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1994년 개봉된 영화 ‘리틀 부다’에는 티벳 승려 노부가 환생한 스승 도제를 찾아 떠나는 장면이 전반부를 이룬다. 희귀한 일이지만 마침내 찾은 아이들 셋 전부가 스승의 분신들임을 확인한 노부는 좌복 위에 앉아 열반의 길을 떠난다. 한 승려가 매일 그의 경동맥이 뛰고 있는지를 점검한다. 어느 날 숨이 멈추고 사원에는 노부의 죽음을 알리는 북소리가 세상을 향해 울려 퍼진다. 코로나19로 인해 죽음이 일상화된 현실에서 늘 이 장면이 떠오른다. 

죽음은 불가해한 요소가 많다. ‘한때 존재하다 사라지는 나는 누구인가. 왜 나는 지구 위에 있는가.’ 어릴 때 누구든 가졌던 이 화두는 죽음에 임박해 다시 떠오른다. 그리고 마주쳐야 할 또 하나의 관문이 기다린다. 심신의 고통이다. 가족과 재산에 대한 착심, 미지의 죽음에 대한 상상, 그리고 단말마에서 비롯된다. 그 강도는 개인만이 안다. 때로 최후에 이른 환자의 고통을 완화시키기 위해 암묵적으로 의료장치를 제거하는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인간의 존엄을 고려해 고통을 완화시키는 약물 투입의 양은 문제되지 않는다. 


존엄사에 대한 법적 근거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고통에 대처하거나 죽음을 수용하는 능력이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높다는 연구결과도 나와 있다. 불타(佛陀)를 기점으로 불교는 수천 년간 죽음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를 연마하고 수행을 통해 체계적으로 확립해왔다. 소태산 대종사가 불법의 뛰어난 점 가운데 생사 문제의 해결을 든 것은 이를 말한다. 현대불교로서 원불교 또한 사회적 고통을 해결하는 불법의 생활화를 구현해야겠지만, 죽음을 앞둔 인간의 고통을 어떻게 해결하고 도와줄 것인지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즉, 존엄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의 문제다. 2016년에 존엄사법이라고 할 수 있는 ‘호스피스·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일명 웰다잉법)이 제정되어 실행되고 있다. 국가의료체계를 정비하고, 임종에 관한 품위 있는 결정으로 가족과 의료인의 심리적 고통을 경감시켜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필자도 초기에 이 법률을 만들기 위한 위원회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아쉬움은 있다. 종교계의 의견이 덜 반영되었다는 점이다.

아무튼 국내에서도 존엄사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일체개고의 명제가 대중화되어 죽음의 순간만큼은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주겠다는 사회적 결실을 얻은 셈이다. 이를 일반화하기 위해서는 이 법률을 잘 이해하고 보조를 맞추어 갈 필요가 있다. 특히 연명의료결정에 대한 방식은 첫째 환자의 분명한 의사표시가 있을 때, 둘째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을 때, 셋째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근거가 없을 때의 세 가지로 보고 있다. 첫 번째의 본인 외에 가족이나 의료인이 판단하는 조건들은 비록 악용될 소지가 있기는 하다. 따라서 ‘연명의료계획서’와 ‘사전의료의향서’를 사전에 작성해 두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적극적 안락사
죽음을 배우는 시간을 쓴 김현아 교수는 의료현장의 경험을 토대로 중환자실 문제를 토로한다. 한 마디로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환경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을 연장시키기 위한 의료시설은 고통만 가중시키며, 중환자실에 들어가는 순간 본인이나 가족의 권한은 약화된다고 한다. 따라서 미리 죽음을 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한다. 제행무상을 피할 수 없는 인간으로서는 어떻게 죽어갈 것인가를 미리 판단, 결정해 놓아야 한다. 

이와 관련, 적극적 안락사에 대해서도 논의해볼 만하다. 존엄사는 인간다운 죽음을, 안락사는 일반적으로 견딜 수 없으며 극복할 수 없는 고통의 유무를 준거로 삼는다. 자의적 결단으로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은 넓은 의미에서는 안락사의 범주로 볼 수 있다. 국내에서는 본격 논의가 이뤄지지 않고 있지만, 네덜란드는 2000년 세계 최초로 불치병 환자의 안락사를 인정하는 법안을 제정했다. 이 법안에서는 무엇보다도 한계에 이른 환자의 고통, 환자와 의사와의 충분한 의사소통, 환자의 변함없는 확신 등이 기본적 전제다. 한발 앞서 스위스 조력자살 비영리단체 디그니타스가 ‘존엄하게 살고 존엄하게 죽기 위해서’라는 모토를 내걸고 1998년 문을 열었다. 스위스는 일찍부터 안락사와 이를 돕는 조력행위를 허용했다. 이에 대한 논쟁이 지속됐지만, 2006년에 연방대법원에서 공식적으로 안락사를 허용했다. 

