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5년 출가식을 거행하는 스물네 분 교무님. 진심으로 축하하며 한 분 한 분 보람 있는 전무출신의 생이 될 수 있기를 심축합니다.

삶의 표준과 철학이 있어야 
오늘 여러분에게 일생의 표준이 될 만한 말씀을 몇 가지 전할까 합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우리가 일생을 잘 살려면 표준과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우리가 일원주의 교법을 배우고 살아가는데 그것 말고 또 무슨 철학이 있고 표준이 있어야 하는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오랫동안 연마해 보니 다른 뜻이 아니라 우리에겐 이미 수많은 법문이 있지만 ‘실지로 내 삶의 지표가 되어있는 법문이 있는가?’를 성찰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입으로는 ‘감사, 감사’ 하고 살지만 마음으로 감사하려는 삶의 철학이 없다면 ‘법문 지식’에 떨어지게 됩니다. 진정으로 ‘내 생명과도 바꿀 만한 삶의 표준이 있는가?’를 깊이 되짚어 봐야 합니다. 
나에게는 ‘전무출신의 도’와 ‘불석신명불공(不惜身命佛供), 금욕난행불공(禁慾難行佛供), 희사만행불공(喜捨萬行佛供)’의 ‘삼대불공법(三大佛共法)’이 삶의 표준이자 철학입니다. 이 법문을 평생 가까이 모셔놓고 한꺼번에 되지 않기에 항시 내 생활과 대조하고 실천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꼭 잘 보이는 데다 놓고 늘 읽고 비춰보며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야 합니다. 이 ‘삼대불공법’이 바로 ‘전무출신의 도’의 핵심이자 요약입니다. 전무출신의 도 12조목을 일일이 대조하려면 사실 힘이 듭니다. 그러나 이 세가지 불공을 마음에 새기면 거기에 정신이 다 드러나 있습니다.

기원문 결어에 맥을 대고 공들이자
 또 하나 마음속에 오랫동안 간직한 법문이 있다면 바로 ‘기원문 결어’입니다. 대산종사께서 왕궁에 계실 때 시자에게 들은 말씀이 있습니다. 어느 날 대산종사님 방에 들어갔는데, 벽에 걸려 있는 ‘기원문 결어’를 가리키시며, “저것 좀 읽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언제나 그랬듯이 대산종사께서 먼저 합장하시고 “일상원(一相圓)!”하고 첫 마디를 떼면 그 다음부터는 시자가 읽습니다. 마지막 대목인 “이 세계는 하나의 세계, 세상은 한 일터 개척하자 하나의 세계”를 마치고 시자가 그만 하려고 하는데, 대산종사께서 다시 “일상원!” 하시니 시자는 안할 수가 없어서 또 기원문 결어를 읽었습니다. 또 “일상원!” 하시니까 “아~ 3번 하시려고 그러시는가 보다”하고 읽었는데 다시 “일상원”을 반복하셨습니다. 그렇게 7번, 10번, 20번, 30번 하시더니 나중에는 100번을 넘게 봉독하셨습니다.
나는 그 말씀을 듣고 “기원문 결어가 당신 법문인데, 그것을 모르시지 않으실 텐데, 한두 번도 아니고 100번을 넘게 하시다니….” 나는 솔직히 두 번도 못해봤습니다. “아~ 그렇게 공을 들이시는구나.” 그래서 나도 영생을 이 ‘기원문 결어’로 공을 들여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일상원(一相圓), 중도원(中道圓), 시방원(十方圓)’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습니다. 참 어렵게 생각됐습니다. 그러나 자꾸 의두를 걸고 보니 조금씩 가늠이 생겼습니다. “대종사님과 삼세제불제성, 그리고 우리가 결국 무엇 하자는 것이냐? 일상원 자리를 알아서 중도원을 이루고 시방원을 만들자는 것이다”는 것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일상원’을 그릴 때는 이렇게[○] 크게 그리시고, ‘중도원’을 할 때는 반절 딱 잘라 요렇게[○] 하시고, ‘시방원’은 열십자(十)로 이렇게[○] 그리셨습니다. 대중들이 오면 그렇게 동작을 취하십니다. 이 세 가지 안에 기원문 결어 전체 내용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그 다음에는 주세불이신 대종사님께서는 ‘불일중휘(佛日重輝) 법륜부전(法輪復轉)’하시고, 조사인 우리들은 ‘불일증휘(佛日增輝) 법륜상전(法輪常轉)’하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부처님의 혜명을 더욱 밝히고 법을 실천해서 법륜을 항상 굴리는 일이 바로 우리의 사명입니다. 안으로 지혜를 밝히고 밖으로 법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 일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바로 ‘세계부활’을 말합니다. 세계를 부활시키려면 도덕을 부활시켜야 하고, 도덕이 부활되려면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회상이 다시 부활되어야 하며, 회상이 부활되기 위해서는 성인이 나와야 합니다. 또한 성인이 부활되려면 각자의 마음이 부활되어야 하고 마음이 부활되려면 자신훈련, 교도훈련, 국민훈련, 인류훈련의 네 가지 훈련이 실천되어야 합니다.

