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95년 신축된 인제교당은 869㎡ 부지 위에 423㎡ 규모로 1층 법당과 생활관을 조성했다. 특히 2층은 교도와 여행객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펜션 형식의 방 4개로 구성했다.
원기95년 신축된 인제교당은 869㎡ 부지 위에 423㎡ 규모로 1층 법당과 생활관을 조성했다. 특히 2층은 교도와 여행객들이 편히 쉬어갈 수 있는 펜션 형식의 방 4개로 구성했다.

[원불교신문=권원준 기자] 인제교당 생활관 2층에 오미자청과 들기름, 선물용 포장 상자가 나란히 쌓여있다. 인제교당을 찾아간 날 김성훈 인제교당 교무는 설을 앞두고 인제교당 후원인에게 전해줄 선물 포장에 여념이 없다. 대한민국의 최북단 강원도 인제군에 자리한 인제교당 김 교무는 전임 교무들이 일궈온 교화를 정성스럽게 이어가고 있다.


운명의 택지 세 필지
인제교당의 시작은 원기75년이다. 당시 한제선 강원교구장과 함께하던 5명의 교무가 속초에서 춘천으로 귀가하던 중 빙판 사고를 당했다. 이로 인해 인제에 있는 한 여관에서 유숙하게 됐는데 그때 인제교당 설립에 대한 최초협의가 진행됐다. 같은 해 3월 부임한 장혜선 강원교구장과 교무들이 이 지역을 수차례 방문해 부지를 물색했고 김남명 교무가 연원이 되어 4월 인제군 인제읍 상동2리 8반 소유 대지 496㎡에 지상 건물 한 동을 매입했다. 이후 원기79년 선교소 인가를 받고 류인태 초대교무가 발령을 받았다.

류 교무는 교화는 물론 교당의 경제 자립을 위해 일원상을 직접 제작해 판매하고 이원주 교도(현 교도회장)와 합심해 어린이 한자교실을 운영하며 이사병행으로 초석을 다졌다. 원기93년 당시 가건물 형태의 교당건물을 신축하기 위해 택지를 분양받을 때였다. 교당을 신축하는데 세 곳의 연결된 필지가 필요했고 교당 자리로 점찍은 곳이 있었다. 택지를 결정하던 날 교당 대표로 류 교무, 손도형 교도(당시 교도회장), 허만웅 교도가 참석했다. 제비뽑기는 시작됐고 3명이 각각 필지를 뽑았다. 하나하나 종이를 펼치는 순간 교당 부지로 점찍었던 세 곳의 필지가 나란히 적혀있는 것이 아닌가. 그간의 간절함이 하늘에 사무쳐 인제교당의 법계인증이 나타난 것이다. 이후 원기95년 김순명 교무가 발령받아 현재의 교당 외형을 갖추고 11년간 인제교당을 이끌었다.


유튜버가 된 김성훈 교무
김 교무는 원기105년 인제교당에 부임해 서원과 열정으로 첫 주임교무로서 임무를 시작했다. 하지만 동시에 코로나19도 시작됐다. 2월 코로나19가 대유행하며 대면 법회마저 불가능해진 상황이었다. 

처음 세운 계획을 전면 수정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으로 교도들과 소통하기 시작했다. 김 교무가 처음 시도한 것은 유튜브와 줌을 통해 법회를 시작한 것이다. 대면 법회가 불가능할 때에는 온라인이 소통의 가교 구실을 하며 효자 노릇을 톡톡히 했다. 이뿐만이 아니다. 코로나19가 잠잠해졌을 때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에 요가 교실과 매일 저녁 염불일기를 진행하며 수행을 이어갔다. 이 또한 비대면이 잦아지고 공부의 흐름이 끊어지자 유튜브 생중계를 통해 해결했다. 

김 교무는 “유튜브 생중계로 진행하니 교도뿐만 아니라 관심 있는 불특정 사람들도 함께 할 수 있어 오히려 원불교와 인제교당을 알리는 홍보까지 돼 일거양득의 효과도 얻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금의 어려운 교화상황을 새로운 시스템을 접목해 성장의 밑거름으로 삼은 것이다.
 

비대면시대에 인제교당은 유튜브와 줌을 활용해 좌선, 염불, 요가를 진행하며 교도들과 소통한다.
비대면시대에 인제교당은 유튜브와 줌을 활용해 좌선, 염불, 요가를 진행하며 교도들과 소통한다.

