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산 남궁성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농산 남궁성 원로교무(農山 南宮誠·72). 그의 일생은 영산성지와 인연이 깊다. 영산선원을 4년제 각종대학으로 인가받고, 국내 대안학교의 모체가 된 영산성지고등학교를 설립, 영광국제마음훈련원 초대원장으로 영산성지의 기반을 닦은 후 이제는 남미 교령으로 남미 교화에 공을 들이고 있는 그를 만났다.
 

형제들과 함께 출가의 길로
남궁 원로교무는 전남 영광 군서에서 신심 장한 일원 가정에서 태어났다. 신심이 깊었던 외조부와 부모의 영향으로 그의 형제 3남 3녀 중 5명이 전무출신의 길에 들어섰다. 남궁선봉 원로교무를 시작으로 남궁은, 남궁원, 남궁성, 남궁신 교무까지 그리고 출가를 하지 않은 첫째 누님은 아들(장호준 교무)과 딸(장천진 교무)이 출가해 일원 회상을 함께 일구고 있다.

“외할머니께서 외손자인 나를 안고 삼귀의와 영주 성주 등을 많이 외우셨어. 그 덕분에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 주문을 다 외우게 됐지. 농촌에서 고된 일을 하면서도 부모님이 365일 좌선을 안 할 때가 없으셨어.” 신심을 이어받아 가장 먼저 출가한 남궁선봉 교무가 형제들에게 큰 영향을 줬다. “어머니는 돈 버는 아들이 아니라 부처님의 세계 사업을 하는 아들이 됐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말씀하셨어.” 효심이 깊었던 그는 어머니와 누님인 남궁선봉 교무의 권유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출가를 한다. 

전생 인연이 깊었던 걸까. 출가를 서원하고 총부에 온 그는 선진들이 모두 친척같이 느껴지고 마치 고향에 온 것처럼 포근함과 편안함을 느꼈다. 예비교역자로서 학생 신분일 때도 이미 그의 마음에는 이 교단의 주인이 되겠다는 신념과 사명감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대종사님! 제가 교단의 주인이 되겠습니다. 교단에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이 교단을 지키겠습니다.” 그는 늘 성탑 앞에 서서 교단을 지키리라는 다짐의 기도를 올렸다.
 

근원 성지 영산에서
그에게는 근원 성지인 영산에서 살고 싶은 바람이 있었다. 그는 바람대로 영산선원 교사로 첫 발령을 받아 주타원 윤주현 원장과 함께 첫 근무를 시작했다. “지도력과 열성이 대단한 어른을 모시고 근무를 시작한 것이 복이라고 생각해. 주타원님은 교단 대의와 종명을 엄하게 세우시고 후진들에게 철저한 경영정신을 심어주셨어. 전 직원이 하나로 뭉쳐 기쁘게 일하는 모습을 보고 배우며 살았지.”

그는 영산에서 근무하며 3개 교육기관을 국가로부터 인가받는 성과를 거둬 성지의 위상을 공고히 했다. “내가 부임을 하여보니 당시 길용 초등학교에 2개 반, 90명 정도의 학생이 있었는데 그중에 중학교에 진학하는 학생은 10명 정도밖에 되지 않았어. 그런 상황을 들으시고 대산종법사님은 성지 주민에게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 하시며 교육사업을 권장하는 법문을 하셨어. 주타원 원장님은 그런 법문을 받들어 영산선원에 부설 중학교를 열게 됐지.” 그는 어려움 속에 그때 시작된 중등야학을 ‘고등공민학교’로 인가받았다. 인가를 받고 5년 후 중학교에는 진학을 하지만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위해 고등학교가 필요함을 느꼈다. 이런 보고를 받은 대산종사는 고등학교를 운영하라는 하명을 내린다. 하지만 총부 간부들은 그런 산골에 어떻게 고등학교를 설립하느냐며 하나같이 반대가 심했다. 
 

농산 남궁성 원로교무
농산 남궁성 원로교무


“대산종법사님의 뜻을 받들어 이 일을 해 놓고 먼 훗날 어떻게 되는가 두고 보시게요 하며 우리 직원들은 원장님과 함께 그 뜻을 받들어 추진하기로 했어.”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았지만 그는 주타원 원장과 천일기도를 하며, 된다는 신념으로 고등학교 설립을 이뤄냈다. 그때 세운 학교가 우리나라 대안학교의 모체가 된 영산성지고등학교이다. “영산성지고가 국제적으로 주목받는 특성화 학교로 성장하는 것을 보고 대산종사님의 불가사의한 영감에 감탄을 했어. 한겨레 중고등학교 경영권 경쟁에서도 원불교가 대안학교의 효시였기에 좋은 점수를 받을 수 있었지.” 

