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5년 5월23일 영산선학대 훈증


“성위聖位는 벼슬이라 하지 않고 위位라 하는데 법위등급에서 보면 법강항마위에서 대각여래위까지이다. 따라서 인작人爵보다는 천작天爵이 좋고, 천작보다는 성위聖位가 좋은 것이니 정신을 차려 공부하자.” 
『대산종사법문3집』 교법 81장


도가의 명맥을 이어가는 길
문: 출가의 길을 걸으며 이제는 나가지 않고 살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활해야 할지 표준을 잡고 싶습니다.
답: 대종사께서는 대종경 요훈품 41장에서 “도가의 명맥命脈은 법의 혜명慧命을 받아 전하는 데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법의 혜명을 제대로 이으려면 우리가 여래如來가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여래 되는 것이 쉬운 일인가요? 이룰 수 있는 목표가 아니면 그 목표는 세우나 마나 한 목표 아닌가요?
그러나 우리가 만일 여래가 못된다면 법의 혜명을 잇지 못하는 것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일입니다. 다행히 대종사께서는 누가 되었든지 보통급, 특신급도 혜명을 이어갈 수 있도록 법을 짜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일상수행의 요법’입니다. ‘일상수행의 요법 9조’는 누구나 다 할 수 있습니다. 100점은 아니더라도 그 표준대로 노력할 수 있습니다.
1·2·3조의 경계를 따라 있어지는 요란함, 어리석음, 그름을 없게 하는 공부도 그 말씀 그대로 대조하며 실행할 수 있습니다. 4조의 신분의성의 공부길도, 5조의 감사생활, 6조의 자력생활, 7조의 잘 배우는 사람, 8조의 잘 가르치는 사람, 9조의 공익심 있는 사람 되는 것도 누구나 다 실천할 수 있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은 보통급도 할 수 있고, 특신급도 할 수 있으므로 그 하나 하나를 실행해 가면 법의 혜명이 이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지금 이 순간,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일상수행의 요법에 대조하여 온전히 가라앉혔다면 그 사람은 혜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정성을 다해서 내가 할 수 있는 그 하나하나를 실천해가야 합니다. 그 때마다 우리는 법의 혜명을 받아 전하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소성대以小成大의 이치에 따라 그 힘이 쌓이고 쌓이면 큰 적공의 결과가 나오게 될 것입니다. 법의 혜명을 이어가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 말아야 합니다.

 

불공에 대한 공부길
문: 주위 인연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떻게 불공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다른 도반들이 저에게 불공을 하지 않을 때는 섭섭한 마음도 일어납니다. 공부길을 잡고 싶습니다.
답: 불공을 왜 드리나요? 자신을 위해서 상대에게 불공하는 것은 ‘목적성 불공’입니다. “참다운 불공은 보은하는 것이다”라고 정확하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사은의 은혜를 알아 보은행을 하는 것이 불공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구체적으로 ‘인공人供·천공天供·불공佛供’의 세 가지 길을 밝혀주셨습니다.

인공이라는 것은 ‘인록人祿, 인작人爵’으로, 사람이 주는 녹과 권리를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어떠한 일을 잘되기 위해서, 무엇을 잘하기 위해서 목적을 가지고 공들이는 것입니다. 노력한 만큼 그 결과가 잘 돌아오면 괜찮은데 상대가 나에게 고맙다는 소리도 안하고, 잘할 기미가 없으면 중간에 하기싫어지고, 실망하게 되며, 나중에는 미운 마음까지 생깁니다. 불공을 한다는 것이 오히려 더 멀어지는 경우가 종종 생깁니다.

인공은 무언가 내가 한 만큼 바람을 가지고 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공의 한 종류는 될지언정 진정한 불공은 아닙니다.
반면에 천공은 깨닫지는 못했으나 사심 없이 주고받는 것입니다. 마음에 사사로운 욕심이 없다는 것은 바라는 바가 없다는 뜻입니다. 순수하게 아무 생각 없이 바치는 것입니다. 이럴 때 ‘천록天祿, 천작天爵’이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하늘이 도와주고 복을 내리는 것입니다. 이 경지만 돼도 대단한 심법입니다. 

그 다음 단계가 바로 불공입니다. 불공은 최고의 단계입니다. 지금 우리는 인공을 불공으로 생각합니다. 인공은 불공의 껍질을 쓴 것이며, 천공 또한 완전한 불공이 아닙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진리를 요달了達하신 불보살들에게 바친 것이 불공이고, 불보살들이 중생에 인연을 건 것이 불공이며, 삼라만상이 처처불상處處佛像임을 알아 일마다 그 심경으로 노력하는 것이 사사불공事事佛供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곧 불공이란 ‘부처님이 부처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이 전제가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이 부처님을 모시는 것도 아니고, 부처님이 사람을 모시는 것도 아니며, 부처님이 부처님을 모시는 것이 불공입니다. 이것이 최고의 단계입니다.

부처님은 진공묘유眞空妙有의 마음을 쓰시는 분입니다. 진공이라는 것은 나라는 것이 텅 비어 있는 빈 마음입니다. 묘유라는 것은 그 빈 마음으로 그 상황과 사람에 딱 맞게 행하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대상이 어떠한 모습으로 다가오더라도 진공묘유로 보고 대하십니다. 

