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는 가까운 길을 두고 먼 길을 돌아간 것처럼 보인다. 앞날을 내다보기 어려운 세계정세와 일제의 억압으로 기존 가치관이 무너져 내리는 일대 혼란기에도 세상에 나서지 않고 차근차근 자신의 구세경륜을 실현해갔다. 그 핵심은 결국 사람을 길러내는 것이었다. 불교를 혁신해서 새로운 교법을 짜고 끊임없이 사람들을 훈련시켰다. 오직 사람을 변화시키고 새롭게 길러내는 지난한 일에 혼신의 힘을 쏟았다. 당시 상황을 감안하면 참으로 먼 길을 선택한 셈이다. 모든 부처와 성현들이 그랬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스스로 깨우치고 자력을 세우도록 기다려주고 이끌어주는 한 없이 먼 길을 택한 것이다.  

사요의 ‘자력양성’ 조목은 평등사회 구현을 위한 신앙 강령 중 하나이다. 대산종사는 자력의 요체를 정신의 자주력(自主力), 육신의 자활력(自活力), 경제의 자립력(自立力)이라고 간명하게 밝혀 주었다. 이를 개인적으로 실행하려면 우선 훈련법으로 촘촘하게 자신훈련을 하는 데 정성을 들여야 한다. ‘참 나는 곧 부처요, 하늘이요, 여래요, 상제요, 조물주인 것’이라고 한 대산종사의 부연 법문을 살핀다면 자력양성의 궁극점이 어디인지 알 수 있다. 자력양성의 종착점은 바로 성불이다. 실다운 훈련으로 기초를 다져야 참된 신앙에 이를 수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교단 조직 운영에도 자력양성의 원리를 적용할 수 있다. 예컨대 교구자치제도 자력양성 관점에서 보면 교법과 스승님들의 경륜을 실현하는 길이다. 교구자치제 추진을 단순히 행정 시스템의 효율적 개선의 측면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교구의 자치역량 강화는 개인을 넘어 교단의 자주·자활·자립력을 키우는 확장된 자력양성 과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교구 중심으로 보다 자율적인 훈련을 통해 자주력을 키우고, 인재를 양성하고 지역사회를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자활력을 키우고, 튼튼한 경제적 토대를 갖춰 자립력을 키울 때 우리는 비로소 교구자치의 역량을 갖추게 될 것이다. 아이가 혼자서 걸으려면 수없이 넘어져야 하듯이 자력양성 공부에는 숱한 시행착오와 고통이 따른다. 중앙총부는 재가출가 법동지들의 잠재된 역량을 믿고 각종 권한을 과감히 지방에 위임해야 한다. 지방에서 할 수 없는 것만 맡아서 주재하고 지원해야 한다. 지방도 책임감을 갖고 중앙에 대한 의존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한다. 

해외총부 건설이 더딘 이유는 자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일찌감치 교구자치를 통해 자치역량을 길렀더라면 지금처럼 벅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교도 개인의 자력이 커지고, 각 교당의 자력이 커지고, 각 교구의 자력이 커질 때 비로소 교단도 성장한다. 가까워 보이는 길을 버리고 자력양성이란 먼 길을 뚜벅뚜벅 걸어갈 때 우리 모두는 바르게 성장할 수 있다. 먼 길이 가까운 길이다.

[2020년 10월 09일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