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전북 남원군 수지면 호곡리. 상산 박장식 종사의 고향이기도 한 죽산 박씨 집성촌에서 태어난 보타원 박명제 원로교무(82·寶陀圓 朴明濟). 이곳에서 배출된 전무출신만 40여 명이다. 어린시절부터 전무출신에 나선 친척 언니들을 보며, 한 가정의 부인이 되기보다는 많은 사람을 품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생각에 전무출신을 꿈꿔온 그의 삶을 들여다봤다.


일자출가 구족생천
전무출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박 원로교무에게 당시 수지교당에 있던 전기철 교무가 총부 구경을 가자고 해서 따라 나섰다. “19살 때 총부를 구경한다고 왔는데, 구타원 이공주 종사와 주타원 윤주현 부산진 교무님이 왔다고 인사를 하러 가자고 해서 갔어.” 그가 전무출신에 뜻이 있는 것을 알자 윤주현 교무는 자신을 따라 부산으로 가자고 했다.

박 원로교무는 그 길로 집으로 돌아와 아버지에게 출가의 뜻을 밝혔다. “아버지께서 깜짝 놀라시며 일도 안해본 네가 그렇게 고생스러운 일을 할 수 있겠냐, 결혼을 안하고 평생을 살아야 하는데 조금이라도 마음이 달라진다면 다시는 집에서 받지 않는다. 그래도 가겠느냐고 물었어. 일자출가 구족생천(ㅡ子出家 九族生天)이라는 말이 있는데 그렇게 훌륭한 사람이 되려면 가라고 해서 내가 그렇게 노력하겠다고 했어.” 박 원로교무는 아버지의 허락을 받고 이튿날 바로 남원에서 짐을 싸서 부산으로 가 5년간의 간사생활을 시작한다. 

처음 부산진 교당 법당에 들어갔을 때, 법신불 전 옆에 걸린 액자가 그의 눈길을 끌었다. “불여만법위려자시심마(不與萬法爲侶者是甚). 만법으로 더불어 짝하지 않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뜻이었는데 그 내용이 마음에 딱 들어왔어. 간사 근무를 하며 이 문구를 계속 연마했더니 상대심, 질투심에 대한 마음이 놓아진 것 같아.” 


교화에 재미를 느껴
그는 30대 초반 안천교당(현 주천교당)에서 청소년들과 함께한 행복했던 추억을 전했다. “교당 앞에 초등학교가 있었어. 토요일에 오르간을 치면 아이들이 하나둘씩 모여들었지. 교도 회장님이 주조장을 해서 밀가루를 한 포대씩 가져오면 금요일 오후에 술을 넣고 반죽을 했다가 토요일 오전에 쪄서 빵처럼 썰어놨어. 아이들이 법회 후 가져가며 그렇게들 좋아했어. 처음에는 20명 정도 되던 아이들이 나중에는 200명씩 법회를 봤어.” 그는 혼자서 어린이, 학생, 청년 일반법회를 보며 교화에 꽃을 피웠다. “학생들도 70~80명씩 나왔어. 안훈 교무가 그 당시 학생회장이었어. 성적이 좋은 모범생들이 교당에 나오니까 학생들이 많이 따라왔어. 청년회도 50명이 넘었어.” 그는 예비군 훈련에 초청받아 인성교육을 하기도 하고, 이웃 마을에 가서 출장법회를 보기도 하고 교화에 한창 재미를 느꼈다. “인사이동이 있어 떠나올 때 어린이들이 달려와 가지 말라고 울고 그랬어. 그 앞에서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는데 차 안에서 못내 눈물을 훔쳤지. 그곳을 잊지 못해.” 


어른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아
그가 동이리교당에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동이리교당은 동산선원(현 동산수도원 자리) 안에 60평 정도로 자리하고 있었다. 초대 교무가 교당을 짓고 15년간 빚을 갚느라 애를 쓰고 간 후였다. 1년 근무 후 정초에 신도안에 세배를 간 그에게 대산종사는 할 일이 있다고 했다. “올해는 아래에 땅을 마련해 교당을 지어야 한다는 거야. 그래야 동이리교당도 발전하고 동산선원도 안정이 된다고. 갑자기 돈도 없이 어떻게 해야하나 했지.”

대산종사는 동산선원에서 100평을 주라고 할 테니 거기에 집을 지으라고 했다. 교당에 돌아와 회의를 했는데 이사를 가자는 교도들이 한 사람도 없었다. 그는 교도들에게 “어른의 말씀은 땅에 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기도를 해 주세요. 빚이 남으면 제가 갚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그의 간곡한 설득에 교도들은 마음을 돌려 집을 짓는데 합력하기 시작했다. “신기하게도 집을 짓기 시작하니 기도가 들어오고 초상이 사방에서 났어. 독경을 안 한 날이 없이 매일같이 재를 지냈어.” 새로 지은 교당에서는 교화가 더욱 번창해 교도 수도 많이 늘고 전무출신도 배출되기 시작했다. 

