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106년 1월27일 전문직·봉공직 교무 훈증

자신성업봉찬, 대종사께 보은하는 길
대산종사께서는 2대 말 교단 100주년을 앞두고 ‘대적공실大積功室’ 법문을 천명하셨습니다. 이는 소태산 대종사께서 ‘집집마다 부처가 산다’고 명확히 방향을 말씀해주셨기 때문에 실제로 그러한 세상을 만드시고자 원기60년 생전 법강항마위를 처음으로 사정하셨고, 원기72년에는 출가위를 배출하셨습니다.

지금은 항마위가 많아졌고 교단의 풍토로 자리 잡았지만 당시에는 생전 항마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부처는 항마위 이상이기 때문에 살아있는 분들을 항마위로 올리는 데에 대중의 많은 반대가 있었고 대산종사께서는 이러한 고비를 넘겨 항마위 인증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더욱이 출가위는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 함지사지陷之死地를 당하여도 여한이 없는 분들이며, 천리天理를 보아서 인사人事의 법을 내는 위’이니 나에겐 꿈같은 일로만 여겨졌습니다.

그럼에도 대산종사께서는 “교단 100주년에는 여래가 몇 단이 나와야 된다”고 하시면서 “우리가 대종사님을 주세불로 모시고 있지만 우리만 주세불로 받들면 무엇하겠느냐? 세상 사람들이 대종사님을 뵈올 때 주세불로, 큰 부처님으로 모셔야 우리가 대종사님께 크게 보은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자신성업봉찬自身聖業奉贊을 해야 한다”고 수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자신성업봉찬’이란 ‘자신이 부처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될 때 대종사님을 세상이 주세불로 모시게 되므로 대산종사께서는 당신의 원력을 담아 대적공실 법문을 내려주셨습니다. 

대적공실, 성리의 뿌리를 잡고 흔드는 공부
‘여래위에 가는 적공’이라야 대적공입니다. 여래위에 가지 않으면 그 적공은 대적공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적공실의 ‘실室’은 무슨 뜻일까요? 집입니다. 절에 가면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습니다. 이는 ‘크게 고요하고 빛나는 집’을 뜻하며 대적광은 곧 ‘부처님의 마음자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대적공실에 들어가 공을 쌓아 그 자리를 체득해야 합니다.

군에서 제대를 하고 교정원장이셨던 다산 김근수 종사님을 구조실에서 모시고 살았습니다. 방에는 주산종사께서 쓰신 ‘불여만법위려자不與萬法爲侶者’란 글귀가 걸려있었는데 한번은 “저 뜻을 알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때는 잘 모르니까 가만히 있었더니 “공부를 하려면 뿌리를 잡고 흔들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나무 전체를 움직이려면 가지를 잡고 흔들 것이 아니라 기둥을 잡고 흔들어야 한다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마탁을 해보니 차츰 해오가 됐습니다. 여러분들도 이 뜻을 쉽게 알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연마해 보길 바랍니다.

이 대적공실 법문은 그 뿌리를 잡고 흔드는 것입니다. 대종사님께서는『대종경』성리품 30장에 주산종사에게 과거 칠불게송七佛偈頌을 해석하게 하시고 이어 서가모니 부처님의 게송을 새기라 하셨습니다. 

“‘법본법무법法本法無法’이요, 법은 본래 무법에 법하였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에 법이 없는 자리에 바탕했다. ‘무법법역법無法法亦法’이로다. 그런데 법이 없다는 것도 또한 법이다. ‘금부무법시今付無法時’, 이제 무법을 부촉할 때에 ‘법법하증법法法何曾法’고. 법을 법하려 하니 일찍이 그 무엇을 법할꼬.” 

대종사님께서는 “본래에 한 법이라고 이름 지을 것도 없지마는 하열한 근기를 위하사 한 법을 일렀으나, 그 한 법도 참 법은 아니니 이 게송의 참뜻만 깨치면 천만 경전을 다 볼 것이 없으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뜻만 제대로 알면 팔만대장경을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팔만대장경 전부가 그 자리에 바탕해서 이 경계, 저 경계를 당할 때 활용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수가 팔만만 되겠습니까? 수십억, 수만 가지 법도 거기서 나옵니다. 그 모든 것의 뿌리가 결국 ‘무법이라고 할 것도 없는 법’ 그것입니다. 

