였어. 서양 것이 없었지. 교무들도 서구종교, 서양철학에 대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내가 자청해서 나섰어.” 그는 원광대 원불교학과에 ‘기독교 개론’과 ‘현대철학’ 과목을 개설해 예비교무들이 서양철학에 대한 감각을 가질 수 있도록 안내했다. 염관진 교무가 그의 영향으로 서양철학에 매력을 느끼고 독일에 가서 칸트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따기도 했다. 

원리원칙에 철저한 박 원로교무가 원광대 기숙사 관장으로 재임하던 시절, 그는 학생들의 불만을 야기했던 기숙사 입사 청탁 문제를 깔끔히 정리하고 성적과 거리를 기준으로 공정한 학생선발 기준을 확립했다.

“생각해 보면 출가할 때부터 매 순간 내가 선택해 왔기 때문에 그 선택에 대해 내가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고 있어. 책임을 지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움을 놓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 교학상장(敎學相長), 가르치고 배우며 서로 함께 성장한다는 그 말을 참 좋아해. 우리 일상생활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이 다 배움이야.”


『원불교대사전』 편찬
“류병덕 교수님 주관으로 1974년도에 원광대 종교문제연구소에서 원불교 사전을 출간했어. 그 후 외부에서도 원불교에 대한 관심이 늘어났지. 학자들이 원불교 교리에 대해 깊은 이해를 할 수 있는 자료가 없어서 간혹 논문에 왜곡되게 쓰인 것들이 나타났어. 지성인들에게 원불교를 알릴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싶어서 사전을 기획하게 됐어.”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들과 함께 항목을 선별하고, 대·중·소 항목으로 구분하고 조정하는 데만 5~6년의 시간이 걸렸다. 마침 원불교 100년 성업회 문화분과 출판사업으로 채택됐고, 그는 30여 명의 집필위원들의 총 책임자가 돼 편찬위원장으로 원불교대사전 발간에 모든 공력을 들였다.

“집필하시는 분들의 개인 의견이 들어가면 안 되기에 객관성을 유지하도록 원고를 반려하고, 수정작업을 하고 의견을 조율하는 과정이 만만치 않았어. 경제적인 어려움도 있었고, 적은 예산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는데 무형의 자산은 계속 가는 것인데 투자가 미비했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아. 종교학자나 이웃종교 사람들이 조그마한 교단에서 어떻게 그렇게 거창한 작품을 내놓을 수 있냐고 감탄을 많이 했었지.”

10여 년에 걸친 방대한 작업이 결실을 맺어 1310쪽, 4536개 항목의 원불교대사전이 그가 퇴임하던 원기98년 완성됐고, 현재 네이버 검색을 통해서도 자료가 제공돼 일반인들에게 원불교와 관련된 정보를 제공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벽을 깨뜨리자
퇴임 후 생활을 묻자 그가 말했다. “면벽수행을 하고 있어. 내가 말하는 면벽은 내 앞에 닥쳐 있는 나를 답답하게 만드는 벽을 깨뜨리자는 거야. 자신이 겪는 한계도 벽, 우리 교단이 안고 있는 것도 벽, 국가와 인류가 안고 있는 것들도 다 벽, 그 벽을 마주하면서 뭔가를 해야겠다는 생생한 의지를 내려고 해.” 

그는 후진들에게 묶이지 말고 자유인이 되라고 했다. “성서 한 권을 가지고 기독교에서 엄청나게 많은 해설서가 나오고, 논문도 수백만 편이 될 거야. 우리 경전도 무한히 열려 있어서 어떤 방면으로든지 그것을 해석하고, 변화된 시대에 맞게 그 경전을 볼 수 있어야 해.” 그는 덧붙여 비판 정신을 강조했다. “사건과 상황에 대해서 명확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해결하고 넘어서는 방법을 찾을 수 있는 비판 정신이 필요해. 그저 ‘좋은 게 좋습니다’ 이런 태도로는 발전을 못 해. 끊임없이 자아성찰을 하고 세상을 향해서도 비판적인 사고를 유지해 줬으면 해.”

[2020년 9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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