대종사께서 부모은을 밝혀 놓으셨지만, 이 세상 모든 부모들이 다 잘하는 것은 아닙니다. 잘하는 부모도 있고, 못하는 부모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잘하든 잘못하든 우리는 부모를 부모은으로 모실 수 있어야 합니다. 부모가 잘할 때는 부모은으로 보이고, 잘못할 때 부모은으로 보이지 않는다면 원망이 나오고 모셔지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 불공이라는 것은 ‘부모를 부모은으로 볼 수 있는 눈’이 생긴 것입니다. 설령 악덕한 부모라도 결국은 자비로운 부모로 나에게 다시 돌아올 수 있습니다. 그 사이에 어떤 관계가 있던 그 숙업이 녹아나면서 자비로운 부모로 모셔지는 것이 불공입니다.

만일 인공의 자세로 나간다면 바라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서로의 업장을 결국 녹여 내지 못합니다. 천공이 되어야 조금 뛰어넘을 수 있고, 불공이라야 그 증애를 넘어 서서 끝까지 부처로 보고 공들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불공을 제대로 행한다면 해결 안 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정전 불공하는 법에 “과거와 같이 막연히 한정 없이 불공하는 것이 아니라, 한 때, 수일, 수월, 수십 년, 일생, 한 두 생, 수십 생, 수백 생, 수천 생, 수만 생, 시일의 장단은 있을지언정 그 일의 성질을 따라 적당한 기한을 불공하는 것이 사실적인 동시에 반드시 성공하는 법이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 법문을 받들고 너무 좋았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인공을 불공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이 생깁니다. 천공만 가도 성직자의 자세는 된 것입니다. 인공, 천공, 불공 법문이 참 좋습니다.

 

성품자리를 알고 싶습니다
문: 저희들 각자에게 성품이 있다고 하셨는데, 믿는 것 외에는 성품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궁금합니다. 
답: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매일 아침 선禪을 합니다. 선공부에 오래오래 공을 들이면 마음에 분별심이 싹 가라앉을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마음이 일념이 될 때, 바로 그 자리가 성품자리입니다.
우리는 평소에도 그 자리를 늘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끊임없이 분별하는 ‘분별성分別性’이 있어 성품자리를 확인하지 못하고 삽니다. 만일 내 마음에 이 분별을 쉴 수 있는 마음의 힘이 생긴다면 일상에서도 온전히 성품자리를 비춰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공력이 더 커지면 일을 하고 사람을 만나면서도 내 마음을 그 자리에 돌려내는 힘이 생기게 되고, 성품을 온전히 기르게 됩니다. 이 자리를 맛보지 않으면 마음을 잘 쓸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좋은 선이라 할지라도 아무 일도 안하고 온종일 선에 공들이는 것을 대종사께서는 크게 경계하셨습니다. 대종사께서는 인류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삼학공부三學工夫’를 표준 잡아 주셨습니다. 아침에 정해 놓은 시간에 정진하고, 활동할 때에는 “그 일 그 일 일심을 하라”시며 무시선 공부길을 밝혀주셨습니다.

 

자비심을 갖고 싶습니다
문: 세상을 어지럽히는 사람들을 볼 때 어떻게 저 사람을 자비심으로 하나로 느끼고 품을 수 있을까? 고민하게 됩니다. 시비는 분명히 가리면서도 자비심을 가질 수는 없는 건가요.
답: 예전에 사형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그 어머니는 우리 아들은 절대로 사람을 죽일 사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 아이가 얼마나 착하고 좋은 아이인데 그만 나쁜 친구와 어울리게 됐고, 그들의 꼬임에 빠져 그렇게 무서운 죄를 짓게 됐다는 것입니다. 나쁜 친구들의 어머니들도 다 똑같은 말을 할 것입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것은 거짓된 말이 아니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나쁘다고 보는 그 사람을 어머니는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사람이 아니라고 볼 수 있을까요. 

세상 사람들은 그 사람이 커서 나쁜 일을 할 때의 그 사람만을 기억하지만 어머니는 그때만 아는 것이 아니라 막 태어나 갓난아이로 방긋방긋 웃을 때부터 알고 있습니다. 100일이 지나고 돌을 맞이할 때, 3살 넘어가며 한창 재롱을 피울 때 아이가 얼마나 이쁜가요. 누구나 그런 시절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어머니는 그 어린 시절을 알기 때문에 우리 아들은 절대로 나쁜 짓 할 애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자비심을 갖는다는 것은 그 어린 시절, 철이 없던 그 시기를 아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 성품 자리가 바로 어린 시절입니다. 성품이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중죄를 지은 그 사람도 성품이 있습니다. 성품 자리를 우리가 확실하게 인지하게 되면 그 사람을 불성의 존재로 알게 됩니다.

성자들께서 자비심이 우러나오시는 것도 그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죄는 미워할 수 있어도 제도 받지 못할 사람은 없음을 아시는 부모의 마음을 소유하셨기 때문입니다.

 

[2020. 9. 25. 마음공부17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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