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원불교 열린 날을 맞아 시대적 이슈가 되는 주제를 소태산의 깨달음으로 풀어보는기획특집을 마련했다.
통일, 정치, 환경, 인권, 시대정신 각 분야 패널들이 이 시대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이 어떻게 실현되어야 하는지 제언한다.

[통일]
구공 救共 실천도 대종사의 대각을 실현하는 일

정인성 이사장 남북하나재단
정인성 이사장 남북하나재단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림 없이

통일을 향한 염원의 기도
쉬지 않아야 

대종사의 대각을 몇몇 키워드로 정리한다면 병진, 원만, 쌍전, 통합 등일 것이다. 원기106년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어진 한반도 문제 즉 통일의 과제도 대종사의 대각을 비롯해 이를 이으신 역대 종법사의 경륜을 바탕으로 해서 풀어내야 한다.

1910년 일제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 한 이후 20여 년이 흐른 원기15년(1930) 우리 민족의 희망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을 무렵에 소태산 대종사는 제자 몇 명을 대동해 금강산을 다녀왔다. 내금강으로 들어가서 외금강까지 두루 돌아본 후 다시 내금강으로 돌아온 대종사 일행은 철원, 서울을 거쳐서 익산으로 오는 일정이었다.

익산 총부로 귀환한 대종사는 대중을 향해 “금강현세계 조선갱조선(金剛現世界 朝鮮更朝鮮)” 법문을 내리셨다. 금강산이 세상에 드러나는 때가 오면 조선은 옛 조선이 아닌 상상하기 어려운 새로운 조선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 조선은 세계의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이 될 것이라고 했다. 

강제합병 이후 서서히 식민지 정책에 동화돼 희망이 끊어진 우리 민족에게는 실로 믿기 어려운 커다란 희망을 설한 것이다. 그 당시 대종사가 말씀하신 조선은 어떤 조선이었을까. 과연 분단된 한반도였을까.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우리 민족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서로 나뉘지 않은 한반도, 하나 된 우리 겨레여야 맞다.

대각을 이룬지 106년, 금강산 법문을 선포한지 91년이 지난 지금의 한반도 상황은 암울하기만 하다.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의 강대국들은 패권경쟁을 더욱 강화해 나가고 있고 그 경쟁 속에서 남과 북은 각각 어느 한편에 서도록 분위기가 조성돼 가고 있다.

첫째로는 그럼에도 통일에 대한 염원은 변함없어야 한다. 나라를 잃은 엄혹한 시기에 대종사는 한반도의 커다란 비전을 우리에게 말씀해 준 것처럼 녹록치 않은 국제 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대북정책 가운데에서도 우리 원불교 교도는 통일을, 염원을 놓지 않아야 한다. 

어떠한 경계에도 흔들림 없이 통일을 향한 염원의 기도가 쉬지 않아야 그것이 대종사의 깨달음을 현행화해 나가는 것이다.

다음으로는 금강산에 세계종교 간 평화의 센터를 세우는 일이다. 이는 대종사로부터 역대 종법사도 단 한 순간도 놓지 않은 과업이다. 나는 오래전에 스위스 보쉬라는 조그만 도시를 다녀온 적이 있다. 그곳에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의 일치를 염원하는 에큐메니컬연구소와 훈련원이 있다. 기독교인들의 평화를 생산하는 샘터 같은 곳이다.

대종사는 이미 더 오래전에 금강산에 종교의 울을 넘어서는 종교 간 평화의 센터 설치를 염원했다. 21세기 오늘의 원불교들은 어느 특정 종교가 아닌 전 인류가 각각 신앙하는 종교들이 모여 평화를 염원하는 센터를 세우는 일에 정성을 다해야 한다.

그리고 북녘의 동포를 위한 나눔을 실천해야 한다. 어느 종교인이 대산종사를 찾아와 승공을 말하자 대산종사는 화공, 용공, 구공을 설했다. 대종사의 대각의 정신인 통합을 강조한 것이다. 구공의 정신을 실천하는 일 또한 대종사의 대각을 실현하는 일이다. 멀리 있는 일이 아니고 지금 대한민국에 3만3천여 명의 북한이탈주민이 우리 이웃에 외롭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이들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함께 나누는 일 또한 대각 정신으로 하는 통일을 향한 실천이다.


