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6년 신정절 기념식 법문

반갑습니다. 새해를 맞이해 국내외 모든 교도님과 교무님, 모든 국민과 인류의 앞날에 법신불 사은님의 한량없는 은혜가 가득하시기를 기원하며, 신년에는 모든 일들이 원만성취 되시기를 염원합니다. 

저는 거년을 보내며 어렵기도 했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그 어려움으로 인해 한 가지 얻은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소태산 대종사님과 9인 선진님, 그리고 역대 어른들께서 혹독한 고난 속에서도 이 회상을 창립하셨다는 말씀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어려움이 말로만 들리고 마음속으로는 공감이 덜 되었습니다. 저도 이번 코로나로 인해 모든 왕래와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다 보니 답답하기도 했지만 대종사님 당대를 생각해보니, 그때는 얼마나 힘드셨을까. 일제강점기 모든 언행이 구속되고 함부로 말을 했다가는 자칫 회상이 문을 닫을 수 있는 상황 속에서도 대종사님께서는 그 시대의 어려움에 대해서는 크게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런 위기 속에서도 인류의 미래에 대해 한량없는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법문을 내려주시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물론 지금 우리가 처한 현실과 교화환경이 어렵지만 대종사님 당대, 말할 수 없는 가난과 암울함 속에서도 맨손 맨주먹의 ‘적수공권(赤手空拳)’으로 회상을 창업하신 역사를 떠올려봅니다. 지금은 그때에 비하면 꽃방석이요. 그때의 세상에 비할 수도 없기에 오히려 지금의 어려움을 앞날을 생각하며 잘 준비하는 기회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미륵불 용화회상
『대종경』 전망품 16장 법문은 그 어려웠던 시기, 대종사님께서 제자들과 직접 문답하신 말씀입니다. ‘내가 그 전에는 왜 몰랐던가’ 싶을 정도로 이 법문이 어떻게나 좋은지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개교의 동기에서 ‘정신개벽을 통해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한다’는 말씀은 다 알고 있는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낙원이 어떠한 것이지 막연할 수 있습니다. 낙원이란 그저 좋은 세상을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저는 처음에 낙원이 우리의 교법과 연결이 잘 안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개벽이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교법이 정신개벽의 방법이라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심정적으로 마음에 와닿지 않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미륵불 용화회상’ 법문을 이번에 다시 받들고 찬찬히 새겨보니 대종사님께서 말씀하신 낙원이라는 것이 비로소 손에 탁 쥐어지게 됐습니다.

광대무량한 낙원이란
우리가 보통 소태산 대종사님을 미륵불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저도 의심 없이 ‘우리 대종사님이 미륵불이다.’ 그렇게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전망품 법문에서는 미륵불에 대해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법문을 그 전에도 봤을 텐데 이번에 마음에 깊이 들어왔습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대종사님을 의례히 미륵불로 모셨습니다. 아마 당시 제자들도 저와 같은 생각으로 생불님으로 모셨던 대종사님이 미륵불 같으니 “내가 바로 미륵불이다”는 그 말씀을 기대하고 확답을 얻고자 “미륵불은 어떤 부처님이십니까”하고 여쭤봤을 것입니다. 그런데 대종사님께서는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다”고 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대종사님을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으로 모시지 않고 일원상을 모시는 것과 그 의미가 통하는 것입니다.

물론 법신불의 진리를 최초로 크게 드러내신 어른이 대종사님이시기에 분명 대종사님께서 미륵불이시지만, 대종사님께서 생각하시는 참 미륵불은 어느 한 분 부처님으로 제한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세상에 드러나는 것이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을 다시 바꿔서 생각하면 아무리 세상에 법신불 진리가 크게 드러나도 내 마음에 법신불의 진리가 드러나지 않은 분이 있다면 그 분은 미륵불을 못 만난 것입니다. 천년 만년 가도 만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세상은 아직 법신불의 진리를 모릅니다. 다행히 우리는 숙겁의 지중한 인연이 있어 이 회상에 찾아와 일원상의 진리를 배우고 익혀 그 진리가 내 마음에 밝아졌습니다. 바로 그 분은 법신불, 즉 미륵불을 만난 어른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이 너무나 좋으신 말씀입니다.

