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산 노대훈 원로교무

경산 노대훈(본명 권용) 원로교무.
경산 노대훈(본명 권용)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진리탐구를 향한 순수한 열정이 가득한 경산 노대훈(본명 권용) 원로교무(敬山 魯大薰·77). 원광대학교에서 30여 년간 후학들을 지도하고 퇴임한 후 지금도 그의 진리탐구 여정은 계속되고 있다. 칠순이 훌쩍 넘은 그의 나이는 숫자에 불과할 뿐, 유연한 사고와 열린 자세를 지닌 그의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영생의 의사가 되리라
노 원로교무는 충남 서천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군산 시청에서 공무원으로 일하다 안타깝게도 6.25 때 이른 나이로 열반에 든다. 그 후 어머니는 생활을 책임지기 위해 외지로 일하러 다니고, 그는 유학자이신 조부의 훈육 속에 남원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그의 할머니는 남원교당 교도회장이셨던 이모할아버지 내외의 영향으로 원불교에 다니고 있었다. 자연스레 그도 할머니를 따라 교당에 자주 드나들게 됐다. “훈타원 양도신 교무님이 남원교당에 계셨어. 교당에 가면 반가이 맞아주셔서 할머니를 따라 즐겁게 교당을 다녔어. 정산종사님께서 정양차 남원교당에 자주 오셔서 뵀던 기억도 나.” 초등학교 시절 그는 교당 웅변대회에서 ‘우리 교무님’이란 주제로 1등을 해 선물로 『불교정전』을 받기도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던 그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경기중·고등학교에 진학하려 했으나, 가정 형편상 남원중학교를 거쳐 전주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전주고에서도 우수한 성적으로 서울의대를 목표로 열심히 공부하던 그는 입시철이 다가오던 고3 겨울 갑자기 각막파손으로 눈을 크게 다쳐 공부에 전력할 수가 없었다.

원하던 입시 결과를 얻지 못한 그는 재수를 준비했다. 형편이 넉넉하지 못해 중·고등학생들을 가르치며 공부를 병행하던 중 경남교당(현 부산교당)으로 근무지를 옮긴 양도신 교무가 그에게 연락해 왔다. 부산 경남교당에 와서 입시준비를 하면서 마음공부도 하라는 뜻이었다. “당시 부산에는 초량학원이라는 유명한 재수학원이 있었어. 교당에서 숙식하며 학원을 다녔지. 훈타원님이 어머니처럼 따뜻하게 잘 챙겨주셔서 내 마음이 많이 녹아내렸던 것 같아.” 

하루는 양도신 교무가 그에게 멀리 서울까지 가지 말고 부산대 의대를 가서 이쪽 부근에서 자신과 같이 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하지만 서울대를 목표로 하던 그에게 부산대는 탐탁지 않았다. “훈타원님이 의대도 좋지만 영생의 의대가 있다고 말씀하셨지. 매일 듣는 게 그런 말씀이었어. 그러다 보니 생각이 조금씩 변하게 됐어. 한 번은 고양이가 아파서 우는 소리를 듣다가 문득 ‘내가 저 고양이를 낫게 해봤자 그대로 고양이 몸이겠다. 저 고양이를 진급시켜서 사람이 되게 해줘야 진정한 의사가 되겠다’란 생각이 들었지.” 그는 그렇게 영생의 의사가 되기 위해 서울의대의 꿈을 접고 출가라는 더 큰 서원의 길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됐다.
 

노권용 명예교수.
노권용 명예교수.

교화 현장에서
원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그는 준교육기관인 원광고등공민학교에서 주경야독하는 학생들을 가르쳤다. 자신이 중고등학교 때 공부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학생들을 지도해 고입검정고시 합격이 평소 10여 명 정도였던 것을 48명까지 합격시키는 큰 성과를 냈다. 이후 그는 마포교당 부교무로 근무하며 동국대학교에서 불교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김동화 교수님이 지도교수였어. 원래 화엄철학으로 논문을 쓰고 싶었는데 자꾸 『기신론』 사상을 공부해보라고 하셨어.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참 감사해. 초입 단계부터 사사물물이 다 법신불이라고 해버리면 겉 넘기가 쉬워. 궁극의 절대 세계, 즉 본원·본성 자리를 이상 목표로 삼아야 해. 그 자리를 알고 나서 다시 이 현상세계를 볼 수 있어야 해.”

마포에 이어 신촌교당에서 근무하게 된 그는 그곳에서 청년 교화를 꽃 피웠다. “교단 내에만 머무르는 원불교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이 사회와 역사를 발전시킬 것인가를 중심으로 청년들과 공부했어. 당시 서울대, 연대, 고대, 서강대, 이화여대 등 의식 있는 운동권 청년들이 많이 모여들었지. 정말 재미있게 공부했어.” 

