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윤리 문제에서 ‘공통감’ 또는 ‘공동체적 감각’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교단 구성원 간에 서로 소통하는 과정을 쌓아가는 것이 필요”

전상현 교무
전상현 교무

[원불교신문=전상현 교무] 생명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라 새로운 양상의 개인적·사회적 고통이 전개되고 있다. 그리고 사회적 선택에 따른 고통의 상충은 윤리적 딜레마를 야기하고 있다. 낙태, 존엄사, 뇌사, 장기이식, 생명복제, 의료자원의 배분, 인간과 기계의 공존, 더 나아가 동물과 환경 관련 윤리적 딜레마는 생명윤리 주제가 비단 윤리 분야에 국한된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사회적으로 개인 및 집단의 윤리관과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되는 문제들이기에 관점들과 이해관계를 사회적으로 조정해야 하는 정치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사회 구성원들의 가치관과 이해관계를 조정해 윤리지침과 법률제도를 준비해 놓지 않으면 인류사회가 물질개벽의 물결에 휩쓸려 갈 수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이렇듯 난해한 생명윤리의 딜레마를 제생의세를 지향하는 교단으로서 원불교는 어떻게 접근해야 할까? 
 

윤리적 판단: 규정적 vs 반성적
기존의 윤리체계는 현대 생명윤리의 딜레마를 다루는 데 한계가 있다고 여겨지고 있고, 현대 생명과학 역시 생명현상에 대한 이해와 윤리적 판단의 근거를 완벽하게 제시하고 있지는 못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먼저 우리의 무지에 대한 인정과 겸손함의 태도를 견지하는 것이 먼저가 아닐까 한다. 과학적 지식을 포함해 우리가 가지고 있는 개념적·경험적 분별지가 진리의 실상을 이해하고 전달하는 데 얼마나 한계가 있는 것인지 인류는 그 무지에 대해 먼저 인정해야 한다. 그러한 태도 위에 우리는 생명에 대한 과학적 이해를 넓혀 나감과 아울러 윤리적 판단을 요하는 상황들에 대해 나름의 답을 내놓기 위한 노력을 해 나가야 한다.

그 답을 찾아 나가기 위한 단초로 ‘판단’의 문제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 한다. 철학자 칸트는 그의 저서 판단력 비판에서 규정적 판단과 반성적 판단이라는 두 가지 종류의 판단을 소개한 바 있다. 일반적으로 윤리적 판단은 특수한 것을 보편적인 것으로 규정하는 규정적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즉, 개인의 구체적 행위가 이미 가지고 있는 윤리적 개념에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판단한다. 예를 들어, ‘자기의 것이 아닌 무엇을 몰래 훔치거나 빼앗는 짓’이라는 ‘도둑질’의 개념이 이미 있는 상태에서 가게에서 빵을 가져간 특수한 행위를 도둑질이라고 판단하는 것은 규정적 판단이다. 

반면, 반성적 판단은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고자 하는 판단이다. 어떤 그림을 보고 아름답다고 판단하는 미학적 판단은 아름다움의 추상적 개념을 미리 가지고 있지 않은 상태에서 특수한 그림을 통해 아름다움의 보편성을 찾아낸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반성적 판단이라 할 수 있다. 생명윤리적 판단 역시 보편적 윤리 개념이 선행하지 않은 상황에서 사회 구성원들의 공통감에 근거해 주어진 특수한 것에서 보편적인 것을 찾고자 한다는 점에서 ‘반성적 판단’에 가깝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반성적 판단의 근거로 칸트는 ‘공통감(common sense)’이라는 것을 들고 있다. 사회 구성원들이 가지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공통적인 감각에 바탕해 판단하는 것이 반성적 판단이라는 것이다. 생명윤리적 딜레마에 대한 반성적 판단은 사회적 합의와 소통, 그리고 정치적 과정이 필연적으로 개입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현상은 기존의 윤리개념으로 판단하기 어렵고 여러 가지 다른 관점과 이해관계가 얽혀 있기 때문이다. 이를 조율하기 위해서 사회 구성원들은 의견을 형성하고 소통하며 서로가 동의할 수 있는 ‘공통감’ 또는 ‘공동체적 감각’을 찾아가고 형성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연명의료중단과 낙태 문제
연명의료중단을 예로 들어 보자. 1997년 보라매 사건에서는 환자 가족의 동의하에 임종단계에 있던 환자의 인공호흡기를 제거한 의사의 행위가 살인으로 판단됐다. 의료에 의한 연명을 중단한 새로운 사회 현상에 대해 기존의 ‘살인’이라는 법률 개념을 적용한 것으로  반성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에 규정적 판단을 적용한 예라 해석할 수 있다. 2009년 김할머니 사건에서는 유사한 행위가 ‘무의미한 연명의료의 중단’으로서 살인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판단됐다. 우리사회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었던 ‘연명의료중단’이라는 새로운 보편적 개념을 도입한 판단이라는 점에서 반성적 판단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한 걸음 더 나아가 연명의료결정법의 제정 및 시행은 연명의료 중단이 반성적 판단에서 규정적 판단의  영역으로 이행해 가고 있는 것이라 생각된다. 아직도 다듬어 나가야 할 문제점에 대해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이나 사회적 합의과정을 통해 적어도 공통된 지반이 마련된 생명윤리 분야라 생각된다. 

