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천 원로교무
김종천 원로교무

[원불교신문=김종천 원로교무] 지난 세기 서양에서 매스컴을 탄 부처님들은 구르지예프, 지두 크리슈나무르티 그리고 라즈니쉬 세 분이다. 물론 필자의 관견이기는 하지만 별 착오는 없을 것이다. 

그는 1923년 노벨 문학상을 받은, 예이츠의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발견된 신석기시대의 거석문화의 하나인 ‘태양의 신전’, 또 기원전 2,500년의 바빌론에 있었다는 지혜의 학교인 ‘사르뭉 형제’, 그리스 로마와 예수 이전의 ‘기독교’ 등, ‘태양의 아들’로서의 인간이 잊어버린 고대의 지혜들을 찾아 현대 인간행동 심리학과 접목을 시켜준 메신저이다.

그 메시지에는 우주와 인간의 숙명에 대해 일이관지하는 순수성이 있다. 그는 신지학협회 창시자의 한 명인 옐레나 블라바츠카야 그리고 신지학회 회장이었던 애니 베전트와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진리에 대해서 말하자면 인도는 그저 홍등가(Bordel)일 뿐이지”라고 했다. 

그것은 살아있는 우주의 진화에 동참하는 의식을 가진 생명체로서의 인간과 그 운명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인간 존재의 목적을 추구하는 그로서는 인도 종교의 복마전이나 무당집 같은 분위기가 그렇게 보였는지도 모른다. 사실 여러 종교의 발생과 육파철학 등 인도 아리안의 3,500년 종교철학은, 한마디로 베다(Veda)와 베다에 대한 각주뿐이라고 심하게 말할 수도 있다.

그는 러시아 영토인 아르메니아에 있는 알렉산드로폴의 그리스 구역에 거주하는 부모 집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리스인 어머니는 아르메니안이었다. 그는 굉장히 복잡한 인물이다. 중요한 것은 그가 스탈린과 같은 코카사스(Kavkaz) 지방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 지방색은 거의 신비에 싸인 그의 일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키워드의 하나이다.

그는 어려서 그리스정교회에서 교육을 받았고, 한두 번의 총격사건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기도 했다. 20세 전에 가출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수피의 메블레비파 등에서 공부했다. 그 후 목마른 선재동자로서 여행한 지방은 고대 이집트 수도인 테베와 아라비아반도의 메카 그리고 메디나, 중앙아시아와 고비사막, 파미르고원, 티베트, 인도 등이다.

20여 년의 고난에 가득 찬 방랑을 마친 그는 1910년 현재의 우즈베키스탄 공화국의 수도인 타슈켄트에 본부를 두고 자연과학의 전문 지도자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 후 그는 터키, 러시아, 독일, 영국 등 유럽의 여러 지역을 전전하다가 마지막으로 프랑스에 학교를 세웠다. 1933년 경제적 이유로 학교를 닫은 후 2차대전이 발발하자 파리의 아파트에 거주하면서 레즈비언 그룹을 지도했다. 그리고 1947년 10월 27일 후계자에게 마지막 지시를 하고 29일에 열반했다. 그는 평소 전문의들의 조언을 무시하거나 거절하는 등 의사들을 몹시 싫어했다. 미국서 날아온 주치의 웰치는 “그의 얼굴에는 병색의 흔적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나는 수많은 사람이 죽는 것을 보아왔지만 그는 왕과 같이 돌아가셨다”고 했다. 

그는 3백 년 넘게 러시아제국을 다스려온 로마노프 왕조가 시민들의 봉기로 붕괴되고, 볼셰비키 혁명, 터키전쟁, 제1차 2차 세계대전 등 인류 역사상 최악질의 시절에 최악질의 현장만 골라 다녔다. 제자들의 표현대로, 그는 “걸어 다닌 신(神)”, “진짜 슈퍼맨”, “전륜성왕”이었다. 아마 역사상 그렇게 어려운 시대를 가로지른 스승은 전무후무할 것이다.

/중앙남자원로수양원

[2021년 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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