[정치]
우리 정치와 대각의 의미

김성곤 이사장 재외동포재단

 

정치인도 국민도 여러 이념
하나로 보는 ‘동척(同拓)사업’, 
중정(中正)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집권 초기 80% 이상의 지지를 받았던 문재인 대통령이 보궐선거 참패로 임기 말을 힘들게 보내게 되었다. 직전 대통령들도 그랬고 해외에도 있는 현상이며 흔히 이를 ‘레임덕’이라고 한다.  그러나 유독 한국의 대통령들은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직전 박근혜 대통령까지 대부분 퇴임 후를 불행하게 보냈다. 왜 그럴까? 대통령뿐 아니고 한국에서 ‘정치인’이라는 직업은 늘 ‘거짓’, ‘부패’, ‘싸움’ 등 부정적 이미지와 연결되었다. 과연 한국의 정치인들이 문제가 많은 것일까?

윈스톤 처칠은 “모든 나라는 그 나라 국민 수준에 맞는 지도자를 갖는다”고 말했다. 필자도 한 나라의 정치행태는 그 나라 국민전체의 정치의식과 맞물려 있다고 본다. 실은 우리 국민들도 수시로 좌우로 나뉘어 상대 진영에 대한 극단적 태도를 보인다. 진보와 보수 언론의 논조를 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어쩔 때는 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보다는 진영의 입장을 대변한다는 느낌을 가질 때가 많다. 

물론 지도자가 잘 해야한다. 대통령부터 모든 공직자가 모범을 보이고 언론과 국민들에게 책잡힐 일을 말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 정치가 바뀌려면 언론과 국민들의 의식도 함께 바뀌어야지 그렇지 않고 아무리 새로운 정치인, 새로운 정당을 뽑는다 해도 우리의 정치 문화는 결코 바뀌지 않을 것이다.  

대종사께서 대각 일성으로 ‘만유가 한 체성이요 만법이 한 근원’이라고 말씀하셨다. 일원(一圓)의 진리에서 보면 진보든 보수든 모두가 다 공동체를 위해 필요한 은혜의 산물들이다. 이들은 때로 서로를 견제하고 때로 보완하며 역사를 앞으로 끌고가는 수레의 두 바퀴와 같다. 따라서 좌우가 서로 감사해야 할 대상인데도 불구하고 서로 원수처럼 척을 지고 있으니 우리 정치가 편할 날이 없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라는 허울좋은 이념싸움으로 수백만의 희생자를 낸 6.25 전쟁도 그렇고 지난 70 여 년 동안 남북이 군사적으로 대립하며 민족의 역량을 낭비하고 있는 것은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한반도의 분단이 국제정치의 산물이기도 하나 우리 민족의 역량 부족에도 원인이 있다.

정산종사께서 종교의 귀일처는 일원(一圓)이요 정치의 표준은 중도(中道)라고 말씀하시며 한국의 정치가 각각의 주의(主義)에 편착하여 조화되지 못하는 현실을 한탄하셨다. 따라서 우리 정치가 정상화되려면 정치인도 국민도 여러 이념을 하나로 보는 ‘동척(同拓)사업’, 중정(中正)의 정신으로 돌아가야 한다. 

다행히 시대가 음시대에서 양시대로, 상극의 시대에서 상생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이제 과거와 같이 상극의 정치, 권모 술수의 정치는 환영받지 못하고 상생과 화합의 정치가 환영 받을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필자는 한국정치의 미래에 대해 낙관적이다. 

세계인들이 우리를 ‘코리아’라고 부르는데 코리아는 ‘고려’(高麗)라는 말에서 나왔다. 이는 한자로 ‘대단히 아름답다’는 뜻이다. 그럼 무엇이 그토록 아름다운가? 삼천리 금수강산이 아름답고 한류의 배우들도 아름답지만 그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모든 진리를 하나로 보고 온 인류를 한 형제로 보는 깨달음과 그 실천이다. 언제인가는 이 아름다운 ‘코리안’들이 민족을 통일하고 세계 평화에 앞장서 그 이름값을 할 날을 기다려 본다. 


