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이하 ‘미주선대’)가 개교한지 19년이 됐다. 몇백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미국의 유수한 대학과 비교해보면 이제 막 걸음마 단계를 시작한 단계라 할 수 있지만, 사람에 비유하면 이제 성년이 됐다. 성년이 된 올해 원기106년, 미주선대가 어떻게 시작되고 발전해 왔는지, 출범부터 오늘이 있기까지 한국과 미국에서 큰 역할을 한 인물 중심으로 조명해보고자 한다.
 

삼성홀은 홍도전 대호법이 희사했다.
삼성홀은 홍도전 대호법이 희사했다.

미주·세계교화 준비
소태산 대종사는 교단 초기부터 인재양성을 위한 교육 기관의 설립을 위해 노력했다. 일제강점기의 어려운 시기에도 유일학림을 인가받기 위해 노력했고, 그 결실은 정산종사 대에 이르러 맺게 됐다. 유일학림을 전신으로 지금의 원광대학교와, 원광중·고등학교가 설립됐고, 이어 대산종사는 세계 곳곳에 선학 대학을 세워 마음공부와 선의 수련을 통해 세계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염원했다. 대산종사는 원불교 100주년을 계획했고, 사오백년 결복 교단을 위한 기초로 미주교화와 세계교화를 준비하도록 지도했다. 종교연합 창설, 공동시장 개척, 심전계발 훈련을 요지로 하는 세계 평화 삼대 제언을 제창하면서 인류의 평화를 기원했다. 특히 전 세계인의 마음 훈련과 선 수련에 바탕한 종교 간의 화합을 위해 영산에 선학대학(중앙)을 두고, 세계 곳곳에 선학대학을 세워 세계 평화가 이루어질 것을 염원하며 미주선대 설립에 직접적인 지침을 내렸다.


미주선대의 세 가지 목표
미주선대는 소태산 대종사의 제생의세의 경륜을 받아 다음의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첫째,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에서 교화할 수 있는 전문 원불교 교역자를 양성한다. 원불교는 한국만의 종교가 아니라 세계적인 종교로 발전하기 위해서 발돋움하고 있다. 이를 위해 세계 보편적 시각에서 교법을 해석하는 능력과 차별 없이 세계인을 교화할 수 있는 마음의 실력, 더불어 언어 실력을 갖춘 교역자가 절실히 필요하다. 미주선대는 다양한 학제 간 접근법을 통해 세계 보편종교로서의 원불교의 기반을 마련함과 동시에, 현지의 문화와 언어를 이해하고, 현지인과 자유롭게 소통하면서 교화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는 데 힘을 다하고 있다.

둘째, 영어권 교역자를 발굴하고 양성한다. 이 부분은 현재에도 미주선대의 고민과 숙제이다. 지난 19년 동안 몇몇 미국인 교도들이 교역자가 되기를 희망하고 공부했으나, 결과적으로는 당시의 남녀 차별적 출가제도와 출가 후 경제적 지원의 취약함 등을 이유로 교화 현장에 뿌리내리지 못하고 떠났다. 미주선대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미국총부와 함께 심도있게 연구해 원불교가 완전히 현지화할 수 있는 새로운 시스템을 연구하고, 영어권 교역자를 양성하는데 힘을 다하고자 한다.

셋째, 침구학과에서는 영육쌍전의 동서양 일원의학으로 인류의 건강과 생명을 돌볼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한다. 앞으로 선대에서 몸, 마음, 정신을 하나로 아우르는 통합적인 접근방법으로 인류의 다양한 병을 치유하면서 몸과 마음의 건강을 다스리도록 하는 수많은 인재가 양성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고문국 초대총장.
고문국 초대총장.

“이제 총장 되어야지”
미주선대가 공식적으로 출범한 2002년 전, 몇 가지 일화를 소개하고자 한다. 하나는 미주선대 초대 총장을 역임한 고문국 종사에 관한 이야기다. 1982년, 서울대학교 부총장으로의 임명을 받고, 고문국 종사는 당시 대산종법사를 찾아갔다. 서울대 부총장이 되었다고 이야기하니, 대산종사는 “이제 총장 되어야지”하며 엄지손을 높이 들어 올렸다고 한다. 20년 후 미주선학대학원 총장으로 취임하면서 그는 “대산종사는 서울대가 아닌 장차 미국에 설립할 교립 학교의 총장을 미리 말씀하셨던가”라고 회고했다.