대적공은 ‘뜻을 아는 것’이 아니라 ‘되라고’ 하신 법문
대적공실에는 서가모니 부처님과 관련된 의두가 2조목이며, 고려시대 자각국사의 의두 1조목, 대종사님,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께서 밝혀주신 성리법문이 각각 1조목씩 실려있습니다. 물론 그 뜻을 정확히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아는 것만 가지고는 대적공실에 들어설 수 없습니다. “대적공 하라”는 것은 “그 자리에 마음을 합쳐라”는 소리입니다. 그 자리에 너의 마음을 합쳐라. 그래야 부처가 된다. 합치지 못하면 단지 부처 그림을 쳐다보는 것입니다. 

대산종사님께서는 대적공실 법문을 일체 설명을 하지 않으시고 대중에게 그냥 주셨습니다. 이 법문의 뜻을 해결하는 것은 각자의 몫입니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하고 마음에 화두가 잡히니 몇 년이 지나 깨달음이 생겼습니다. 

그러나 또 다시 의심이 들었습니다. “나는 멍청해서 수년이 걸렸지만 1년만 해도 금방 알아듣는 사람도 있을 텐데, 그러면 그것이 대적공이 맞는가? 왜 대적공실이라 말씀하셨을까?” 그때 생각이 들기를 “아! 이 법문은 단지 뜻을 알라고 주신 법문이 아니구나. 되라고 주신 법문이다.” 대적공이란 그런 의미가 있습니다.

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아니하시고 이미 왕궁가에 내리시며 모태 중에서 중생 제도하기를 마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다시 말해 ‘세존이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이미 왕궁가에 내렸고, 모태 중에서 중생을 제도하기를 마치셨다’는 그 뜻만 아는 것이 아니라 너도 그렇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너도 도솔천을 떠나지 않고 왕궁가에 내리고, 모태 중에서 중생을 제도해라.” 그렇게 똑같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세존이 이렇게 하셨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그 뜻을 아는 것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공부의 시작입니다. 그렇게 알아졌으면 실제로 네가 그렇게 되어라. 그것이 대적공입니다.

세존이 열반에 드실 때에 내가 녹야원으로부터 발제하에 이르기까지 이 중간에 일찍이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노라 하셨다 하니 그것이 무슨 뜻인가
녹야원은 부처님께서 최초로 설법하신 곳이요, 발제하는 열반하신 곳입니다. 부처님께서 성도하시고 초전법문으로 법륜을 굴리시다 마지막 열반하실 때 8만4천 법문을 하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수많은 설법을 하시고도 이 중간에 한 법도 설한 바가 없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부처님의 말씀은 사실입니다. “부처님께서 법문을 하시고도 당신은 법문을 하신 바가 없다고 했으니 너도 그렇게 할 수 있느냐?” 그 말씀입니다. 그것이 바로  대적공실입니다.


고불미생전 응연일상원 석가유미회 가섭기능전 古佛未生前 凝然一相圓 釋迦猶未會 迦葉豈能傳
‘고불미생전’, 옛 부처님이 태어나시기 전, 부처님이 나셔서 진리를 설하신 것 같지만 사실은 부처님이 나시기 이전에 ‘응연일상원’이라. 한 상이 두렷이 어려 있었다, 진리는 이미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석가유미회’, 오히려 서가모니 부처님도 그 자리를 알지 못했다. 대각하신 부처님도 이를 수 없는 그 자리를 ‘가섭기능전迦葉豈能傳’이라. 가섭이 어떻게 알아서 능히 전할 것인가? 여기에 의심이 걸려야 합니다.

