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타원 이명신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동생 데리고 왔습니다.” 농타원 이양신 교무가 동생인 소타원 이명신 교무를 총부에 데려와 대산종사에게 인사시키자, 대산종사가 말했다. “네가 데려온 게 아니다. 전생 숙연으로 온 아이다.” 구례, 광주, 종로, 원주, 서면, 남대전, 동대전 등 여러 교당과 서울교구, 교정원 재무부, 문화사회부 등 교단의 부름에 따라 한평생을 살아온 소타원 이명신 원로교무(素陀圓 李明信·71). 만덕산 ㈜푸른생명에서 퇴임 후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그를 만났다.


성직의 길을 가야 할 아이
영광 대마면이 고향인 이 원로교무의 집은 좌산상사의 윗동네에 위치해 있었다. 면장이었던 그의 아버지는 오랫동안 대마교당 교도회장직을 수행했다. 대마교당은 일찍이 정산종사가 ‘수많은 불보살이 나올 곳’이라고 점찍은 곳이다. 

원광여자중학교에 입학했던 이 원로교무는 언니를 따라 출가의 길을 갈까 걱정하던 아버지의 권유로 중학교 2학년 때 광주 살레지오 미션 스쿨로 전학을 가게 된다. 그 당시 담임교사가 이 원로교무를 눈여겨보고 수녀가 될 것을 권장했다. 교장까지도 ‘수녀가 되면 이태리에 보내주겠다’라며 그가 수녀의 길을 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수녀들의 생활이 답답해 보여 그리 좋아 보이지 않았던 그는 마음을 열지 않고, 광주여자상업고등학교로 진학해 졸업 후 서울에 올라가 제약회사에 취업을 한다. 농타원 이양신 교무는 이 원로교무에게 직접 출가를 권유하지는 않았지만 주변 인연들을 통해 그에게 지속적으로 출가를 권했다.
 
“직장 생활을 3년 정도 하다 보니까 상사들을 봐도 그렇고 사람들 사는 게 별로 재미가 없어 보였지. 마침 남동생이 원광대를 다니게 돼서 같이 익산으로 내려오게 됐어.” 일 처리가 분명하고 경리에 밝았던 그가 익산에 내려오기 위해 사직서를 냈을 때, 회사에서는 사직서를 처리하지 않고 몇 개월간 그를 기다리며 안타까워했다. 이 원로교무는 재무부에서 출납을 도와주다 당시 재무부장이던 창산 정도윤 교무의 추천으로 출가를 하게 된다. “서울에서 생활할 때 아무런 이유없이 난 30살 되기 전에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는데, 익산 총부에 내려와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자연히 없어져 버렸어.”


교화현장에서
이 원로교무의 첫 발령지는 전남 구례교당이었다. “원불교 예절 1호라는 송타원 백수정 교무님을 모시고 살았어. 생활이 일원상하고 똑같은 분이셨어. 언행이 조신하시고 정복 입은 모습이나 사복 입은 모습이  똑같이 흐트러짐이 없으셨어. 불단과 불구, 방석, 신발정리 등도 흐트러짐 없이 정확해야 했지.” 첫 부임지에서 배운 예의범절과 도리가 이 원로교무의 한평생도 흐트러짐 없이 살아오게 만들었다.

종로교당에서 좌산상사를 모시고 근무할 때는 좌산상사가 “일반법회를 한 번도 안 본 부교무가 어떻게 200명 넘는 일반 교도 이름과 얼굴을 정확히 다 알고 있냐”며 그를 칭찬하기도 했다. 그는 여러 부임지를 다닐 때마다, 항상 교도들의 이름을 먼저 익히고 몸과 마음으로 다가가기에 노력했다. 