교화단과 상시훈련 중심으로 
원기106년부터 인제교당은 대종사 당대의 공부와 교화 모습을 체 받아 법회 모습을 변화시켰다. 월 2회 교화단 법회를 보며 설교 중심에서 문답·감정·해오를 통해 실질적인 공부를 점검하는 법회로 전환했다. 처음에는 어려워하던 교도들도 한 달여를 경험한 후 문답감정을 통해 속 깊은 공부가 됨을 느끼고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법회에 임하고 있다. 사실 강원도 내 교당은 5, 6급지 교당이 많다. 인제교당도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 대신 서로의 세정을 살피며 가족처럼 정을 나누는 일대일 공부와 교화를 할 수 있으니 이 부분을 강점 삼아 극대화했다. 

김 교무는 학부 시절부터 초기교서 공부를 꾸준히 했다. 『불법연구회 통치조단 규약』을 공부하던 중 교화단이 중심되는 교화를 그렸고 인제교당에서 꿈꾸던 교화를 시작했다.

교화단과 또 하나의 교화 중심엔 상시훈련이 있다. 강원교구는 3년 전 양원석 교구장 취임 후 교구 교화목표를 ‘상시훈련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공부(교화)를 하자’로 정하고 상시훈련 체질화를 위해 전심전력하고 있다. 올해 겨울에 진행한 상시훈련 연구발표회에서 온라인으로 함께 좌선, 염불하기로 합의했고 2월 1일부터 오전 5시가 되면 어김없이 강원교구 내 재가출가 교도들이 각자 연고지에서 줌을 활용해 좌선을 시작했다.

아이디어의 시작은 인제교당이었다. 유튜브를 통해 좌선, 염불, 요가 등 교도들과 소통하며 상시훈련을 꾸준히 실천하는 모습이 교구 전체에 동기부여가 됐다. 원기104년 총단회에서 전산종법사는 “교단을 운영하는 실체는 교화단법이고, 상시훈련이 살아나야 대종사의 법이 실현된다”라며 교화단과 상시훈련을 강조했다. 인제교당이 법문말씀을 그대로를 받들어 새롭게 도약하고 있다.


경제 자립에 대한 화두
각 교당의 경제 상황이 넉넉하면 좋으련만 인제교당도 넉넉하지 못한 살림이다. 교당 초창기부터 경제 자립이 화두였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해마다 재가출가 교도들이 합심해 사업을 진행했다.

작년에는 정재국 교도의 밭(면적 1,487㎡)을 빌려 비교적 손이 덜 간다는 들깨 농사를 지었다. 들깨를 수확해 들기름을 짜 판매할 예정이었다. 이 정도 밭의 규모면 두 가마니는 거뜬하게 생산할 수 있다는 계산에 전 교도가 일주일에 3번 정도 만나 관리하며 정성을 들였다. 하지만 막상 가을에 수확하니 예상 수확량의 1/4인 다섯 말의 결과만 얻게 됐다. 한 말을 팔아 남은 이익금으로 들기름을 짜니 15병이 생산됐다. 이 들기름은 교도들과 직접 만든 오미자청과 함께 선물용 상자에 넣어 인제교당 후원인들을 위한 설 선물로 쓰였다.

김 교무는 “비록 수익금을 얻지 못했지만 1년의 정성으로 후원인들께 마음을 전할 수 있어 다행이다”라며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또 “이번을 계기로 농사는 아무나 짓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느꼈다. 올해에는 인제의 명물 용대리 햇 황태를 팔 예정이다”라며 새로운 사업구상으로 올해 희망을 이었다. 

인제교당은 자연과 하나가 된 마음의 쉼터이다. 인제로 향하던 두 시간 여는 잘 닦인 도로, 산과 물이 어우러진 또 다른 세상으로 가는 듯한 새로운 경험이었다. 높다란 산을 병풍 삼아 햇살 가득 머금은 인제교당의 첫 모습은 따뜻하고 평온했으며 가지런하게 정돈된 법당엔 법의 향기가 풍겨 오래 머물고 싶었다. 어른들이 70년대 군시절 추억을 얘기할 때 떠올렸던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라는 험한 산골의 이미지는 이제 더는 통용되지 않는 추억의 문장이 됐다. 천혜의 자연을 가진 이곳에서 교도들과 상시훈련과 교화단으로 거듭나는 인제교당이 대종사 정신을 일깨워주는 법의 성지가 되길 기대한다. 

[2021년 2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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