대정진 대보은 대진급, 본연의 일
그다음에 나오는 대참회, 대해원, 대사면은 과거 선천의 일대 겁 업력을 녹이는 길입니다. 과거 업력이 녹아져야 후천이 밝아질 것입니다. 또한 우리 각자 마음에 있는 선천의 업을 다 녹여야 합니다. 교화 선상과 현실 경계 속에서 부딪치는 모든 일들이 결국 그 업력을 소멸시키는 과정입니다. 선천 업이 안 녹은 곳에는 다툼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자신 스스로 먼저 참회하고 해원하고 사면함으로써 용서하고 이해하고 풀어가야 합니다. 선천의 업을 풀어간다는 것을 멀리 잡지 말고 자신의 행동에서부터 이뤄져야 합니다. 또한 거기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업을 청산한 그 바탕 위에 대정진하고 대보은하고 대진급 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고자 하는 본연의 일입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모두는 일원회상의 영겁주인이 되고 일원대도의 영겁법자들이 되어서 천불만성을 발아시키고 억조창생을 개복시켜서 다 같이 무등등한 대각도인, 무상행의 대봉공인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무등등한 대각도인 할 때 이 말이 어찌나 어렵던지. 대각이란 말도 어려운 소리인데... 그러나 자꾸 하다 보니 그것이 결코 어려운 자리가 아니었습니다. 무등등하다는 소리는 쉽게 생각하면 상대심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마음에 상대심이 없을 때가 바로 그 자리입니다. 대각이라는 말이 멀리 느껴지지만 ‘상대심을 놓아라’ 하면 조금 더 쉽게 다가설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도 놓을 수 있겠죠?
무상행이란 말씀도 그렇게 난해한 말씀이 아닙니다. 상을 내지 않으면 되는 겁니다. 어떠한 일을 하고 내가 잘했지, 잘못했지 하는 상을 내지 않으면 참된 보은과 봉공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처음 이 법문을 들을 때 굉장히 멀게만 느껴지고 나는 못할 것 같았지만, 과거의 업력에 끌려가지 않고 내 자신에게 얼마나 공을 들이고 적공하느냐에 그 해답이 있음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므로 기원문 결어에는 대종사님의 일대경륜인 제생의세, ‘일체생령을 구제하고 세상을 치료한다’는 스승님의 경륜과 공부길, 그리고 서원이 그대로 갖춰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 이것 외에 무엇이 있겠습니까? 
처음 기원문 결어를 받들 때 ‘논문에나 결어가 있지 기원문에도 결어가 있는가’ 의심이 걸렸습니다. 그렇지만 ‘스승님께서 그렇게 까지 서원을 세우시고 적공하시니 나도 이 기원문으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지금까지 공을 들이고 있습니다. 이제 세월이 쌓여가면서 차츰차츰 그 뜻이 마음에 들어오고, 어려웠던 것이 조금씩 쉬워지며, 내 마음에 표준과 철학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스승을 모셔야 업력을 녹일 수 있다
마지막으로 하나의 당부를 더 드릴까 합니다. 바로 반드시 스승을 모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스승을 모시지 않은 사람은 결코 성공할 수 없습니다. 이 말씀은 절대적으로 모시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자기 스스로 모시고 싶은 만큼 모셔지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모실만한 스승이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나에게는 전부가 스승입니다. 지금 원로원·수도원에 계신 어른들을 뵈면 스승 아닌 분들이 없습니다. 주세불 회상이라는 것을 우리가 생각할 때, 이제 100년 된 회상에 어찌 스승이 없을까요? 스승이 꽉 차 있습니다. 그러나 각자 자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자기가 스승을 고르는 것입니다. 또한 스승이 꼭 한 분일 필요가 없습니다. 스승은 많을수록 좋은 것입니다.
우리가 스승을 모시는데 왜 신심을 말할까요? 이는 공부를 하면서 내 업을 극복할 때 신심을 바치지 않으면 넘어서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옳고 그 마음에 딱 붙잡혀 있기에 한계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승을 믿어야 합니다. 그 믿음에 의지해서 업력을 녹여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스승을 모셔야 할까요? 복이 있는 분은 스승을 어떻게 모실까요? 내가 아무리 합당하다 생각해도 그 분 말씀이면 내 생각을 바꿀 수 있는 분이 꼭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에게는 그런 분이 계신가요? ‘나는 이것을 꼭 해야 하겠다, 맞다’고 생각하는데 스승께서 “그거 아니다, 하지 말아라, 네가 틀렸다” 하면 그 생각을 바꿀 수 있나요? 그것이 참으로 쉽지 않습니다. 설령 그러한 분이 없다 할지라도 나를 마음 놓고 꾸중할 수 있는 분이라도 모셔야 합니다. 나에게 심한 꾸중을 해도 찾아갈 만한 스승이 계셔야 합니다. 누가 나에게 꾸중한다고 가지 않으면 훗날 나에게 그 누가 꾸중을 하겠습니까. 꾸중을 해도 믿고 찾아가야 합니다. 그때는 못 알아들었어도, 시간이 흐르면 다 본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대산종사께서는 “인간의 일이란 뜻대로 되지 않는 일이 많나니 일이 풀리지 않거나 실패하면 곧바로 본원으로 돌아오라. 용이 하늘로 오르다가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힘이 다하여 떨어지게 되면 본래 살았던 물로 돌아가야지 산이나 밭으로 떨어지게 되면 죽고 만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항시 본래 자리로 즉시 돌아오는 것이 바른 처사임을 강조하셨습니다. 교화현장에서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나가지만 말고 이 회상에서 힘을 갖출 때까지 함께 적공하기를 간절히 당부합니다. 
 

[2021. 02. 26. 마음공부22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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