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타원 장경진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대구, 부산, 신촌, 태백, 수원, 뉴욕, 화곡, 경남 마산 등지에서 교구청 설립 등 다양한 불사를 이뤄온 각타원 장경진 원로교무(84·覺陀圓 張敬眞). 그의 삶의 기록 속으로 들어가 본다.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길
그가 원불교와 인연이 된 건 친구를 따라 교당에 갔던 오빠 장장렬이 출가를 서원하고 원광대학교 교학과에 다니면서였다. 장 원로교무가 전주여고 1학년 시절, 소개를 받아 전주교당에 방문했다가 융타원 김영신 법사의 불공에 대한 법문을 듣고 마음에 큰 감화를 받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청년회 활동을 열심히 하던 그에게 박제권·양혜경·이영화 교무가 전무출신을 적극 권장했다. 아버지가 허락할 리 없기에 그는 짐을 싸서 편지 한 장 남긴 채 집을 나와 전주여고 동창이었던 박정묵과 함께 양혜경 교무를 따라 총부로 향했다. “하늘을 훨훨 날 수 있는 길을 선택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너무 경쾌하고 기뻤어. ”그를 찾으러 총부에 온 어머니 김자중, 동생 장경조도 감화를 받아 큰 후원자들이 됐다.
 

연꽃으로 피어나
그는 원광사 사무실에서 1년간 간사 근무 후 원광대학교에서 김이현·전팔근 사감 선생의 지도 아래 학업을 마치고 졸업과 함께 관례식을 올렸다. “나를 처음 인도했던 시인이 된 오빠에게 편지를 올렸더니 얼마 후 『사상계』란 책을 보내줬는데 그 안에 ‘무제’란 제목으로 나의 출가를 축하하는 시가 담겨있었어.”

시집 안 간 채 여윈 내 누이동생/ 흙탕물로 온몸을 목욕하고 솟아/ 올해 들어 연꽃으로 피어서/ 훤한 가을하늘을 숨 쉬네// 한 백년 살았으면 좋을/치렁한 머리채 틀어 올리고/ 시집 안 간 허물로 오늘도/ 바람처럼 스산히 나들이를 하고/ 석가님 무릎 위에 살대어 입정하네// 그 텅빈 가슴안에/ 이승의 슬픈가락 울리어 주면/ 불현듯이 작은 연꽃으로 피어서/ 마음 가는 이의 귓전을 바수어 주고/ 뜻 맞는 이의 눈 속에 무지개를 띄워서/ 시집 안 간 보람을 거두는/ 단주(短珠)로나 삼았으면// 구역질 많은 내 속도 맑아질 것을/ 바라긴 바란다 마는/ 어허 석가님, 어질고 슬픈마음/ 내 누이동생 귀히 여겨/ 그 무릎 위에 살대고 열반케 해 주//

그의 오빠는 아버지의 반대로 끝내 출가의 길을 가지 못했다. 그런 애틋함과 축하의 마음이 담겨있기에 장 원로교무는 오빠의 시를 매우 의미깊고 소중히 여겼다.
 

대산종사와의 인연
졸업식 후 여자 동창들과 건강이 좋지 않던 대산종사에게 인사를 드리러 갔다. “얼마나 편찮으시면 수염이 덥수룩하고 신관은 회색빛이었어. 그런데 우릴 환영하는 성안에서 너무도 맑고 빛나는 안광에 압도됐지. 그런 눈빛은 처음이었어.” 장 원로교무는 주체할 수 없는 눈물이 이유 없이 쏟아져 내려 한마디 말도 못 하고 물러서 나왔다. 대산종사는 “경진이가 왜 그리 울었는지 아느냐? 다 전생 인연이니라”라고 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장 원로교무는 전생에 무슨 인연이었길래 그리도 마음이 아프고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을까 화두가 됐다. “어떤 말씀도 다 받들어 드리자고 애쓴 것이 한평생 나의 교화가 됐어. 영생을 통해서 받들어 모시며 그 화두를 풀어나갈 것이야.” 
 

항타원 이경순 종사를 모시고
그의 첫 부임지는 대구교당이었다. 대구교당에서 6년, 부산교당에서 8년 그는 항타원 이경순 종사를 14년간 모시고 살았다. 부교무 시절 그의 별명은 연원새였다. 법회 때마다 연원달기 상황을 보고하는데 1년에 530명을 입교시킨 적도 있었다. 항타원 종사는 “자네가 오고 나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네, 부교무 인연이 다 있다네”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항타원 종사는 부산교구청 마련을 위해 천일기도를 결제하고 노력을 기울이던 중 열반에 든다.  항타원 종사의 49재가 끝난 후 이동서를 쓴 장 원로교무는 신도안 종법실에 다녀가라는 연락을 받는다. 대산종사는 그에게 집만 짓는다 생각말고 항타원 스승님의 기념관을 짓는다고 생각하고 부산교구청을 완공할 것을 권했다.  

