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William Waterhouse의 1891년작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소장)                                                                  출처: 위키피디아
John William Waterhouse의 1891년작 오디세우스와 세이렌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 소장) 출처: 위키피디아

[원불교신문=조덕상 교무] 오디세우스. 그는 그리스 신화의 인물이다. 그리고 이 작품은 그의 영웅담이 담긴 ‘오디세이아’의 한 장면이다. 이야기는 이렇다. 트로이 전쟁 후, 고향으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 그는 세이렌이 있는 곳을 지날 것인가 말 것인가로 고민했다. 세이렌의 노래에 유혹되면 바다로 뛰어들어 죽게 되기 때문이었다. 트로이 목마의 계책을 세운 적 있는 오디세우스는 이번에도 기막힌 꾀를 내었다. 그리고 세이렌과 만나는 길을 택했다. 그 장면이 이 그림이다. 우리는 이 장면에서 마음공부 키워드 세 가지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세이렌, 돛대, 귀마개이다.


세이렌, 나를 뒤흔드는 경계
살다 보면 어려운 경계를 만나곤 한다. 이러한 경계가 ‘세이렌’이다. 그 순간, ‘이것이 세이렌이구나!’하고 받아들일 때 마음공부가 시작된다. 좌산상사는 “경계마다 공부거리”라고 강조했는데, 마음공부의 핵심이 여기에 있다.
경계는 순경(順境), 역경(逆境), 공경(空境)으로 나뉜다. 순경은 좋아서 끌리는 것이고, 역경은 싫어서 거슬리는 것이고, 공경은 나태하고 무기력하게 만드는 것이다. 여기서 세이렌은 좋아서 끌리는 것이기에 순경에 해당한다.
이러한 경계를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면, 경계에서 은혜를 발견하는 힘도 차차 생겨난다. 세이렌을 알아차리는 마음공부에서 은혜에 보답하는 삶(知恩報恩)으로 성장하는 것이다. 그 시작은 나의 세이렌을 발견하는 데 있다.


돛대, 나만의 중립의 장소
세이렌을 발견했을 때, 오디세우스처럼 세이렌(경계)과 마주하는 것을 ‘대경(對境)’이라고 한다. 여기는 치열한 마음공부의 장이다. 이 작품에서 묘사하고 있듯 세이렌을 만나는 것은 (법이) 죽느냐 사느냐의 급박한 순간이며, 그래서 마음공부의 장을 마음 난리의 전쟁터로 부르곤 한다. 이러한 마음 난리를 잘 버텨내기 위해서는 ‘중립의 장소’가 필요하다. 마음챙김(mindfulness)의 세계적 권위자인 니르베이 싱 교수는 ‘발바닥 명상’을 제안해, 여기에서 중립의 장소라는 개념을 적용했다. 폭력성이 심한 아이들에게 이 명상법을 지도했더니, 그들의 폭력성이 현저히 줄어들었다. 발바닥을 중립의 장소로 삼으면서 경계를 능숙하게 관리할 수 있게 된 것이 비결이었다.

좌선에서는 단전이 중립의 장소에 해당한다. 좌선 수행이 깊지 않으면 단전을 챙기는 힘이 약하기에, 일상에서는 단전을 유일무이한 중립의 장소로 보지 않는다. 오히려 염불의 ‘나무아미타불’이 좋은 중립의 장소가 될 수 있다. 또한 중립의 장소로 ‘일상 수행의 요법’을 활용할 수도 있고, ‘호흡’을 챙겨도 좋다. ‘자녀 사진’을 중립의 장소로 삼는 부모도 많다. 중요한 것은 나만의 중립의 장소가 있느냐이다. 중립의 장소가 없으면 세이렌의 유혹을 견뎌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오디세우스가 돛대에 자신을 묶었듯이 내 마음을 단단하게 묶을 수 있는 중립의 장소가 마련돼야 경계를 안전하게 맞설 수 있다.
 

바로 이 원상.
이것이 소태산 대종사가 우리에게 전한 중립의 장소가 아닐까. 
대각개교절을 즈음하며 대종사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귀마개, 경계를 피하는 지혜
오디세우스처럼 세이렌을 마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때로는 선원들처럼 귀마개를 하고 세이렌의 노래를 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도 있다. 이렇게 경계를 피하는 마음공부를 피경(避境)이라고 한다. 
얼마 전 ‘범 내려온다’라는 노래가 유튜브에서 화제였다. 지금 한 번 들어봐도 좋다. 이 노래의 흥겨움에 취하면 마을로 내려오는 범이 귀엽게까지 느껴진다. 하지만 범은 범이다. 우리는 범을 이길 수 없다. 그러니 범이 보이면 도망치는 게, 피하는 게 상책이다. 우리는 상황에 따라 오디세우스(강자)도, 선원(약자)도 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순간 내가 약자라면 피경도 좋은 방법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이처럼 하룻강아지(약자)임을 ‘쿨하게’ 인정하고 범(세이렌)을 피하는 것이 ‘귀마개’이다. 
사실 교당과 훈련원은 훌륭한 ‘귀마개’이다. 매주 교당에서, 종종 훈련원에서 ‘교당내왕시 주의사항’의 말씀처럼 공부하는 것은 나만의 중립의 장소를 마련하는 것이다. 여기서 대경의 마음공부를 준비할 수 있다. 내 마음을 중립의 장소로 능숙하게 묶을 수 있으면 철주의 중심이 되고 석벽의 외면이 되지 않을까. 그러면 세이렌이 나를 뒤흔들지 못할 것이다.


당신의 중립의 장소, 어디인가?
우리는 이와 같이 그리스 신화에서 마음공부의 원리와 방법을 찾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동양의 마음이 따로 있고 서양의 마음이 따로 있지 않다. 범부의 마음과 부처의 마음 역시 다르지 않을 것이다. 만법을 통해 한마음 밝히는 이치(通萬法 明一心)에는 동과 서, 범과 성이 따로 있지 않은 것이다. 이제 마음속으로 동그라미를 하나 그려보자. 그리고 “이 원상은 원만구족한 것이며 지공무사한 것이로다”라고 되뇌어 보자. 이는 ‘일원상 법어’에 있는 말씀이다. 바로 이 원상. 이것이 소태산 대종사가 우리에게 전한 중립의 장소가 아닐까. 대각개교절을 즈음하며 대종사의 마음을 헤아려본다. 

* 이 글은 『지금, 나의 길을 가는 중입니다(2020)』를 참고하여 쓴 것임을 밝힘.

 

조덕상 교무 /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
조덕상 교무 / 원광대학교 마음인문학연구소 교수

[2021년 4월 30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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