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덕성 장유교당 교도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전무출신, 마음은 회상에 드리고 몸은 공중에 바쳐서 세세생생에 이 법륜을 떠나지 아니하겠다고 서원한 사람이다. 대종사는 “그대들이 한 생 동안만 재·색·명리를 놓고 세상과 교단을 위하여 고결하고 오롯하게 활동하고 가더라도, 저 세속에서 한 가정을 위하여 몇 생을 살고 간 것에 비길 바가 아니다”라고 하셨다. 

이 말씀 그대로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자녀 둘을 회상의 일꾼으로 내 보낸 헌타원 김덕성(75·憲陀圓 金德聖·장유교당) 교도를 만났다. 봉도청소년수련원 서혜전, 칭따오교당 서혜진 교무가 그에게는 둘도 없는 소중한 자녀들이다. 

“자식 셋 모두 교무가 되기를 바랐으나 첫째인 아들은 크게 관심이 없었고 다행히 두 딸은 스스로 선택하더라구요. 제 원대로 돼 너무 행복합니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다닐 때 입교시키면서 셋을 모두 전무출신 시켜야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자라서 진로를 결정할 때는 스스로 선택하도록 맡겼다. 

“평범한 사람들처럼 시집살이 하면서 우는 것과 교무로서의 어려움으로 우는 것, 둘 중에 부처님 공부로 흘리는 눈물이 훨씬 더 좋은 길이라는 제 의견만 말했어요. 주위에서 자녀 결혼이 부럽지 않느냐고 물어보기도 하지만 제 대답은 확실합니다. 잠깐의 쾌락보다 영생의 즐거움을 선택해야지요.”

막내를 낳은 후 극도로 악화된 건강과 경제적인 궁핍으로 삶이 너무 고달팠고 이 고통이 자신에게서 끝나지 않을 것 같아 절망스러웠다. 차라리 혼자였으면 몰라도 결혼해서 더 고생을 만들었고 자식을 낳아서 또 고를 만들었고, 이 고가 자식의 자식에게까지 이어지는 것이 너무 싫었다. 이런 고는 다시 만들지 말아야겠다 싶었다. 

불자야 듣느냐 중생의 부름을
괴로움 바다와 불붙는 집에서
건져주 살려주 우짖는 저 소리
불자야 듣느냐 애끓는 저소리
- 성가 18장 불자야 듣느냐 -

후에 입교해보니 이 노래가 있음을 알고 얼마나 눈물을 쏟았는지 모른다. 그의 마음을 꿰뚫고 만든 노래 같았다. 

 

고통의 바다에서 건져낸 회상의 일꾼
진리부처님, 파란고해에 종지부를 찍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버텨내던 중 TV에서 우연히 원불교라는 단어를 처음 듣고 이름이 참 좋아 근처 교당을 수소문해 찾았다. 그의 삶을 확 바꿔놓은 언양교당 이형덕 교무와 첫 인연을 맺은 것이 그의 나이 38세 때다. 오랜 병고와 가난으로 우울증까지 겹쳐 이대로 죽고 싶다는 마음이 들 때쯤 큰 절을 가볼까, 유명한 스님을 만나볼까 등으로 방황하던 때다.

“처음 교당에 들어섰는데 불단에 일원상만 딱 있더라구요. 아, 이거다 싶었습니다.”

원불교가 뭐하는 종교냐는 물음에 이형덕 교무의 진리부처님을 모시는 곳이고 법신불일원상에는 삼라만상이 들어가지 않는 것이 없다는 설명 한 번에 눈앞이 확 밝아지며 모든 의심이 풀려버렸다. 명쾌했다.

“당시 농촌에서 추수할 때 버튼 하나 눌리면 다 굴러가는 전자동 최신 기계를 만난 느낌이었습니다. 진리부처님은 버튼 하나로 추수하는 신식 기계처럼 이렇게 간단한 것이구나. 그걸 모르고 그동안 등상불 부처님, 용왕님, 산신각, 칠성각 안 돌아다닌 곳이 없었거든요.”