영산선원이 처음 각종대학으로 인가받은 것이 바탕이 되어 오늘날 영산선학대학교가 된 것은 그가 가장 보람되게 생각하는 일 중 하나이다. 당시에 2년제이던 영산선원은 4년제로 바뀌었으나 국가에서 인정하지 않는 대학과정이었기에 학교인가는 영산선원의 중요 과제였다. 그는 그 일을 위해 출장을 갈 때마다 ‘만고일월 대각지’ 앞에서 기도를 올리며 정성을 다했다. “교단과 스승님들이 염원하는 일이니 이 일은 반드시 되는 일이라는 신념을 놓아본 적이 없어. 쉽지 않은 일이라도 된다는 신념으로 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체험이 됐지.”

15년간의 영산선원 생활을 마치고 총부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훗날 영산선학대 총장으로 또 말년에는 영광국제마음훈련원 초대 원장으로 부임해 훈련원의 기초를 닦고 퇴임을 맞게 되니 그와 영산성지와 인연은 참으로 깊었다.


교정원과 교당에서
그는 총부무 과장·차장·부장, 수위단사무처장, 교정원장 등 13년을 총부에서 근무했다. 총무부장 시절 그는 인사제도를 바로 잡는 데 힘썼다. 또 그는 평생을 정남으로 살아왔지만 결혼한 교무들을 위한 제도를 만드는 등 복지제도에 힘썼다. “나는 초기교단의 어려운 시절이기 때문에 정남을 서원했지만, 앞으로는 결혼하고도 전무출신을 잘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어. 정남정녀들이 결혼한 남자들의 세정을 알아주고, 결혼한 남자들이 정남정녀들의 생활을 걱정해 주는 그런 교단 분위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해.” 

교정원장 시절 그는 대산종사탄생 100주년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교단 100주년 기념사업을 준비하는 일에 전력했다.

서울 중구교당, 부산 서면교당, 대구교당 등 교당에서 교화할 때 그는 3년씩 짧은 근무기간임에도 연원교당과 기관을 설립해 냈다. 중구교당에서는 여주교당, 서면교당에서는 경북 청송군 진보면에 교당을 세웠고, 대구교당에서는 대구 원음방송국을 설립했다. “세 교당에서의 교화를 잊을 수 없어. 모두가 최선을 다한 교화현장이었고, 교도님들의 많은 합력이 있었기에 정말 감사해. 퇴임하고 보니 순간순간이 모두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어.”
 

다음 생에는 남미에서 만나세
남궁 원로교무는 공부와 생활의 병진,  신앙과 수행의 병진 등 대종사의 병진 수행을 표준으로 역경을 당하면 항상 교법정신에 대조하며 대처를 해나갔다. 스승을 모실 때도 역대 종법사님과 모시는 기관장을 스승으로, 또 여러 선진 스승들에게 두루 지도를 받았다. 특히 친누님인 심타원 남궁선봉 원로의 지도과 권장이 그의 전무출신 일생에 많은 힘이 됐다. 
 
아르헨티나, 칠레, 브라질 등 남미 교화에 큰 발자취를 남긴 남궁선봉 원로교무는 그에게 “우리 이제 다음 생에는 남미에서 만나세”라고 말한다. 퇴임 후에도 그는 남미 교령으로서 제2의 교화를 위해 남미를 연구하고 있다. “지금은 아르헨티나 교당 부지확장을 위한 모금 운동을 하고 있어. 전산종법사께서 해외 개척불사를 강조하시니 더욱 남미 교화 개척에 사명감을 느끼게 돼. 그동안 남미 교화를 후원해 주신  분들과 최근 부에노스아이레스 교당 부지확장 모금에 합력해 주신 교무님과 교도님들께 감사를 전하고 싶어.”

출가해 일원주의 사상을 알게 된 것이 생에 최고의 경사라는 그. 혼자 가만히 있다가도 일원상의 진리를 알게 된 것을 생각하면 기쁨과 희열이 샘솟는다. “몇 생은 더 정진 적공해야 불보살의 반열에 오를 것 같아. 다음 생에도 이생의 서원을 쉼 없이 계속할 거야.” 

이번 생에는 한국에서 그리고 다음 생에는 남미에까지 활짝 꽃피울 그의 일원화의 향기가 기대된다.

[2021년 3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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