항산 김인철 종사가 새로 부산에 부임해 그와 함께 교구청 불사에 힘쓰게 됐다. 교구청을 지으며 엘리베이터가 문제가 됐다. 건축비도 넉넉지 못한데 무슨 엘리베이터냐며 요인회에서 반대를 했지만 장 원로교무는 “이 건물은 법당이 5층에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10년, 20년이 지나 나이가 들면 5층까지 오르내리기가 불편할 때가 되니, 제가 동냥이라도 해서 하겠습니다”라며 강한 의지를 보였다. 그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40년여 전에 설치된 엘리베이터로 많은 이들이 교구청을 편하게 사용할 수 있었다. 부산교구청이 완공될 때까지 2천800여 일 동안 기도가 끊이지 않았다. “그때 함께했던 신명교, 김성효 교무들이 수고가 많았어.” 교도들의 건축성금이 모이고 평떼기 운동 등으로 총부에 ‘항원재단’ 성금을 기탁하면서 원기66년 4월 8일 부산교구청 봉불식을 성대히 치를 수 있었다.
 

신촌교당에서
부산교구청 불사를 마치고 그는 신촌교당으로 부임하게 된다. “교구청 건축을 맡았던 최준명 교도가 신촌교당의 교도 회장이라 각별한 후원과 호위를 받았어. 지금까지도 감사해.” 신촌교당에 가서 첫 법회를 보는데 여자 교도는 많은데 남자교도가 많지 않았다. 그는 남자교도를 불리기 위해 부부 법회를 개설하고 열심히 전화를 돌리며 불공에 공을 들였다. 다섯 번째 전화를 받으며 생각이 바뀌었다며 서울여고 이영택 교장이 마음을 내서 교당에 출석하며, 서서히 남자교도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유명한 서예가 난곡 김응섭(법명 동원) 선생이 그가 신촌에 있을 때 입교를 한 것도 큰 보람이었다.

어느 날 김이현 교화부장이 신촌에 와서 원주에 교당을 내면 좋겠다고 요청했다. 그는 원주뿐만 아니라 신촌교도들과 힘을 합해 강원도에 4개(원주·동해·간성·태백교당), 정부종합청사가 있는 과천에 과천교당(최준명 교도 희사)까지 5개의 연원교당을 설립했다.
그가 ‘대종사 탄생 100주년 성업’을 위한 천일기도를 올리던 중에는 방송에 출현하기도 했다. “극구 사양했는데 바로 KBS 촬영기사와 PD가 교당으로 들이닥쳤어. 마지막에는 방송국에 가서 이계진 아나운서와 ‘천일기도의 끝에 서서’를 주제로 대담을 했어. 사람이 살다 보면 뜻밖의 일들이 생기기에 평소 인격을 갖추고 실력을 양성해야 함을 실감했지.”

또 원남교당 송경심 교도의 요청에 의해 7선 국회의원이었던 남편 정도진 중앙교의회의장을 설득해 아시아종교인평화회의(ACRP)에 참석한 종교지도자 500명에게 신라호텔에서 점심공양을 할 수 있도록 주선했다. 당시 서울교구 합창단 지도 교무였던 장 원로교무는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50여 명의 합창단원을 인솔해 아시아 종교 지도자들에게 합창을 선보여 한국의 위상과 원불교의 위상을 높였다. 
이 밖에도 주변에 있는 이화여대, 연세대학교 교우회를 설립하고 방을 마련해 봉불식을 올려 미래 인재양성의 기반을 마련했다.
 

경남교구청 불사
그가 경남교구장으로 취임했을 때 그에게는 또 경남교구청과 마산교당 불사의 책임이 떨어졌다. 장 원로교무는 부임지마다 그 지역의 상황을 파악하고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교도들의 마음을 모았다. 천일기도를 결제하고 원불교신문에 광고도 냈다. 기도비가 여기저기서 모이고, 집 짓는 동안 법회를 보고 기거할 장소가 마련되는 등 수월하게 여러 일이 진행돼 갔다. 

태풍 ‘매미’가 마산을 강타했을 때는 교구에서 돕기 운동을 벌여 모아진 쌀과 현금을 마산시에 기증했다. 태풍 피해가 커 시민들의 항의가 거셀 때 원불교에서는 오히려 시에 후원을 해 줌에 황철곤 시장은 매우 감사해했다. 그 후로 시에서는 원불교 일에 적극 합력을 해줬다. 

그는 퇴임 직전인 원기91년 12월 6일 경남교구청과 마산교당 봉불식을 올리고 교당 옆 5개의 땅 매입과 보은의 집 요양 시설까지 이뤄냈다. “난 참 복이 많다고 생각해. 40년 동안 안 팔리던 동창원교당 땅이 팔렸어. 여의도 윤인식·서성로 박세원 교도, 특히 김창규 신창원교당 회장(현재 중앙교의회 의장)의 멸사봉공의 특별희사, 김해교당 강민복 교도, 정명덕 마산교당 회장님, 경상대 총장이었던 서범주 회장님께 특별히 감사를 전하고 싶어.”

그는 후진들에게 “체력은 법력이다”라고 당부한다. 정신과 육신의 건강관리만 잘 되면 다 이뤄진다고.

[2021년 1월 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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