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산 성정철 종사(誠山, 1902년~1987년)

“오늘도 나를 찾고 내일도 나를 찾자. 오늘도 나를 놓고 내일도 나를 놓자.” 성산 성정철 종사가 일평생 마음에 새기고 살았던 좌우명이다. 비록 수려한 필체는 아니지만 어느 날 보감될 말씀을 청하는 한 후진에게 당신이 한평생 마음에 간직하고 살았던 좌우명을 써주신 것으로, 이 유묵은 현재 중앙중도훈련원 한켠을 차지한 채 찾아드는 입선인들의 공부 길을 밝게 열어주고 있다.

성산 성정철 종사, 그는 교단 초창기 어려운 교단 살림을 맡아 법을 위해서는 몸을 잊고 공을 위해서는 나를 놓는 위법망구 위공망사爲法忘軀 爲公忘私의 삶을 살았던 존경받는 선진 가운데 한분이다. 공심과 정성이면 못 이룰 것이 없다는 신념으로 소태산 대종사와 정산종사, 대산종사를 한결같은 신성으로 모시며 어렵던 초기 교단을 일궈 오신 어른이다.

 

대도정법을 찾아서
성산종사는 1902년 11월 21일에 경남 창녕군 유어면에서 부친 성재민 선생과 모친 건타원 손학경 여사의 2남 3녀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본디 천석지기의 유복한 가정에서 자라났으나 8세 때 부친상을 당하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더욱이 하나 뿐인 형이 생활 방도를 찾아 만주로 이거했다가 갑자기 유명을 달리하자,  형수 조창환의 인도로 증산교 일파인 ‘무극대도’에 입도했다.

무극대도는 조철제가 이끌던 일명 조천자교로 당시 차경석이 이끄는 차천자교와 함께 증산교계의 양대 산맥을 이루며 번창하고 있었다. 특히 무극대도의 교주인 조철제는 성산종사의 형수인 조창환 선진의 조카로, 성산종사를 비롯한 전 가족이 조창환 선진의 인도로 무극대도에 입도를 하자, 가족 관계로 연결된 성산종사를 크게 신뢰해 재정 관리 책임을 모두 맡겼다.

하지만 성산종사는 얼마 지나지 않아서 소와 돼지를 잡아 치성을 드리는 것으로 혹세무민하는 무극대도가 정법이 아님을 곧 알아차렸다. 이 무렵 이만갑, 장적조 선진으로부터 생불님이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모친(손학경)과 형수(조창환)는 대종사를 만나고자 불법연구회에 드나들기 시작을 하더니, 원기9년 12월경에 이르러 아예 개종을 하고 불법연구회가 있는 익산으로 이거를 했다. 

 

무아봉공 지공무사의 삶
이듬해인 원기10년 어느 따듯한 봄날, 모친과 형수의 인도로 중앙총부를 찾아온 성산종사는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고 그 자리에서 출가를 결심했다. 하지만 원기10년은 그야말로 평지조산의 역사를 시작하던 어렵던 시기였으므로 교단 형편이 누구 하나도 거둬들일 상황이 아니었다. 대종사는 교단의 간고한 형편을 이유로 2~3년 후에 다시 보자며 그의 출가를 바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로부터 3년 뒤인 원기13년 봄, 약속에 따라 다시 중앙총부를 찾은 성산종사는 마침내 출가를 허락받을 수 있었다. 일터는 주로 영산과 익산에서 서무, 산업, 재무 등을 전전하며 교단 살림을 책임지고 꾸려가는 일이었다. 특히 성산종사는 원기15년부터 20여 년을 영산에 머물며 교단 살림을 책임졌는데, 당시만 해도 영산의 농업 수입으로 교단 살림을 하던 때였다. 

성산종사의 영산에서의 삶은 한마디로 가사불고하고 오직 이 공부 이 사업에 온통 다 바친 무아봉공의 삶이었다. 오죽이나 집을 오가지 않았으면 6살 난 딸이 어느 날 집에 찾아든 아비를 보고 누구냐고 물었을까? 성산종사는 영산에 머무는 동안 때로는 농사꾼으로, 때로는 마을 이장으로, 또 때로는 장사꾼으로, 주어진 일에 아무 불평 없이 늘 최선을 다하는 지공무사의 삶을 살았다.

 

가진 것은 막고 품는 재주
성산종사가 영산에서 머무는 동안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에 들었고 이윽고 일제가 폐망하면서 해방이 찾아왔다. 해방 후 무질서한 사회 상황과 급격하게 찾아든 경제 불황은 교단의 살림살이에도 큰 영향을 가져다줬다. 성산종사는 원기34년 이 어려운 시기에 정산종사의 부름을 받고 중앙총부로 와 원기34년부터 산업부장과 재무부장 등 교단 중책을 맡으며 살림을 이끌기 시작했다.

당시만 해도 교단 재정이 넉넉지 않은 상황이어서 대중들은 죽으로 끼니를 이어갈 수밖에 없는 열악한 상황이었다. 그나마도 마음껏 먹을 수가 없어서 7, 8월이 되면 고구마를 채 썰어 넣고 거기에 밀가루를 풀어 끓인 죽으로 겨우겨우 연명했다. 더욱이 해방 후 무분별한 벌목으로 땔감이 갑자기 귀해져서 겨울이면 토탄을 캐서 난방을 하다가 폭발 사고가 일어난 일도 있었다.

