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석 교무
허석 교무

[원불교신문=허석 교무] “까닭 있게 공부하라.” 예비교무 시절부터 많이 들어온 말이다. 여기에는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겠지만, 진리를 소중히 여기고 진리공부의 필요성을 절감하며 그 체득에 공들이라는 말씀이라 생각한다. 진리를 자주 묻고, 늘 궁굴리고, 내 마음과 생활에서부터 확인하고 터득하는 공부. 마음속에 대적공실(大積功室)을 두어 성리(性理)로 듣고, 성리로 말하고, 성리로 행동하는 생활. 이것이 진리적 종교를 신앙하는 신앙인의 모습이 아닐까. 

소태산 대종사는 과학문명이 발달하여 세상이 하나로 열려가고 인류의 지혜가 밝아지는 시대를 맞아 누구나 수긍할 수 있고 귀의할 수 있는 새로운 진리적 상징과 내용이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에 모든 종교가 하나의 진리에 근본하고, 전 생령이 하나의 기운으로 연계된 동포이며, 모든 사업이 더 좋은 세상을 개척하는데 있음을 상징하는 일원상의 진리를 천명했다.

정전은 진리를 세 가지 성격으로 설명한다. 하나는 ‘진공(眞空)’이다. 진리의 바탕은 텅 비어 있다는 것이다. 무명(無明)으로 말미암은 일체의 분별 망상을 일으키고 우주만유의 근본 이치가 하나임을 알지 못하게 하지만, 그 허상을 비워 드러나는 실상(實相)은 대소유무(大小有無)의 분별도, 생사(生死)의 거래도, 선악(善惡)의 차별도 없다.

그렇지만 이 텅 빈 자리는 허무한 공이 아니다. 무한한 빛과 은혜와 조화가 가득하다. 그래서 진(眞)을 붙여 진공이라 한다. 텅 비어서 적적(寂寂)한 가운데 밝은 ‘광명(光明)’이 있다. 이 빛은 신령스러운 앎을 만들어 내기 때문에, 진리는 단순한 이법(理法)이 아니라 마음(心)이다. 이 공적하되 신령스럽게 아는 마음을 깨닫고 사용하는 것이 수행의 핵심이다. 이 밝음으로 인하여 일체의 분별과 차별의 세계가 전개된다.

광명이 가득한 진리는 그대로 밝은 분별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만유를 통해 무한한 세월 동안 ‘조화(造化)’를 나툰다. 만약 진리가 그냥 밝게 분별하여 차별세계를 전개하기만 한다면 우리는 진리를 신앙할 이유가 없다. 진리가 우주만유를 통해 죄복(罪福)을 주고 우리들의 삶에서 매 순간 절대적인 영향력을 미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진리를 믿고 수행함으로써 그 위력을 입고 그 체성에 합하는 노력을 하는 것이다.

소태산은 수많은 경전을 가르치고 천만 가지 선(善)을 장려하는 것보다 급한 일이 ‘생멸 없는 진리와 인과보응의 진리를 믿고 깨닫게 하여 주는 것’(인과품 16)이라고 했다. 진리는 종교의 시작이자 끝이다. 원불교는 일원상의 진리를 깨닫는 종교다. 교단 3대를 마무리하고 4대를 열어가는 이 때, 나는 얼마나 까닭 있게 진리공부를 하고 있을까? 진리의 빛으로 나의 무명을 타파하고, 진리의 조화로 복된 삶을 열어가고 있을까? 함께 돌아볼 문제다.

[2020년 11월  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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