이어서 용화회상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면 밝은 세상이 된다는 뜻입니다. 내 마음에도 진리가 드러나면 모든 것이 밝아지듯이, 세상에도 일원의 진리가 크게 드러난다면 세상 전체가 밝은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세상이 바로 광대무량한 낙원인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 교리를 내시고 이루고자 하신 그 낙원이 바로 이것입니다. 미륵불 용화회상은 과거 부처님의 말씀이시고, 광대무량한 낙원은 대종사님의 말씀이지만 그 내용은 똑같은 것입니다. 
 
교리도가 미륵불 용화회상의 도면
대종사님께서는 미륵불 용화회상에 대해 전망품 18장에 두 가지 면으로 설명하셨습니다. 하나는 세상이 밝아지기 때문에 허실과 진위를 알게 된다. 허망한 것과 실다운 것,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알게 되고, 사람들이 그걸 알게 되면 천지만물 허공법계가 다 나에게 복도 주고 죄도 준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바를 경우와 처지에 따라 공을 들이는 그런 세상이 된다. 이것을 용화회상이라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사은 당처에 불공하라’는 말씀과 똑같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사은의 은혜에 불공하는 것, ‘인과보응의 신앙문’이 곧 미륵불 용화회상이 되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되면 서로서로 생불이 되고 부처가 된다. 집집마다 부처가 살게 된다. 모두가 부처가 되기 때문에 도량 아닌 데가 없다. 여기 가도 도량, 저기 가도 도량이니 따로 어느 곳이라고 지정할 것이 없이 회상 아님이 없다. 부처님이 계신 불도량을 다른 말로 하자면 삼학공부를 해서 삼대력을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하면 ‘진공묘유의 수행문’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만일 나에게 미륵불 용화회상의 형상을 묻는다면 “교리도(敎理圖)다”고 말하겠습니다. 위로는 법신불 일원상이 계시고 좌우로 신앙문과 수행문이 곧 미륵불 용화회상의 모습입니다. 그런 회상이 건설될 때 불법이 천하에 편만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부처님의 법이 세상에 가득 차게 되는 이 불법은 미래의 불법으로서 ‘시대화, 생활화, 대중화된 불법’을 말합니다. 

간혹 이 시대화를 현실화와 혼동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지금의 현실을 개혁하고 혁신하여 다 뜯어 고쳐서 새 세상을 만들려고 나오신 어른인데 현실화를 강조하면 자칫 현실에 적응하고 수긍하는 방향을 나갈 수 있습니다. 시대화라는 말씀은 ‘후천개벽시대’에 맞게 교법을 내셨다는 뜻입니다. 밤을 선천시대라 말한다면 후천개벽시대는 낮과 같이 크게 열려 밝은 시대입니다. 

우리 법은 세월이 흐를수록 맞아들어 갈 것입니다. 또한 생활화는 생활에 부합되게, 대중화는 어느 누구도 빼놓지 않고 전체가 공부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바로 미래의 불법이라 하셨습니다. 이러한 불법이 천하에 편만할 때가 미륵불 용화회상인 것입니다. 

저는 상상해 봅니다. 교리도가 거북이 모양이므로 수천, 만, 억의 거북이들이 곳곳에 다 기어나가서 가정과 직장과 세상에 가득 차게 될 때 불법이 천하에 편만한 세상이 되는 것입니다. 적어도 법강항마위에 오르신 분들은 집에서 용화회상을 건설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낙원이라는 것도 조금 더 가깝게 생각하면 법위등급별로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보통급 낙원은 보통급 십계를 지킨 만큼 낙원이 되고, 특신급과 법마상전급 또한 그에 맞는 계문과 공부를 해나갈 때 낙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용화회상이라 한다면 적어도 스승의 자격을 갖는 항마위는 되어야 개인의 낙원을 수용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어 출가위와 여래위는 더 폭을 넓혀서 전체를 함께 아우를 수 있는 힘이 있는 분들입니다.