[환경]
무엇이 지금의 위기 초래했는지 깊이 인식해야
 

이유진 연구원 녹색전환연구소
이유진 연구원 녹색전환연구소

 

욕망이 초래한 결과를 깨닫고,

지구의 생태적 한계 내에서 
‘성장’이 아니라 ‘성숙’해 가야

21세기에 인간종으로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코로나19 팬데믹과 날로 강도를 더해가는 기후위기, 심화하는 불평등을 경험하면서 지금 이 시기를 살아내는 것에 대한 의미를 되짚어보게 된다. 

먼저 우리는 물질적으로 가장 풍요로운 세대에 살고 있다. 에너지 소비, 상품의 생산과 소비, 먹거리의 생산이 최고치를 찍고 있다. 거대 쇼핑몰과 마트에는 상품이 넘쳐난다. 조선 시대에 나무로 밥을 하고 난방을 했던 것에 비하면, 지금은 석유, 석탄, 천연가스와 같은 화석에너지와 원자력, 재생가능에너지 등 다양한 에너지원을 풍부하게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인류의 화석에너지 소비는 1970년대부터 급속하게 증가하게 된다. 

이러한 풍요의 시대는 기후위기와 생태적 위기를 불러왔다. 인류의 경제활동은 대기 중 온실가스 배출을 늘려 약 150여 년 동안 지구 평균기온을 1도나 끌어올렸다. 빙하가 녹고, 세계 곳곳에서 기상이변이 벌어지고 있으며, 해수면이 상승하고 있다. 지난해 호주와 캘리포니아 산불은 강수량이 줄어들면서 한번 발화한 불이 인간의 힘으로 끄기 어려울 정도로 확산한 결과다. 

우리나라도 54일간의 장마와 태풍을 겪었고, 지난해 쌀 생산량은 5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통일벼 보급이 이뤄지기 전인 1968년 이후 가장 적은 수준이라고 한다. 

앞으로 기후위기로 인한 재난의 강도는 점점 심해질 것이다. 우리는 한정된 지구에서 인간의 무한한 소비와 성장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경험하는 세대이다. 과학자들은 지금 수준으로 온실가스를 배출하게 되면 2030~2052년 사이에 지구 평균기온은 1.5도까지 상승할 것으로 경고하고 있다. 

물질적 풍요와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동시에 경험하는 세대로서 앞으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우리의 욕망이 초래한 결과를 깨닫고, 지구의 생태적 한계 내에서 ‘성장’이 아니라 ‘성숙’해 가야 한다. 지구 평균기온 상승을 1.5도 이상 올라가지 않도록 하려면 2050년까지 탄소중립, 즉 온실가스 순배출량을 ‘0’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것은 30년 안에 석유, 석탄, 가스와 같은 화석에너지를 거의 사용하지 않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탄소중립 사회는 석탄발전소, 내연기관 차량, 주유소, 연탄이 30년 안에 아니면 그보다 더 빠르게 사라지는 사회다. 이러한 변화는 경제사회 시스템의 대전환을 요구한다. 그런데 경제사회 시스템의 변화도 사회구성원들이 변화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함께 해야 가능한 일이다. 그만큼 이 시대에 인간으로 지구에서 살고 있다는 것이 어떤 책무를 요구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중요하다는 말이다. 

기후위기로 인류의 위기를 겪고 있는 우리에게 우주만유가 서로 연결돼 있으며, 지금의 위기를 초래한 물질문명에서 벗어나려면 마음공부가 필요하다는 소태산의 깨달음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가 지금 어떤 상태에 놓여있는지, 무엇이 지금의 위기를 초래했는지에 대해 뼛속 깊이 인식하지 않고서는 대안도 변화도 만들어내기 어렵다. 우리가 살길은 지구의 생태적 한계를 인식하고, 그 한도 내에서 서로를 돌보면서 살아가는 삶으로 전환하는 것이다. ‘깨달음’과 ‘전환’이 이 시대의 화두이다.


