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정도 교무
권정도 교무

[원불교신문=권정도 교무] 『정산종사법어』 생사편 2장에서는 생사거래에 세 가지 근기가 있으니, ‘하나는 애착 탐착에 끌려서 거래하는 근기, 둘은 굳은 원력을 세우고 거래하는 근기, 셋은 마음의 능력으로써 생사를 자유로 하는 근기’이며, 애착 탐착에 끌려 거래하는 근기는 “가고 오는 길에 정견을 하지 못하고 항상 전도되어 닥치는 대로 수생하여 취생몽사하며 원한이나 증오에 끌려 악도에 타락한다”고 했다.

정견(正見)은 바른 견해로, 팔정도(八正道) 수행에 있어 첫 번째가 된다. 모든 수행자는 먼저 반드시 바른 견해를 가져야 바른 생각(正思惟), 바른 말(正語), 바른 행동(正業), 바른 직업(正命), 바른 노력(正精進), 바른 뜻(正念)을 거쳐 바른 선정(正定)에 들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사해탈을 추구한다면 반드시 바른 견해에서 출발해야 완전한 해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무엇을 바른 견해라고 말할까? 석가모니는 그것을 ‘무명(無明)이 끊어진 자리’라 했고, 소태산 대종사는 ‘공적영지의 광명(光明)’이라고 했다. 무명은 명(明)의 반대니, 두 표현은 같은 자리를 말한 것이다.

중생은 항상 ‘무명’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나, 부처는 항상 ‘명’ 자리에서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한다. 그러므로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부처님 눈에는 부처만 보인다고 말한다. 무명은 ‘나’에 집착하는 어리석은 마음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마음공부를 무명 자리에서 시작한다면 평생 ‘아상’만 커질 것이니 조심할 바다. 

따라서 모든 부처와 조사들은 항상 ‘명(明)’의 자리, 곧 ‘나’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은 자리에서 수행을 시작하라고 했다. 이 이치를 알고 수행하는 사람을 견성(見性)한 사람, 모르고 흉내만 내는 사람은 견성하지 못한 사람이다. 

수심결에서는 이 밝은 자리를 알지 못하고 수행하는 사람을 오렴수(汚染修)라고 했다. 더러운 걸레로 하루 종일 부지런히 방을 닦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이처럼 견성은 사실 참 쉬운 것이다. 그런데 어떤 이는 또 견성을 해야 한다고 집착한다. 어딘가 견성이 있다고 집착한다면 그것이 바로 ‘법상(法相)’이다. 집착 없는 마음이 견성인 것이다.

그런데 상근기가 아닌 이상 견성했다고 모든 행동이 갑자기 부처처럼 바뀌지 않고, 또 그것을 항상 잊지 않고 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나’에 대한 집착은 언제 어디서나 불쑥불쑥 고개를 내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대종사는 세상 모든 존재를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은혜’로 보라고 했다. 은혜에는 ‘나’가 없기 때문이다. 

모든 존재를 은혜로 보면서 감사와 보은의 삶을 살다보면 자연히 ‘나’를 잊고 세상에는 은혜만 가득 찬다. 이렇게 ‘나’에 집착 없는 공부가 수월해져야 비로소 생사를 해탈하고 나아가 생사에 자유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영산선학대학교

[2021년 5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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