더욱이 당시는 교단이 막 체제를 정비하고 교육, 자선, 사업 기관을 벌여갈 때였으므로 더욱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으면 안 됐다. 성산종사는 못 먹고 못 입고 못 쓰더라도 절대 빚은 져서는 안된다는 신념으로 교단 경제를 운영해 나갔다. 자칫 일이 틀어져 계획대로 되지 않는다면 교단 전체가 위험에 빠질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에 아무리 고충이 커도 무리한 욕심을 내지 않았다.

성산종사는 훗날 그 어려운 시기에 교단 살림을 어떻게 했느냐는 물음에 “당시로서는 예산이 책정된 범위 내에서 집행할 수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주위에서는 나를 간혹 딱딱하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고기를 잡을 줄 모르는 사람은 물을 막아놓고 물을 품어서 물고기를 잡을 수밖에 없듯이 나의 경제 수완은 ‘막고 품는’ 재주 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천금을 맡겨도 틀림없는 분
성산종사는 교중의 실정을 모른채 허황한 계획을 세우고 말하는 사람을 보면 ‘날아가는 기러기를 보고 물을 끓이는 격’이라며 경계를 했다. 그러나 교단 역시 사람이 사는 곳인지라 무리한 사업으로 인해 교중이 큰 근심에 쌓이고 난관에 부딪치는 일들이 적지 않았다. 성산종사는 교단의 복잡한 일이 생길 때마다 감당하기 힘든 수모를 겪으면서도 그 뒷수습을 혼자 감당해 나갔다. 

영산에서 염전 사업을 하다가 실패한 일, 삼중당한약방에 투자를 했다가 곤경에 처한 일, 그리고 원광중·고등학교 사건 등 교단의 크고 작은 경제 사고들을 수습하는 데는 늘 성산종사가 뒤에 있었다. 특히 원광중·고등학교 사건은 채권자들로부터 길거리에서 창피를 당하는 시달림을 받아야 했고, 교단의 책임자로서 재판정에 불려다니는 수모를 감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하지만 성산종사는 지극한 공심과 정성이면 못할 일이 없다는 신념으로 그 모든 일들을 정성으로 풀어나갔다. 소태산 대종사는 특별한 기술과 특별한 선행으로 한때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제자보다는 오래도록 평범을 지키는 사람을 더 귀하게 여겼다. 돌이켜보면 성산종사의 일생은 이러한 소태산 대종사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 가운데 비범이 숨어 있는 무위이화의 삶이었다. 

 

위법망구 위공망사의 삶
성산종사의 삶은 한마디로 위법망구 위공망사로 집약된다. 바로 이웃해 살던 용타원 서대인 종사는 훗날 “어느 날 아침 경내 청소를 하는 성산종사님께 기왕이면 사가 집 마당도 같이 쓸고 쥐구멍도 좀 막아주세요” 하고 말씀을 드렸더니 “사가에서 함부로 빗자루를 들고 쥐구멍을 막으면 다른 사람이 전무출신이 자기 집 일한다고 할 것”이라며 사가 일에는 절대 무심했다고 회고했다.

성산종사는 열반을 앞두고 “나는 대종사님을 처음 뵙고 내 몸과 마음을 모두 대종사님과 이 회상에 바쳐버렸다. 그 후로 나는 대종사님의 가르침을 한 말씀도 어긋나지 않게 살려고 노력했다. 나는 이러한 신의를 정산·대산 종법사님께도 일관했고 그것을 대의로 믿었다. 나는 일생동안 아무 일도 한 일이 없다. 다만 이 법 만나 사심 없이 일생을 지냈을 뿐이다”고 했다.

“그동안 내가 공중 사를 맡아서 크게 그르치지 않은 것은 내가 능력이 있거나 잘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오직 사필귀정의 신념으로 나를 놓고 대종사님께서 뜻하시는 일을 시키는 그대로 어김없이 이행하다보니 저절로 이뤄진 결과”라며 “위법망구 위공망사爲法忘軀 爲公忘私를 공부 표준으로 사는 것이 도인들이 공부하는 길이요 전무출신의 길”이라는 부촉을 남기신 성산 성정철 종사. 

대산종사는 그의 열반을 당해 “신의관고금 경륜통우주信義貫古今 經綸通宇宙의 심법을 몸과 마음으로 계승하신 만대의 사표”라 말하고 “하늘의 성誠과 땅의 성誠이 성산의 위법망구 위공망사의 성誠이 되시어, 제생의세 성불제중의 심신으로 시방일가 사생일신이 된 이 회상 일원만불도량의 불탑신이 되었으니, 길이길이 받들고 모실 거룩한 성자의 삶이었다”고 찬양했다.

 

성산 성정철 종사 약력
1902년 11월 21일 경남 창녕군 유어면 부곡리 출생
1928년 4월 출가
1933∼47년 영산 감원, 서무부장, 영산지부장
1949~ 61년 중앙총부 서무, 산업, 재무부장
1965년 1월 학교법인 원광학원 초대 이사장
1987년 4월 26일 열반

 

[2020. 9. 25. 마음공부17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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