3년간 동이리교당에서 근무하며 교당을 새로 짓고 현금 빚을 다 갚고 나자 그에게는 새로운 임무가 주어졌다. 교도 3인이 금오동에 교당을 내기를 발원하고 방 2칸을 전세로 빌려 장충교당을 시작하려 하는데 박 원로교무가 주임교무로 오기를 간청한 것이다. 6세대가 함께 살아 화장실 사용도 자유롭지 못한 환경이었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도 교당을 조금씩 확장해 옮기며 6년 근무를 마치고 나올 때는 번듯한 집을 마련해 놓고 떠나왔다. 또 그곳에서 교화한 어린이, 학생 교도들이 지금은 교당의 회장, 부회장을 맡아 알뜰한 교도들이 됐다.


항단 체제로 교화단 교화
남중교당에 항단 체제를 만들어 조직교화의 기틀을 세운 이가 바로 박 원로교무이다. 그가 남중교당에 부임했을 때 200명 넘는 교도들이 법회에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는 교화단 훈련을 시켜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부회장을 여자 4명, 남자 4명으로 해서 8명이 5단씩을 관리하게 했어. 5단씩 관리해서 회장한테 보고하면, 회장이 나에게 보고하는 항단 체제로 교화단을 시작했지. 월요일이 되면 교도들의 소식이 다 나에게 들어와 교도들 세정을 파악할 수 있었어. 그리고 교무 4명이 단회에 나눠서 들어가며 지도를 했지. 또 1년에 4번 단장·중앙을 집중적으로 훈련시켰더니 교도가 400명 넘게 불기 시작했어. 재가교역자라는 말이 그때 나왔어. 그렇게 4년 정도 하니까 조직 교화가 제대로 안착이 됐어.” 그는 또 남중교당에서 입교운동을 전개해 6년동안 2500여 명을 입교시키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핵폐기장 유치 반대에 앞장서
그가 영광교구장으로 재임 시 핵폐기장 유치 문제가 불거졌다. “성지가 있는 곳에 핵폐기장이 있을 순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그 당시만 해도 핵에 대한 인식이 부족할 때라 일부 교도들은 핵폐기장이 들어오면 부자가 된다는데 왜 그러냐고 말하기도 했다.

박 원로교무는 핵에 대해 연구해 핵폐기장이 성지에 들어오면 안 되는 이유를 설명하며 교도들을 설득했다. “장날 직접 나가 입구에서 핵폐기장 유치 반대 서명을 받기 시작했어. 영광군청 앞에 천막을 치고 100일간 릴레이 단식도 진행하고 영광에서 홍농까지 삼보일배를 하는 등 총력을 기울였지. 전국 교도들이 영광으로 집결해 대집회를 하는 등 일심합력으로 노력한 결과 핵폐기장이 성지를 벗어나게 됐어.” 

그의 퇴임 전 마지막 근무지는 종로교당이었다. “당시 종법사였던 좌산상사님을 모시고 50주년 행사를 했는데 1000명 이상이 참석해서 성황리에 50주년 행사를 마쳤어. 50주년 행사로 교당 전체 리모델링도 했지.” 그는 또 원화단, 활불단 법회를 통해 젊은층 교도들을 교당의 주인으로 성장시켰다.


더욱 철저한 공부와 생활
많은 사람을 품는 어머니가 되고 싶다는 그의 바람은 그가 걸어온 삶의 자취 곳곳에서 그 결실을 맺고 있었다. 퇴임 후 그는 더욱 수양에 힘쓰고 있다. 

“현장에서 바쁠 때도 한 달에 5일이라도 집중적으로 선을 하는 기간을 가졌어. 그래야 힘을 얻겠더라고. 퇴임 후에도 뜻이 있는 도반들과 한 번씩 시간을 내서 새벽·오전·오후·저녁 2시간씩 선을 하고 틈틈이 교전을 읽는데 너무 재미있고 힘이 나는 시간이야.” 

다음 생에는 건강한 몸으로 더 일찍 전무출신을 해서 더욱 철저한 공부와 생활을 해야겠다고 다짐하는 그가 후진들에게 전하는 메시지. “초발심을 잊지 말아야 해. 성불제중 하겠다는 그 서원을 늘 생각하며 일과 속에서 득력하되 그일 그일에 온전·생각·취사를 하며 일심을 모으고 단전을 여의지 않는 생활을 하면 좋겠어.”

[2020년 11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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