반면, 최근 정부의 낙태법 개정안 입법예고로 부각된 낙태 문제는 여전히 우리의 반성적 판단이 필요한 영역이라 생각된다. 이번 정부의 낙태법 개정안은 형법의 개정과 모자보건법의 개정 두 가지를 담고 있다. 기존에는 형법을 통해 낙태를 원칙적으로 금지하되 모자보건법을 통해 낙태가 허용되는 한계를 정해왔다. 개정안은 낙태허용의 한계(임신 14주까지 낙태 허용, 임신 15~24주에는 특정 사유가 있을 때만 허용)를 형법에서 규정하고, 모자보건법에서는 낙태 과정에서 겪을 수 있는 여성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방안을 담았다. 현재 낙태법 개정안은 형법 개정안을 위주로 종교계와 여성단체 양측으로부터 비판받고 있다. 가톨릭을 비롯한 기독교계에서는 형법의 낙태금지의 원칙이 후퇴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여성계는 처벌이 거의 되지 않던 형법의 낙태죄가 전면 폐지되지 않고 부분 개정됨으로써 실질적으로는 낙태법이 강화된 것이라는 점을 비판한다. 짧은 기간 안에 합의점 도출은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헌법재판소의 결정에 의해 연말 안에 정부 개정안에 기반하여 법률이 개정될 것으로 전망된다.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법 헌법불합치 판결문은 법률이 옮고 그름의 문제 뿐만 아니라 법률 시행으로 인한 실질적인 사회 영향 역시 고려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낙태법이 사문화된 현실과 낙태법의 폐지 또는 완화가 역설적으로 낙태를 줄일 수 있다는 해외의 사례연구 등이 헌재의 판결에 참고되었으리라 추측된다. 이러한 헌재의 판결이 올해 법률 개정안으로까지 이어진 것은 낙태 문제 역시 존엄사 문제와 비슷하게 반성적 판단에서 규정적 판단의 영역으로 넘어가려는 시도라 보여진다. 그러나 ‘연명의료중단’이라는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윤리적 보편개념을 도출했던 존엄사 문제와는 달리, 낙태문제에 대한 첨예한 의견대립은 우리 사회가 이 문제에 대한 실마리가 될 윤리적 보편개념을 찾지 못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낙태법 개정 이후에도 이 문제에 관한 반성적 사유와 사회적 논의는 지속되어야 할 것으로 전망된다. 


교단 차원의 연구기구 설치
반성적 판단이 필요한 생명윤리 문제에서 ‘공통감’ 또는 ‘공동체적 감각’을 찾아가기 위해서는 이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교단 구성원간에 서로 소통하는 과정을 쌓아가는 것이 필요하다. 원불교 생명윤리연구회가 조직되고 신문지상으로 이에 대한 주제를 논의하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라 생각된다. 그러나 한 걸음 더 나아가 교단 차원의 관심과 연구가 필요하다. 

원불교 교헌에 수위단회 결의사항으로 ‘교리의 최종해석’에 관한 사항이 명시되어 있으나, 생명윤리 주제에 대한 교법적 해석을 제시하는 데 있어 그 역할의 미흡함이 지적되어 왔다. 이를 충실히 이행하기 위해서는 수위단회를 보좌하여 생명윤리 주제에 대한 교단 구성원들의 의견 교환과 소통을 위해 구심점 역할을 할 수 있는 교단 차원의 생명윤리 연구기구의 설치가 필요하다. 교단 내적으로 생명윤리 주제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이루어져서 교법적 해석의 개요가 드러나고 정리될 때 교단 외적인 소통도 가능하리라 생각된다. 연구기구의 설치는 나아가 교역자 교육기관에서 생명윤리 주제에 대해 체계적인 교육을 하기 위한 토대가 될 것으로도 예상한다. 교단적 관심이 필요한 때이다.

전상현 교무
ㆍ미국 시라큐스대학교 교육공학 박사
ㆍ원불교 정책연구소 책임연구원
ㆍ원불교 생명윤리연구회 연구위원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