[인권]
존재에 부단히 이름을 붙이는 일, 인권
 

임태훈 소장 군인권센터
임태훈 소장 군인권센터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저마다
이름을 붙여 드러내고, 
지닌 모습 그대로 함께 살아가길

지난 3월 초, 트랜스젠더 군인 변희수 하사가 우리 곁을 떠났다. 마음이 무너지는 비보였다. 가까이서 보아온 터라 애달픔이 오래고 질기다. 전쟁 같은 삶, 그렇게 부르기엔 화가 나고 분한 일이지만 내가 만난 변 하사의 삶이 그랬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냈을 뿐인데 세상은 변 하사의 삶을 전쟁터로 만들어버렸다. 

위법 부당한 강제 전역, 쏟아지는 차별과 혐오가 그랬다. 대단한 걸 얻고자 한 것도 아닌데 그랬다. 그저 평범하게 평화로운 일상을 살아가고자 했을 뿐인데 그랬다. 날마다의 전쟁이 삶을 몰아댔다. 

평화는 존중과 인정에서 온다. 서로 다른 이들이 모여 사는 세상에서 관계의 평화는 다름을 인정하고 입장과 처지를 존중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개인의 관계, 집단의 관계, 국가의 관계가 한가지로 그렇다. 인정과 존중이 무너진 세상은 전쟁 같은 세상이다. 전쟁은 그렇게 개인에게, 집단에게, 국가에게 내려앉는다.

그리하여 인권은 곧 평화의 길잡이가 된다. 인권은 사람이 사람을 존중하고, 인정하며 살아가기 위해 타협하지 않고 지켜야 할 울타리다. 흔히 천부인권이란 말을 쓰지만, 권리는 하늘이 내려주는 것이 아니다. 인권의 역사는 사람 스스로 사람이란 존엄한 존재를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지 부단히 고민하고 찾아온 역사다. 사람의 평화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다.  

인권 운동은 존재에 이름을 붙이는 일이다. 서먹한 사람도 이름을 부르다 보면 친근해진다. 직함으로 부를 땐 삭막하던 이가 이름으로 부르면 한 사람의 사람으로 느껴지던 경험이 낯설지 않을 것이다. 이름에는 그 사람의 역사가 담겨있다. 그렇기에 인권 운동은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민, 이 땅의 모든 이들에게 저마다의 이름을 붙여 드러내고, 지닌 모습 그대로 함께 살아가기를 권하는 일이다. 

변희수 하사도 그랬다. 당당히 자기 삶에 트랜스젠더의 이름표를 붙였고, 또한 군인의 이름표를 그 옆에 붙이길 원했다. 그러나 군은 그 이름표를 뜯어갔다. 군은 변 하사를 쫓아내는 아주 손쉬운 방법으로 병영에서 트랜스젠더의 존재를 지웠다. 

변 하사의 강제 전역은 비단 변 하사 한 사람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군인으로 살아가고 있는 또 다른 트랜스젠더들의 이름표도 변희수의 이름표와 함께 뜯겨졌다. 트랜스젠더라는 이유로 지워지고 몰려나는 수많은 삶도 함께 뜯겨졌다.

평화롭게 살기 위해 전쟁을 감내해야 하는 삶이 너무 많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이 시대의 공도자는 기꺼이 그 짐을 함께 지고 가는 사람일 것이다. 다른 이의 평화를 위해 내가 가진 은혜를 다시 나누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사람일 것이다. 변희수를 어떻게 기억할지 고민하는 와중에 소태산 대종사의 가르침을 떠올린다. 사람의 권리가 저마다의 오롯한 이름으로 새겨지는 세상을 위해 무던히 노력할 뿐이다.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들어보지 못한 존재가 예상하지 못한 공간에서 등장하는 일이 잦아진다. 갑자기 있는 그대로 인정해달라는 이들의 외침이 당황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존재하던 사람들이다. 다만 이름 짓지 못하고 살았을 뿐이다. 존재하며 소리치는 이들을 언제까지 외면할 수 없는 일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서 정신의 개벽을 쉼 없이 고민하는 일, 우리 시대의 인권이 가장 앞에 두고 고민해야 할 일이다.