하나하나 먼저 깨치는 사람이 주인
제자들이 아무리 대종사님께 “미륵불이 누구시냐”고 물어도 “바로 나다”고 안하시니 갑갑해서 “그러면 누가 미륵불 용화회상의 첫 주인입니까”하고 또 묻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아, 그 첫 주인은 나지” 하실 법한데도 “하나하나 먼저 깨친 사람이 주인이다”고 답하십니다. 그 말씀은 미륵불 용화회상은 첫 주인, 마지막 주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사람이 처음이면서 마지막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내가 그 자리를 깨쳐야 그것이 내 것이 되는 것입니다. 이는 후래에 회상에 입문하여 이 법을 믿고 받드는 모든 사람들에게 얼마나 큰 힘을 주시는 법문인지. “너희들도 안 늦었다. 내가 주인이 아니다. 하나하나 먼저 깨치는 사람이 주인이다.” 그렇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대종사님의 발원문
일상수행의 요법을 ‘교강(敎綱) 9조’라고 합니다. 참 의미가 있습니다. 얼른 보면 쉬운 말 같아도 교리의 강령과 요체를 누구나 쉽게 실천할 수 있도록 일상수행의 요법 9조에다 모두 담아주셨습니다. 저는 매일 아침 일상수행의 요법을 염송하면서 어느 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일상수행의 요법이 대종사님 발원문이다.” 우리 각자 각자가 일상수행의 요법을 공부하여 미륵불 용화회상의 첫 주인이 될 수 있도록 염원하신 것입니다. 또한 일상수행의 요법을 더 잘 실천할 수 있도록 바로 훈련법을 밝혀주셨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엔 법위등급으로 정신개벽의 순서를 잡아주셨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대종사님의 교법은 뜻을 파헤치고 해석하고 연구하여 알아내는 그런 교법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실천해서 세상을 고쳐나가는 법입니다. 초창기에는 가르쳐야 하니까 그럴 수 있습니다. 대종사님께서는 어떻게 하면 쉽게, 간단하게 한 손에 쥘 수 있도록 전할까 그 생각 뿐이셨습니다. 표어를 내주신 까닭도 거기에 있습니다. 교화의 방향도 이제는 훈련으로 가야합니다.

지금 교단은 3대를 마감하고 4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대종사님 교법은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하나 내가 얼마큼 실천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우리 교도님 한 분 한 분이 미륵불 용화회상의 주인이 되시고, 낙원으로 모든 생령을 인도하는 공도자 되시기를 다시 한번 간절히 심축드립니다.

 

최도화 여쭙기를 “이 세상에 미륵불(彌勒佛)의 출세와 용화회상(龍華會上)의 
건설을 목마르게 기다리는 사람이 많사오니 미륵불은 어떠한 부처님이시며 
용화회상은 어떠한 회상이오니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미륵불이라 함은 법신불의 진리가 크게 드러나는 것이요, 
용화 회상이라 함은 크게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니, 곧 처처 불상(處處佛像) 
사사 불공(事事佛供)의 대의가 널리 행하여지는 것이니라.” 
장적조 여쭙기를 “그러하오면, 어느 때나 그러한 세계가 돌아오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지금 차차 되어지고 있나니라.” 
정세월이 여쭙기를 “그 중에도 첫 주인이 있지 않겠나이까.”
대종사 말씀하시기를 “하나하나 먼저 깨치는 사람이 주인이 되나니라.” 
『대종경』 전망품 16장

 

[2021. 01. 29. 마음공부21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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