그는 어느 교무님의 ‘단하소목불(丹霞燒木佛)’ 법문을 들을 때도 그 교무님 눈 속으로 빨려 들어갈 뻔했다는 감동도 보탰다. 단하 스님이 나무로 만든 불상을 태워 몸을 녹였다는 일화를 들으면서 등상불이 아닌 진리부처님을 모셔야 한다는 말씀에 그의 방황은 종지부를 찍었다. 어둡고 캄캄했던 암흑의 삶이 밝은 색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그의 삶은 원불교를 만나기 전과 후로 극명하게 나뉜 것이다.

그는 이렇게 좋은 원불교를 공부시켜 주시는 교무님이 너무 좋아 교무님 껌딱지가 됐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플 때도 병원보다는 교무님을 만났고, 하루도 놓치지 않으려고 유리창 너머로라도 교무님 얼굴을 보고 갔다. 길을 가다 검은 치마만 봐도 울컥해서 돌아봤고 교무님이 익산 총부로 가실 때는 작은 벌레가 돼 교무님 호주머니에 들어가 따라가고 싶다고 호소도 했다. 365일 쉬는 날이 없는 직장이라 10분, 20분 시간이 날 때마다 교당으로 달려갔고 누구 말대로 미쳐서 다녔다. 

원불교에 교무되는 길이 있다는 말을 듣고 아이 셋을 입교시키면서 교무님께 키워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이들을 훌륭히 키워낼 능력이 없으니 어떻게 하면 되겠느냐고. 

이형덕 교무가 그의 원을 받아들여 여천교당으로 이임하면서 큰 딸 혜전교무를 데리고 갔다. 날아갈 듯이 기뻤다. 그러나 초등학교를 갓 졸업한 혜전교무가 중학교 3년을 가족과 떨어져 살면서 힘들었던지 오랜만에 엄마를 만나 슬피 우는데 그는 눈물 한 방울 나지 않았다. 

“주변 도반들이 엄마가 딸을 한 번은 보러가야 한다고 해 중학교에 찾아 간 적이 있어요. 딸도 도반도 그렇게 눈물을 흘리는데 이해가 안됐어요. 이 좋은 영생의 공부, 교무가 되는 길인데 왜 우는지 그때는 몰랐어요.”

담임 선생님을 만나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한다며 야단을 맞고서야 번쩍 정신이 들었고, 어린 딸이 엄마가 많이 보고싶었겠다 그제서야 공감이 됐다. 중학교 졸업 후 다시 함께 살게 됐지만 그때만 생각하면 문득문득 가슴 아픈 세월들이다. 이후 큰 딸은 동생과 함께 나란히 동기동창이 돼 출가했고 그에게는 이제 원도 한도 없다. 

교당이 너무 좋았고 출근하는 시간 외에는 결석 한 번 하지 않았다. 입교 당시 유지비 천원이 없어 쩔쩔 맬 때도 요즘 말로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로 출석했다. 

“돌아보면 70여 년 눈물로 업장 녹인 세월입니다. 이 법 만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아찔합니다. 태어나서 가장 잘한 일이 원불교 만난 일이고 가진 것 하나 없어 쓰러진다고 해도 겁나지 않는 이유는 바로 진리가 내 뒤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음 생에도 그 다음 생에도 절대로 이 회상을 떠날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한다. 공부가 부족해 전무출신은 자신이 없고 다만 결혼하지 않고 오롯이 교당 일만 하고 싶다는 것이 다음 생 서원이다. 입교하고 보니 자신을 위해 이미 만들어진 주제가가 있더라고.
 
어둔길 괴로운길 헤매이다가
즐거이 이 법문에 들었나이다
이 몸이 보살되고 부처되도록
나아갈 뿐 물러서지 말게 하소서.
- 성가 48장 어둔 길 괴로운 길 -

[2021년 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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