[시대정신]
깨달음은 이 시대의 절박한 가르침
 

여도언 학장 해운대교당 행복대학
여도언 학장 해운대교당 행복대학

 

교도의 자각과 교당의 변화 
많은 시민의 공감 이끌어내는 것이

깨달음의 시대화

종교가 시민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시민이 종교를 염려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종교의 순기능과 역기능 중 오히려 후자가 더 크게 작용하는 사회가 됐기 때문이다. 종교가 시민에게 지혜에 바탕한 진단 처방을 내놓는 것이 아니라 되레 혼란, 불화, 갈등, 기만, 불안을 부추긴다. 종교를 찾는 시민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종교가 직면한 위기의 일면이다. 종교가 시민에게 백안시 받는 또 하나의 주요한 이유는 돈의 힘에 굴복됐기 때문이다. 모든 종교가 예외 없이 그리됐다. 물질주의, 배금주의, 황금주의에 경도돼 정신보다는 자본의 힘에 매몰돼 있다.

이러한 시대상황에서 ‘물질이 개벽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소태산 대종사의 깨달음은 이 시대의 절박한 가르침이다. 원불교는 대종사가 ‘파란고해의 일체생령을 광대무량한 낙원으로 인도하려 함’을 동기로 삼아 탄생시킨 개혁불교, 새 불교이다. 사회와 멀리 떨어져 앉았거나 타력에만 의존하는 고립적, 단절적, 고답적, 의타적 종교가 아니다.

대종사의 깨달음이 시대화, 대중화하려면 교도의 자각과 교당의 변화 그리고 많은 시민의 공감을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전도의 필요성은 절박성, 위기성, 당위성 차원보다 시민을 원불교 교도로 교화하는 대사업이란 점에서 단기적 차원이 아닌 장기적 차원의 효율성에 그 초점을 맞춰야 한다. 

미술은 시대를 따라 낭만주의, 사실주의, 인상주의로 변천해 갔지만 원불교는 일개 사조로 그쳐서는 안 된다. 대종사의 깨우침은 영원히 지속돼야 할 인류 구원을 위한 대체 불가한 도법(道法)이기 때문이다.

이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적으로 무엇보다 먼저 교도의 불법생활의 일상화와 규칙을 엄격히 준수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교도는 반드시 성찰하는 생활을 습관화해 진리에 대한 의식수준을 높여야 한다. 교도 간에 진리를 보는 판단의 기준이 현저히 다르게 나타난다면 교도집단 내에서 혼란과 알력이 생긴다. 지혜의 집단이 형성돼야 한다.

교도가 일원상진리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가질 때 대종사의 깨달음은 사회 속에서 시대를 초월하는 문화로 꽃피게 된다. 교도가 진리공부에 숙성되지 않았는데 시민에게 대종사의 도법을 내놓을 수는 없는 것이다. 벌과 나비는 꽃망울을 찾지 않는다. 꽃이 활짝 피어 있는 곳이라야 무리로 자연 찾아온다.

교도는 공덕, 즉 선업을 쌓아 진급해야 한다. 물론 교도들에게 일방적으로 이타심을 강요하거나 절제와 질서만을 권유할 수는 없다. 그보다는 교도가 단기적인 심리적 아픔을 감수하면서 장기적인 진리적 승급을 도모하는 합리적 태도를 취할 필요가 있다.

외적으로는 교당이 의·식·주를 잘 갖춰야 대종사의 깨달음을 시대화, 대중화로 추동할 수 있다. 의·식·주가 부족한 곳에서 상도(常道)는 실현되기가 힘들다. 의(衣)는 시민이 푸근하고 편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싸안는 넉넉함을 보여주는 것이다. 시민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줄 심덕이 담보돼 있어야 한다. 식(食)은 마음공부이다. 공부가 부실하다면 시민에게 이 양식을 권유할 수가 없다. 주(住)는 안락함 안온함 외경감을 보여주어야 한다. 

신전인 교당이 시민에게 초라한 법당으로 비쳐서는 안 된다. 신전이 크다는 것은 단순히 물질 속에 든 욕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다. 규모라는 당의성으로 정법을 가르치기 위한 효율적 방책일 뿐이다.

[2021년 4월 23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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