유위위무위 무상상고전 망아진아현 위공반자성 有爲爲無爲 無相相固全 忘我眞我現 爲公反自成
‘유위위무위’, 유위有爲라는 것은 함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들이 하루 종일 사는 것이 유위입니다. 밥 먹고 말하고 하는 일체 육근동작에 함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유위가 함이 없는 ‘무위無爲’가 되어야 합니다. 함 없음에 근원해 함 있음을 이루라는 말씀입니다. ‘무상상고전’은 상이 없는데, ‘고전固全’이라. 이 자리는 전혀 훼손되지 않는, 그 상이 굳게 온전하다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무상無相이라야 상이 보존된다. 상 없는 자리에서 오롯한 상을 얻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망아진아현’은 나라고 하는 것이 없어져 버릴 때 참 나인 진아眞我가 드러나는 것입니다. ‘위공반자성’은 나라는 것이 없이 오직 공公을 위해서만 일을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내가 참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대지허공심소현 시방제불수중주 두두물물개무애 법계모단자재유 大地虛空心所現 十方諸佛手中珠 頭頭物物皆無碍 法界毛端自在遊 
‘대지허공심소현’, 대지와 허공은 내 마음에 나타난 바요, ‘시방제불수중주’, 시방의 모든 부처님은 손 가운데 구슬이다. 내 손, 장중의 구슬로 확실히 쥐었다는 말씀입니다. 
‘두두물물개무애’, 두두頭頭라는 것은 머리의 머리이니, 곧 으뜸 자리라. 그 으뜸 자리를 찾아오려고 하면 본원 자리로 가는 것입니다. 물물物物은 지말, 지류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두두물물개무애’란 근원과 지말 어디에도 걸림이 없어 전체가 환히 밝아졌다는 소리입니다. 

‘법계모단자재유’, 법계法界라는 것은 허공법계, 무한한 법의 세계인 대大 자리를 말하며, 모단毛端은 터럭 끝처럼 아주 작은, 일체의 모든 현상과 일을 상징하는 소小 자리입니다. 쉽게 비유하자면 우리가 선禪 을 해서 마음에 상相과 생각이 다 쉬어서 정定에 드는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법계입니다. 모단은 한마음이 나니 온갖 생각이 다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법계모단자재유’란 한마음을 거둬 들이면 그것이 법계요, 한마음 낼 때 모단이니 한 마음을 내고 들이는 것을 ‘자재유自在遊’ 하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전부 끌려서 한마음을 내기 때문입니다. 자유로이 내 마음을 내는 것이 아니라 옛날 나의 업이나 생각에, 밖에서 어떤 경계가 오면 끌려서 마음을 내게 됩니다. 그러므로 법계모단에 자재유하는 그분이 바로 여래如來입니다.
이 대적공실 의두는 모두 다 여래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중 내 마음에 제일 와닿는 화두를 걸어 놓고 늘 궁글리고, 마음을 합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내 마음이 법문과 같이 되면 우리도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합할 수 있도록 공을 들이는 것이 대적공입니다. 

성리를 표준하면 심법이 나온다
그러므로 “뿌리를 붙잡고 흔들라” 하신 뜻은 이 자리에 관심을 갖고 이 자리를 근본 삼으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뿌리를 잡아야 합니다. 성리의 소식은 나이나 연조에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수십 년 공부한 사람도 모를 수 있습니다.

예전에 대산종사께서는 “아무리 나이가 어려도 깨면 부처요, 나이가 100살, 200살, 500살 이어도 못 깨면 중생이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에 들어왔어도 바로 이 자리를 짐작해서 바로 마음에 체를 잡고 나가면 그분은 법랍法臘에 관계없이 법기法器로 알아야 합니다. 아무리 후배라고 함부로 대하면 안됩니다. 후배 중에 어떤 사람이 대종사님이 다시 오셨는지, 정산종사님이 다시 오셨는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러므로 나보다 법이 나으면 법형法兄으로 모셔야 합니다. 또한 법이 부족한 분일지라도 선진이요, 선배이면 예를 다해 받들고 모실 수 있어야 그것이 법 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성리를 표준하면 심법心法이 나오는 것입니다. 

성리를 아는 이는 밑에서 잘못 하는 것도 마음으로 품어 잘해서 가르치고, 출중한 근기가 오면 크게 인증하고 그 사람이 잘 발현될 수 있도록 도와주고, 비켜주고 힘을 밀어줍니다. 그것이 심법 있는 분의 적공입니다.

[2021. 04. 30. 마음공부24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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