원광보건대에서 강의 요청을 받은 그는 익산으로 내려와 원광대에서 불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퇴임 전까지 원광보건대, 원광대학교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는 데 열성을 다했다. 그는 원광대학교 재임 시 동양학대학원장을 맡아 대학원을 크게 융성시켰다. 수도권에 위치한 산본 지역에 분교를 내고 불교학과, 동양철학과, 기공학과, 다도학과 등 동양학 각 분야의 최고의 교수들을 섭외해 커리큘럼을 짠 결과, 등록 학생 수가 300명이 넘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일을 맡으면 항상 재미있게 하자는 주의야. 고등공민학교에서도, 마포, 신촌에서도, 원광대에서도 일하는 과정이 늘 재미있었던 것 같아.”
 

법신불 신앙이 바로 서야
“요즘은 대학원대학교에서 학생들과 교도들을 대상으로 ‘불타관 발달사와 법신불신앙’, ‘기신론과 일원상진리’ 등을 대면·비대면(줌)으로 수업하고, 매주 재가출가 교도들과 함께 ‘유불도의 고전공부‘, ‘기신론과 현대물리학’, ‘뇌과학과 자아초월심리학’ 등의 공부모임을 주선하고 있지. 퇴임 원로 교수들의 교리토론 모임은 코로나19로 잠정 중단상태야.” 최근에는 천도교의 수운사상을 흥미 있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그의 관심사는 힌두, 유학, 동서양의 각종 영성수련 서적은 물론, 양자역학과 생명공학 등 다양하다. 쉬지 않고 진리를 향한 발걸음을 끊임없이 내딛는 그는 후진들에게 당부하고픈 것이 많다.

그는 먼저 심오한 교학이 정립돼야 함을 강조했다. “원불교학이 정립돼야 하는데 아직 미비해. 현재 원불교학은 류병덕 교수 등 초기 교학 수립자들에 의해 기초 됐는데 그 이후로 큰 발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어. 인류 정신사의 고전적 구약과 다양한 현대 학문을 다 담아낼 수 있는 깊고 폭넓은 원불교학으로 발전시켜 가면 좋겠어.”

그는 또 예비교무 교육의 중요성을 말했다. “티베트 불교의 린포체 교육처럼 인류의 고전적 정신의 본질에 맞닿게 하는 심도 있는 교육 훈련이 필요해. 또 가톨릭신학대학이나 성공회대의 경우 시대에 따른 학문을 잘 가르치고 있지. 소태산 대종사께서도 시대에 따라 학문을 준비하라고 하셨어. 그러므로 우리는 궁극적 진리에 대한 탐구는 물론, 역사와 사회를 향도해나갈 수 있는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기르기 위한 수준 있는 교육이 절실히 요청돼.”

그는 교단운영에 대해서도 의견을 개진했다. “교단운영에 있어 철저히 공화제가 고려되어야 해. 그리고 교역자들이 기본적인 품위를 유지할 수 있도록 생활 보장이나 교역자 복지가 충분히 뒷받침돼야 할 것이야. 그렇지 않고서는 교역자가 늘어날 수가 없어.”

그는 남은 생의 과제를 ‘법신불 신앙의 결사 운동’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참나가 바로 미륵이요, 법신불이야. 그 자리를 대종사님께서는 공·원·정으로 잘 밝혀 주셨어. 여기에서 공은 유무로 규정할 수 없는 순수존재를 말하며, 그 자리는 동시에 빛(지혜의 광명)이며, 무한 절대 은혜이기도 해. 이러한 공·원·정 삼대력이 충만한 법신불 참나 자리는 신앙과 수행이 다르지 않아. 즉, 무시선이요, 동시에 사사불공이야.”

눈빛을 반짝이며 그가 말을 이었다. “보조국사가 정혜결사운동을 한 것처럼, 생애 다 하도록까지 법신불 신앙운동, 참나 운동을 해나갈꺼야. 법신, 참나의 삶을 함께하는 운동이야. 요즘은 줌이 있어서 멀리서도 함께 공부하기가 참 좋은 조건이야. 이 세상에 완성된 사람은 없으며 누구나 다 진행형이라고 봐. 나 또한 부족하기 그지없으나, 여러 도반들과 함께 서로 격려하며 공부해갈 수 있음에 법신불 사은님께 감사드려.” 그의 말에 더욱 힘이 실린다. “원불교 교도는 물론, 구도자라면 누구나 법신불·참나·하느님, 그 자리를 제일 먼저 알아야 할 것이야. 그것이 시작이고, 또 결론이 돼야 해. 공·원·정의 참나·법신불 세계는 완벽한 것이야. 참나·법신불 신앙운동이야말로 소태산 대종사님의 본의이시라 확신해.”

노권용 명예교수.
노권용 명예교수.

[2021년 4월 16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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