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5년 11월 7일 중앙교의회에서 교정원은 벌곡 부지 개발을 위해 (재)무궁화공원랜드 봉안당(무궁화추모공원) 설립을 보고했다.
원기105년 11월 7일 중앙교의회에서 교정원은 벌곡 부지 개발을 위해 (재)무궁화공원랜드 봉안당(무궁화추모공원) 설립을 보고했다.

[원불교신문=김세진 기자] 교단의 숙원 사업 가운데 하나인 삼동원 개발 사업이 무궁화공원랜드 봉안당 설립으로 역사적인 물꼬를 트고 있다. 선대 종법사의 유지를 받든 불사로서 현실적으론 총부 유지대책까지 목적한 무궁화추모공원 사업의 시작과 전망을 살펴본다.


신도안과 삼동원
원기21년(1936)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이공주, 전음광 외 9인의 제자를 데리고 계룡산을 다녀가며 장차 이곳에 수도도량을 만들도록 제자들에게 당부했다. 이후 정산종사는 원기43년(1958) 성정철, 조갑종을 보내어 신도안 일대를 답사하게 했다. 이듬해 원기44년 ‘불종불박’이라 새겨진 큰 바위 옆에 초가집 한 채를 매입하고 2km 떨어진 곳에 있던 남선교당을 이곳으로 옮기면서 신도교당이 설립됐고 심익순 교무가 근무했다. ‘불종불박’이란 글씨는 이성계의 왕사인 무학대사가 썼다고 구전되는데 ‘불교가 종교의 중심이 되고 불교의 중심인물은 박씨’라고 해석되고 있다. 계룡산 신도안 일대는 예로부터 풍수지리 도참설에서 십승지지(十勝之地)의 하나로 손꼽혔으며 조선왕조의 태조 이성계가 이곳에 새도읍(新都)을 정해 공사를 시작했다가 중단한 일도 있었다. 

정산종사는 열반을 앞두고 위중한 상황에서도 대산종사에게 “계룡산 신도안 일이 급하니 어서 들어가라”라고 당부했다. 이에 원기46년(1961)부터 대산종사가 직접 신도안에 들어간다. 종법사가 된 대산종사는 신도안개발사업을 제1우선사업으로 삼고 이곳에 원기52년(1967) 삼동수양원을 설립한다. 삼동수양원은 소태산 대종사의 일원대도에 바탕해 정산종사가 제창한 동원도리·동기연계·동척사업의 삼동윤리 사상을 실천함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표방했다. 삼동수양원은 원기59년(1974) 삼동원으로 이름을 바꾸고 대산종사가 주석하며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하지만 원기68년(1983)에 군사기지 건설을 위한 정책(6.20사업 삼군본부 이전)에 따라 원기69년(1984) 벌곡면 양산리로 옮겨 새롭게 출발하게 된다. “계룡산 주위 50리 안에 터를 잡으라”는 대산종사 말씀 따라 63번째 탐방 끝에 현 광산김씨 종산을 매입하고 6년간 임시 건물에서 생활했다. 이후 원기75년(1990) 천호산 계곡에 건축면적 3,676㎡의 훈련시설을 갖추고 신축 봉불식과 만일기도 회향 대법회를 거행했다. 현재까지 삼동원은 교단의 사회적 훈련 중심 도량으로 역할을 다하고 있다.


삼동원·외총부 관련 대산종사 법문
“이곳 삼동원은 지금 세상이 숨통 막혔으니 인류의 숨통이 되는 곳으로 만들려고 한다. 정산종사님께서 무조건 가라 하시며 ‘참 좋은 곳이다. 앞으로 우리 회상에 없어서는 안 될 대지이다. 길룡에서 뿌리내리고 신룡에서 꽃이 피며 계룡에서 열매 맺고 금강에서 결복한다(托根於吉龍 開花於新龍 結實於鷄龍 結福於金剛)’는 법문을 해주셨다.” (원기60년 9월 12일)

“한국의 서울은 대전이 된다. 대전은 한밭이다. 앞으로 한국의 중심이 되고 서울이 된다. 대전이 중앙이 되고 우리 교단의 중앙이 된다.” (원기62년 2월 22일)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께서 대전이 중심이 된다고 하셨다. 한국이 세계의 중심이고 또 한국의 중심이 대전이다. 이리 총부는 내총부, 대전은 외총부로 하여 교단을 운영하도록 하자. 대전 기지는 외총부로써 규모를 갖추는 동시에 대 훈련에 중점하도록 하고 삼동원에는 국제대회 등을 개최하고 국제관계를 굴리게 하는 기구와 시설을 하도록 하라.” (원기68년 8월 22일)

