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어머니의 마음으로 쓰는 세상의 등불
문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용서하고

김정호 시인
김정호 시인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선운사 뒷마당 동백꽃 
눈물 되어 
하나, 둘
뚝뚝 떨어집니다
달빛 되어 잘게 부서져 내립니다
그 꽃잎 하도 서러워
잊혀진 사랑인 줄 알았습니다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질 줄 알았다면 더 이상 아파하지 말 걸 
그랬습니다 
(‘상처 아닌 꽃은 없다’)
 
 


붉은 꽃송이 채로 뚝뚝 떨어지는 선운사 뒷마당 동백꽃을 보면 누구나 시인이 되지 않을 수 없다. 국어사전에는 시인이란 ‘시를 전문적으로 짓는 사람’으로 풀이해 놨지만 정작 시인들은 ‘시를 꿈꾸는 사람’이란 말로 대답하기도 한다. 시를 향한 꿈은 시 창작과는 별개로 삶의 가치와 의미를 시에 두고 시적인 삶을 지향하는 태도로 해석될 수 있다. 세속에 물들지 않고 맑고 순수한 삶을 가꾸어나가겠다는 다짐이 시 곳곳에 담겨있는 시인을 만났다. 

김정호(법명 정호·구포교당) 교도는 2002년 계간 <시의 나라> 신인상으로 시인 등단, 2010년에는 <문학광장> 신인상을 받아 수필가로도 등단했다. 40년 동안 국세청 공무원으로 근무하며 활발한 문단 활동을 통해 『싱크홀』, 『상처 아닌 꽃은 없다』, 『빈집에 우물 하나』 등 9권의 시집과 산문집 『딴죽걸이』 등 모두 10권의 작품집을 펴냈다. 『상처 아닌 꽃은 없다』는 교보문고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국세청 공무원으로 40년을 근무하는 동안 총 25회에 걸친 화려한 수상 경력이 증명하듯 국세청 내 ‘정보팀의 전설’로 불릴 만큼 업무 능력도 탁월했다.

“시는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국세청이라는 직장은 매우 정확하고 철저하며 팍팍한 생활이어서 시가 없었다면 지금까지 버텨오지 못했을 거예요. 한 번 목표가 정해지면 무섭게 달려드는 성향을 시가 중도에서 균형 잡아주는 지렛대 역할을 해줬습니다.”
그가 유년시절부터 품었던 문학을 향한 꿈이 결국은 만나게 될 길을 빙 돌아오도록 만든 세월도 얄궂다. 시골 출신(그의 표현) 아들이 미래가 불투명한 국문과를 가도록 허락하지 못했던 가정형편은 그를 은행으로 밀어 넣었으나 6개월도 채 다니지 못하고 몸이 아파 퇴사하도록 만들었다. 우연히 길에서 국세청 공무원 시험 공고를 보고 응시해 바로 합격한 것이 그를 시로 이끄는 계기가 될 줄 그때는 그도 몰랐다. 자금추적 등의 엄정한 업무를 하는 검찰청 파견 근무를 오래하고 복직해보니 강성이라는 소문이 나 있어 사실은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항변하고 싶은 마음이 깊은 곳에 꽁꽁 눌러뒀던 시를 깨워냈다.  
 

그런 어느 날
네가 내게로 온전히 
다시 돌아온 날
한 잔 취기를 핑계 삼아
지순한 마음 못 이긴 척
너를 받아주었지
더는 이별 아닌 이별 아니게
다시는 상처 아닌 상처 아니게
몸 닳도록 지독히 사랑하기로 했지
詩! (‘다소니’)


“20여 년 전 국세청 내 문예대전에 5편의 시를 출품했는데 모두 입상했습니다. 이름을 가리기 때문에 동일인임을 알 수 없으니 제 시가 대상, 최우수상, 우수상 등에 모두 올랐던 것이죠. 심사위원 중 한 분이 등단하라고 권유해 시인이 됐습니다.”

시보다는 산문에 더 관심이 많았지만 일상을 글로 써내다 보면 직장이 언급될 수도 있어 우회로로 선택한 것이 시다. 9권의 시집을 내는 동안 산문집은 지난해 12월 국세청을 퇴직하면서 처음으로 출판해 그에게는 의미가 더 크다. 독자와 소통하기 위해 20년 전부터 매주 금요일에 수천 명의 독자에게 시와 산문, 사진을 엮어 보냈던 ‘시 편지’ 중에서 72편을 추려 출판한 책이 『딴죽걸이』다. 

수십 년의 세월 동안 그가 토해 낸 시가 600여 편에 이르지만 그 시들이 어떻게 해서 나오게 됐는지는 그도 모른다. 아무리 쓰려고 해도 일주일 동안 한 줄도 안 나올 때가 있고 어떤 때는 3일 만에 55편을 쓴 적도 있다. 언제 어떻게 시가 불쑥 나올지 몰라 늘 한 몸처럼 갖고 다니는 것이 시작 노트다. 길을 걸을 때도 화장실에 앉을 때도 구름을 보다가도 떠오를 때마다 기록하고 고치고 다듬는다. 시집 한 권 탄생을 위해 시작노트 수십 권의 거름이 필요했음이다. 그렇게 끝이 보이지 않을 것 같은 산고 끝에 탄생한 시지만 정작 활자화돼 세상에 나온 후의 고통은 더 크다. 

“시를 읽는 사람이 시인, 평론가, 시인이 되고 싶은 사람 등 딱 세 명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시집 발간 후에는 많이 아픕니다. 다시는 안 쓰리라 해보지만 부질없는 다짐이지요.”
 

귀뚜라미 울음소리
밤을 새우기 시작하면
더 이상 시를 쓰지 않기로 했다
뜨거운 심장 내려놓기로 했다
하늘에 시린 뼈로 각을 세우고
뚝 떨어지는 노을 닮은
청동실잠자리 날개 접으면
새가 되지 못한 고통의 언어
허공에 매달아 두기로 했다
빗금쳐 오는 빗방울 새벽을 여미면 싹도 트지 못한 시(詩)앗
차가운 가슴에서 한 아름 꺼내
빈 하늘에 그냥,
흩뿌려 놓기로 했다
(‘절필’)

 

원불교를 만나 시가 많이 편해졌다는 그는 시를 써 온 기간, 살아온 삶과 앞으로 살아갈 삶이 모두 우리 법이 바탕이 됐다고 고백하며 부끄럽지 않은 삶을 살 수 있는 자신도 이 법 때문이라고 감사해했다. 

“원래 시(詩)는 말과 절, 즉 말의 종교입니다. 법문도 수행도 실생활에서 나와야 하듯이 시도 우리 삶에서 어머니의 마음이어야 하고 등불이 돼야합니다.”

시를 경력이나 명함으로 수단화해가는 세태를 지적하며 사람이 살아가는데 푸근한 길잡이가 돼야함이 시의 원래 목적임을 스스로 다지고 또 다진다. 


만덕산 초선지 입구
무량의 나무, 나무들
우듬지 곧추세우고
일렬로 서서 합장을 한다
빗살 사이를 유영하는 벌레들
잎사귀 위 교전 펼쳐 들고
가부좌를 틀고 있다
 -중략-
그래, 기꺼이 가야 할 길이라면
지나는 바람이 후박나무 이파리에
꽉꽉 눌러 쓴 경전 읽으며
마음 밭을 일구리라
(‘후박나무 이파리의 노래’)

 

[2021년 5월 7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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