원주 개척지로 발령이 났을 땐 혼자서 어린이, 학생, 청년, 일반법회를 다 보며 6년간 교화에 힘썼다. 개척지라 모든게 부족하고 어려웠으나 이전에 근무했던 교당의 학생회 인연들이 찾아오면 그는 흔쾌히 그들을 반가이 맞았다. “만인의 어머니가 되겠다”는 마음으로 출가한 그는 가는 곳마다 어려운 사람들을 먼저 살폈다. 그가 익산 총부에서 근무하다 종로신협으로 이동하게 되자, 총부 간사들이 함께 찍은 사진과 정성스런 손편지를 모아 앨범으로 만들어 그를 환송해 줬다. 그가 초창기 근무했던 교당의 청년들, 학생들이 지금까지도 그를 찾아오는 건 그의 따스한 마음이 전달됐기 때문일 것이다.
 

경계로 생각하지 않아
원기83년 그가 교정원 재무부에 있을 때 서울에 종로원광신용협동조합이 부도가 났다. 그 당시 수습위원회에서 ‘이명신 교무가 오면 해결이 되겠다’라고 회의가 됐다. 교정원장이었던 효산 조정근 종사가 그에게 “자네가, 종로신협에 가야겠다”라고 했다. 출가를 했으니 물에 들어가래도 가고, 불에 들어가래도 간다는 수화불피(水火不避)의 정신으로 그는 서울로 가게 된다. 차압이 들어오고 사람들이 몰려와 험한 소리를 하는 등 정복을 입고 하루종일 서서 찾아오는 사람들에게 죄송하다고 허리 굽히는 일이 하루이틀이 아니었다. 2년 3개월에 거쳐 일을 수습하게 된 그. “남들이 볼 땐 큰 경계라고 생각하는데, 나는 별로 경계라고 생각하지 않았어. 그냥 살고 나면 또 내일이 돌아오고, 열심히만 살면 다 지나가니까 크게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던 것 같아.”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여성본부 상임대표
원만한 소통으로 종교간 대화와 남북협력 사업 앞장서


남측 대표 여성으로 
종로신협 부도를 수습하고 문화사회부에서 차장, 부장으로 근무하며 그는 종교 간 대화와 남북협력 사업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기 시작한다. 그가 문화부 차장일 때 구례교당 청년이었던  정인성 교무가 서울교구 사무국에 있었다. “정인성 교무와 함께 경남대학교 북한대학원에서 북한에 대해 공부를 했어. 정 교무가 그때부터 해서 지금까지 남북관계에 역할을 잘해주고 있어 고마워.”

이 원로교무의 정확한 일처리와 두루 소통하는 원만함은 시민운동 실무자들이나 이웃 종교인들에게 늘 인기였다. “시민단체, 이웃종교, 정부, 국정원 등 미팅이 많았어.” 그럴 때마다 이 원로교무는 사람들의 신임을 얻어 6.15 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여성본부 상임대표,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상임위원 등을 맡아 평양과 금강산을 여러 번 오가며 남북관계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2007년 평양에서 열린 6.15 공동선언발표 7돌기념 민족단합대회에서는 남측을 대표해 그가 남북해외 대표자들 앞에서 우리 정복을 입고 당당히 대표 연설을 하기도 했다. 

“백두산을 갈 때도, 평양에서 지하철을 탈 때도, 새벽에 회의를 할 때도 한 번도 정복을 벗어본 적이 없어. 지하철을 시승할  때 검은 치마 흰저고리인 우리 정복을 보고 북한 학생들이 매우 반기고 좋아해 줬어.”

그가 문화사회부에 근무할 때, 원불교 군종이 승인 결정되는 경사도 있었다. “다른 종단에서 반대를 많이 했는데, 좌산상사님의 원력으로 군종 승인을 위해 여러모로 주도면밀한 노력을 기울였어. 구산 김호영·서산 국서인 교도님들의 활약이 컸지.”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어
출가의 길을 걸어오면서 혹시 후회된 적은 없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는 단 한번도 전무출신의 삶을 후회해 본 적이 없다고 했다. 그는 후진들에게 “개인이 걸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원불교 간판이 걸어다닌다고 생각하라”며 언행을 바르게 할 것을 당부했다. 전생 숙연으로 이 길을 찾아온 그는 다음 생에도 또 그렇게 이 길을 걸어갈 것이다. 

[2020년 10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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