“이곳은 대종사님의 성적이 깃든 곳이요, 또한 정산종사님께서 간절하게 최후에 유촉하신 이 땅이며 또 그동안 오랫동안 자연요양, 자연훈련, 자연함양의 도량으로 수도지, 훈련지, 요양지로써 여러 종교인과 많은 사람이 크게 활동하였고, 앞으로도 만대를 두고 종족, 종교, 사상을 떠나 더욱 크게 활용되어야 할 땅이기 때문에 누가 살려고 하여 금을 산같이 쌓아 준다 해도 팔 수 없는 것이다. 그러니 어느 때든지 국가에서 안보 문제가 해결되어 민간으로 이양하게 될 때는 반드시 우리가 다시 이곳을 환원받을 수 있도록 국가의 배려가 있길 다 같이 염원하고 기원해야 하겠다.” (원기68년 12월 18일)


스승님의 경륜을 받들어
소태산 대종사는 신도안 삼동원을 수양의 터로 말씀했다. 정산종사는 스승의 말씀이 땅에 떨어지지 않도록 초석을 다졌다. 대산종사는 두 스승의 유촉을 받들어 영육쌍전과 이사병행의 교법을 삼동원 생활에서 직접 실천했다. 이후 삼동원은 동산 이병은 초대원장을 거쳐 예타원 전이창 2대 원장, 신산 김혜봉 3대 원장이 스승에 대한 신성과 교단에 대한 공심으로 삼동원 개발에 앞장섰다. 

이러한 정신을 바탕으로 교단은 삼동원 부지에 대해 여러 각도로 활용방안을 모색했다. 또, 총부 유지기반 마련을 위해 마스터플랜을 준비했다. 한때 체육시설 설립을 위한 법인을 만들려고 노력도 했지만 무산됐고, 수차례 시도 끝에 원기93년(2008) 계획관리지역으로 관리하기 위해 종교적 사업인 장묘사업을 구상했다. 지역의 법인이라야 지방자치단체의 허가를 받을 수 있으므로 자체 법인(무궁화공원랜드)을 설립해 삼동원과 재정산업부는 함께 사업을 진행해 나갔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혐오시설로 인식한 지역 주민들의 엄청난 반대 속에 수년간의 세월을 주민들의 마음을 돌리는데 온갖 정성을 다했다. 

결국 원기98년(2013) 지역 주민들과 논산시와 원만한 합의를 거쳐 원기99년(2014) 봉안당 개발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다만 교단100주년 기념사업인 소태산기념관에 주력해야 할 시기라 연장을 거듭하다 원기104년(2019) 전산종법사와 교단 원로들 임석하에 봉안당 신축 기공식을 가졌다. 

김혜봉 원장은 “전 직원이 고생했지만 특히 당시 양원석 교무(현 강원교구장)의 노고는 이루 말할 수 없었다”라며 “주민들의 반대를 온몸으로 받아내고 그들의 마음이 풀어지고 이해하여 합의하도록까지 온갖 정성을 다했다. 솥을 9번 다시 걸어 신성을 인정받은 구정선사처럼 8번의 건축장소 변경 속에서도 오직 한 마음으로 임했다”라고 천신만고를 겪으며 이겨낸 과정을 전했다.


연말 분양 시작 예정
무궁화추모공원은 대지면적 9,890㎡, 건축면적 1,619㎡, 연면적 3,757㎡에 지하1층~지상3층 규모다. 총사업비 92억 원이 소요됐으며 시공은 (주)제일건설이 했다. 건축시설은 2개 동으로 관리동은 제례실 4곳, 사무실, 상담실, 휴게실이 조성됐으며 봉안당은 특실단, 가족실단, VIP실, 임대단으로 조성됐다. 정용선 재정산업부 담당교무는 “총부의 유지기반 확립과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과업”이라며 “어려운 경제상황에 유족들의 부담을 덜어줄 저렴한 임대단을 운영할 계획이며 연말에 분양을 시작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무궁화추모공원의 봉불식은 내년에 거행할 계획이다.


한량없고 변치 않음을 뜻함
정산종사는 “무궁화는 그 이름이 좋으니, 무궁은 한량없고 변치 않음을 뜻함이라 이 나라가 새 세상 대 도덕의 근원이 될 것을 저 무궁화가 예시하고 있다”고 법문했다 (『정산종사법어』 국운편 33장.) 무궁화추모공원은 끝없이 피고 지기 때문에 끝이 없다는 뜻의 무궁(無窮)의 의미로 설립됐다. 영원한 진리를 상징하는 일원화(一圓花)와도 그 의미가 상통한다. 설립 과정을 보면 무궁화추모공원은 스승님 말씀을 땅에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지극한 신성과 이소성대의 눈물겨운 노력의 결과물임을 알 수 있다. 오래도록 준비된 계획이 차근차근 실천되어 스승님들의 외총부 경륜이 실현되기를 기대한다.

[2020년 11월 2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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