두 번째 일화는 오원선 박사에 관한 이야기다. 1983년,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 대산종사에게 인사드린 그에게 대산종사는 “박사 마치고 미주선대에서 가르치면서 학교운영도 맡으라”고 부촉했다고 한다. 30여 년이 지난 최근 몇 년 전부터 미주선대 재무분과 위원으로 학교운영을 돕고 있는 오원선 박사는 대산종사의 예견을 실감한다고 했다. 

미주선대의 출범에 막중한 역할을 맡았던 종법실·시무실 제자들에 대한 일화도 있다. 미주선대 개교 10년 전인 1992년 여름, 대산종사는 미국에서 한국을 방문한 셋째 딸 김복혜 대호법에게 당시 종법실의 시자들을 미국에 초청해서 함께 미주선대를 설립하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당시 대산종사를 모셨던 김관현, 이성국, 오희선, 이용정, 송대성 교무들은 미주선대의 출범에서 현재까지 정성을 다하고 있다.
 

원기87년(2002) 수업시간에 미주선대 1기생들이 한정원 종사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원기87년(2002) 수업시간에 미주선대 1기생들이 한정원 종사와 함께 기념 촬영을 했다.

인고의 시간
미주선대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미주교화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미주교화는 원기57년(1972)부터 시작했다. 대산종사는 미주에 혈연이 있는 교무들에게 미주교화의 책임과 사명을 주며 미국교화의 문을 열도록 독려했다. 미국에 온 초창 교무들은 오직 혈심으로, 말 못하고 들리지 않는 인고의 시간을 묵묵히 지키면서 미주교화의 뿌리를 내렸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미주에 발령을 받은 교무들 중에 한국으로 돌아가는 사례가 늘어갔다. 준비되지 않은 채 미국에 발령받은 젊은 교무들 역시 불확실한 미래 속에 미주교화에 희망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교역자 양성 필요 공감
문제상황을 인지한 미주 동부교구 교무들은 미주 교화에 앞서 먼저 미국문화의 이해와 언어가 준비된 교역자 양성 필요에 공감했다. 원기83년(1998) 8월 미주동부교구 교무회의에서 정연석 교구장이 의장이 되어 산재하는 현실적 고민과 어려움 속에도 미주교화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토의를 거쳐 미주 내 교역자를 교육·훈련하는 고등교육기관을 설립하자는 안건을 결의했다. 대산종사 열반하던 해 9월, 미주교무를 대표해 김복인 교무가 의결된 안건을 좌산종법사에게 보고했고, 그해 12월 수위단회에서 미주선대 설립안을 대산종사의 유업으로 책정해, 설립준비위원으로 동부교구장인 정연석 교무와 오선도 필라델피아교당 교무, 김복인 교무를 임명하고, 당시 김우중 대우회장의 헌공금 5억원을 미주선대 설립기금으로 지원했다.


개교 봉불식 거행
대산종사로부터 여러 차례 미주선대 설립의 법문을 당시 원불교영산대학 근무 중에 직접 받들었던 오선도 교무는 그 염원을 실현하고자 원기79년(1994)에 필라델피아교당 교무로 부임한 뒤, 미주선대 설립을 위한 천일기도를 결제했다. 대산종사의 염원과 미주교무들의 열망을 담아 간절하게 올린 기도는 어느새 천 일을 넘어 삼천 일에 이르렀다. 그리고 삼천일 기도회향일인 원기87년 9월에 1일, 미주 선대는 개교 봉불식을 갖고, 그 이튿날 9월 2일에 펜실바니아주 글렌사이드시에 위치한 삼성홀에서 원불교학, 선응용학의 두 개의 학과에 7명의 학생으로 개교했다.
 

김복인 총장 /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김복인 총장 / 미주선학대학원대학교

[2021년 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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