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산종사 불교정전 의해義解 5

염관진 교무
염관진 교무

[원불교신문=염관진 교무] 정산종사는 ‘유무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의 ‘유’, ‘무’, ‘초월’, ‘생’, ‘사’의 개념과 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대종사의 ‘문(門)’의 비유(譬喩)까지 인용해 상세히 설명해 준다. 유와 무의 개념은 그 자체로 고유한 의미를 갖기보다는 일체 존재가 갖는 대대(待對)적 상대성을 일반화한 범주로 우주만유가 생성, 변화, 소멸을 거쳐 무한히 순환함을 명시한다. 이것과 이것 아닌 것을 구분하는 상대와 경계가 없이는 어떤 인식도 불가능하며 어떤 존재도 존재할 수 없다. a와 a 아닌 것의 ‘경계’가 있어야만 인식과 존재가 가능하다. 

그런데 경계는 구분과 대립을 고정시키는 것만이 아니라 안팎의 구분을 무화시킨다. 경계는 “우주의 성·주·괴·공(成住壞空)과 만물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사생(四生)의 심신 작용을 따라” 유동한다. 유는 유가 아닌 무로, 무는 무가 아닌 유로 미끄러지면서 이동한다.

유와 무의 차이는 외적 차이일 뿐이지 실상은 유 자체 안에 무를 함축하고 있다. 유와 무의 순환적 관계의 논리를 일상에 적용해 보자. 금욕주의자의 금욕적 정체성은 쾌락 때문이다. 쾌락 없는 금욕 없다. 권태에 빠진 금욕주의자는 한순간에 금욕의 경계 밖 쾌락으로 이동한다. 선과 악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와 달리 ‘유무초월의 생사문’인 일원은 말 그대로 유와 무의 경계를 초월한 문이다. 문이 개(開)와 폐(閉)의 문짝 운동을 가능하게 하지만 문 자체는 움직이지 않으며 문의 운동으로부터 독립해 있다.

일원은 ‘유무초월’하여 스스로는 ‘불변(不變)’하지만 유와 무, 생과 사의 변화를 가능하게 한다. 그래서 일원은 ‘유무초월’하여 대대 너머 절대이면서 동시에 생사를 가능하게 하는 문으로 비유된다. “일원의 진리는 유(有)도 아니요 무(無)도 아닌 자리”이며 “유(有)라고 하자니 무(無)의 상대(相對)가 있고, 무(無)라고 하자니 유(有)의 상대가 있으므로 유(有)다 무(無)다 할 수 없는 유와 무의 경계에서 한 걸음 나아가 유와 무를 나누기 전의 초월지경(超越之境)인 것이니라. 이러한 까닭에 유무초월의 생사문이니 곧 불변이라, 곧 유(有)는 생(生)이요 무(無)는 사(死)이나 사즉생(死卽生)이요 생즉사(生卽死)가 되어 생사(生事)가 돌고 돌아 유무초월(有無超越)의 생사문(生死門)이니라.” 정산종사 말씀이다.

서원문의 유무 개념은 ‘게송(偈頌)’의 유무 개념과 구분할 필요가 있다. 기표는 같지만 문맥에 따라 기의가 다른 경우다. 게송의 유무는 ‘상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유와 무를 나누기 전’과 후의 관계를 의미한다. 『대종경』 성리품 31장 말씀처럼 게송의 “무는 불변하는 자리”, “유는 변하는 자리”-유무는 성품의 진체의 양면-를 의미한다. 무는 ‘불변’ 또는 ‘본체’에 그리고 유는 ‘변화’, 본체의 ‘작용’ 또는 작용의 ‘결과’에 상응한다.

/원광대학교

[2021년 2월 5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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