네덜란드는 중세 때부터 사상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국가였다. 스위스 또한 주위에 강대국들과 연하고 있어 독립성이 강하면서도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나라다. 이들 나라는 합리적 개인주의가 발달되어 있다. 죽음을 터부시하는 전통이 여전히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죽음의 다양성을 충분히 논의할만한 분위기는 아니다. 그러나 기층문화를 형성해온 불교 덕분에 죽음을 삶의 한 부분으로 받아들이는 문화가 내재해 있다. 이러한 전통 속에 있는 원불교인들에게 죽음은 매우 친숙하다. 


생사해탈: 수행은 죽음의 극복 과정
불법을 계승한 원불교는 소태산 대종사가 대종경 천도품에서 설하듯이 죽음을 수용하는 자세를 확립하고 있다. 정전 법위등급에서 초성위인 법강항마위는 “생로병사에 해탈을 얻은 사람의 위”이다. 해탈은 불타는 번뇌로부터 해방되어 미혹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로운 경지를 말한다. 깨달음의 경지인 원적(圓寂), 적멸, 멸도로 번역된 열반과 같은 뜻이다. 양자는 생사의 미혹을 뛰어넘어 적정열반의 세계에 이르러 윤회를 벗어난 것이다. 대승불교에서 해탈은 중생의 구제와 함께 하는 것에까지 나아간다.

법강항마위는 생사일여의 경지이므로 내적 존엄사 문제는 해결됐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불타 당시에도 마찬가지였다. 해탈은 자신 수행을 마친 아라한의 기본 경지이다. 불타도 사문유관 중 죽은 자의 모습을 보고 출가를 결심했다고 하는 것처럼, 수행은 일차적으로 죽음의 극복 과정이다. 열반에 든 어느 출가위 선진은 내게 “죽음을 두려워하는 마음은 없는데 육체를 떠나 스스로 영혼을 날리는 힘은 얻지 못했다”고 말했다. 아마도 승려 노부처럼, 예전에 선사들이 좌탈입망했듯이 죽음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다. 좌탈입망은 선사의 최고 경지이자 사후 화장 후 사리의 수가 수행의 높이를 결정했다. 그러나 현대에는 불교든 원불교든 좌탈입망이나 사리는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다. 

어떻게 보면 좌탈입망은 자살로도 볼 수 있다. 그것은 불타 당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아함경』에는 밧카리, 고디카, 찬나 비구가 중병의 육체적 고통으로 자살을 했다고 한다. 또한 불타가 부정관(不淨觀)을 설한 후 집단 자살하는 사건도 있었다. 물론 율장에는 자살은 물론 이를 선동하거나 고무하는 일은 엄격하게 금하고 있다. 자신이나 타인이나 목숨을 끊는 것은 불상생계를 범하기 때문이다. 불타는 일시적 해탈에 머물던 고디카가 마침내 완전한 깨달음을 얻고 자살한 것에 대해 “고디카는 영웅과 같이 갈애를 끊고 열반에 들었다”(상응부경전)고 설했다. 학계에서는 아라한의 자살에 대한 불타의 승인을 두고 견해가 분분하다.

필자는 불교윤리학자 데미언 키온의 주장대로 면죄라고 본다. 윤회에 들지 않을 정도의 수행능력을 갖추었기 때문에 전생의 업을 끊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렇다고 불타가 수행자들의 자살을 용인한 것은 아니다. 존엄사가 인간의 극한적인 고통에 대한 사회적·공적 자비라고 한다면, 불타 또한 그러한 육체적 고통을 자비의 마음으로 본 것이다. 삶을 고통으로 본 불타의 입장에서 제자의 죽음을 사후에 알고 그 고통을 충분히 이해했으며, 더불어 수행의 경지도 인정했던 것이다. 


무시선, 평소 생사 연마 필요
불교나 원불교의 경전에서는 존엄사 혹은 안락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지 않다. 불타 당시에는 비교적 죽음의 자기결정과 관련된 기록이 있기 때문에 돌이켜본 것이다. 이를 기반으로 원불교는 불법의 실천적 차원에서 평소 생사에 대한 연마를 통해, 죽음을 주체적이며 능동적으로 맞이할 필요가 있다. 무시선의 생활이 바로 그것이다. 최선을 다해 삶을 완전 연소시켜야 한다. 필요한 유언은 남겨도 좋겠지만 평소의 언행과 글이 유언장이 되어야 한다. 법신불과 대중 앞에서 부끄러움 없는 일상의 삶으로 언제 죽어도 여한이 없어야 한다. 죽음에 임박해서는 ‘이 생은 최고의 여행이었다. 다음 생은 어떤 멋진 여행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라고 할 수 있으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죽음을 스스로 책임지고 감당하며 수용하는 무념, 무착의 대자유의 법력을 갖춘다면, 존엄사의 조건은 확립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나머지는 절차에 불과할 것이다. 

/원광대학교 원불교 생명윤리연구회 위원

[2020년 12월 1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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