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덕훈·이선조·이원경 교무, 한상석·조원식 교도(좌로부터)가  광주교당 정문 3층에 있는 범종을 보며 회상하고 있다. 
장덕훈·이선조·이원경 교무, 한상석·조원식 교도(좌로부터)가  광주교당 정문 3층에 있는 범종을 보며 회상하고 있다. 

다시 봄이 오고, 광주 5.18항쟁은 올해 41년째를 맞았다. 이번 5.18민주화운동 특별좌담은 광주교당을 중심으로 우리가 몰랐던 당시 인물과 역사를 재조명하고자  마련했다. 
1980년 5월, 계엄군은 신군부세력 퇴진 및 계엄령 철폐를 요구한 광주 시민들을 무차별 유혈폭력 진압했다. 이로 인해 광주에서는 일반시민·학생·군인 등 다수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군부는 이 사건을 광주폭동으로 왜곡했으며, 1995년 ‘5.18민주화 운동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마침내 광주 시민들은 명예를 회복했다. 

원불교 광주교당은 5.18항쟁이 치열했던 금남로와 도청 가까이 위치해 시민과 함께 했으며, 당시 광주교당 교무·교도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시위에 참여하고, 시민들을 보호하고 희생자를 위한 천도재를 지내는 등 종교인으로서 인도적 활동을 했다. 학생교도와 교도가족 가운데는 5.18민주화운동에 주도적인 역할과 적극적 참여를 한 인물들이 있었으나 이들에 대해 기록되지 않았다. 

오늘날 5.18민주화운동은 재조명되고 있으며, 광주교당의 역할과 원불교인들의 활동을 재발견하여 기억해야 한다. 광주교당은 5.18 이후 41년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민주의 타종을 울리고 희생 영령들을 위한 위령재를 지내면서 5.18의 아픔을 함께 해왔다. 광주교당은 빗발치는 총탄 속에서도 타종을 멈추지 않고 시민들에게 큰 위안을 줬다. 지금도 광주교당 정문 3층에 위치한 범종은 매일같이 광주 시내를 향해 울리고 있다.  

이날 좌담회에는 이원경 원로교무(이하 이), 이선조 영광교구장(이하 선), 한상석 교도(이하 한), 조원식 교도(이하 조)가 참석했다.
 

이원경 원로교무 / 당시 광주전남교구 사무국장
이원경 원로교무 / 당시 광주전남교구 사무국장

5.18 당시 광주교당의 상황
이=5.18이 일어나기 2년 전 광주전남교구로 부임했다. 지역사회와 경제적, 사회적 유대관계를 가지기 위해 어린이집을 개설하고, 신협을 만들어 운영했다. 그렇게 교화의 기반을 넓혀가던 중 5.18이 발발했다. 그 당시 학생들과 청년들은 정의감이 투철했다. 옳은 일은 죽기로써 해야 하고 특히나 원불교인들이 그런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전남대에서 시위가 있으면서 계엄군이 학생들을 구타하고, 그래서 학생들이 시내로 밀려오는데 그런 학생들조차 찾아내 구타하는 장면을 현장에서 많이 목격했다. 교당 앞 통로를 경찰이 지키며 사람들이 도청에 진입하지 못하게 했다. 광주교당 종각 밑에서 시위 학생도, 경찰들도 휴식을 취하곤 했는데 물을 떠다 주고 했던 기억이 난다.

선=1980년 1월에 광주교당에 부교무로 발령받아 왔는데 5월에 5.18이 일어났다. 당시 광주교당 청년들이 교당 어린이들을 학년별로 담당해 공부시키고 어린이 법회를 보조했다. 그런데 어느 날 죄송하다며 군 정부를 몰아내는 것이 더 시급한 것 같다고 항쟁하러 간다고 했다. 청년들 마음이 다 그쪽으로 향해 있어서 반대를 못 했다. 당시 광주에서는 대학생들이 먼저 ‘물러가라, 물러가라’고 데모를 하면 우리 교도들을 비롯해 광주의 전 시민들이 합류하곤 했다. 최루탄이나 총알을 피해 교당에 피신을 오는 이들에게 도움을 줄 수밖에 없는 분위기였다. 그때 석존성탄절을 앞두고 있어서 교당에 쌀이 많이 들어와 있었다. 석존성탄절 때 먹으려고 준비한 미나리 김치, 나박 김치 등이 모두 다 항쟁하는 이들에게로 돌아갔다. 김치를 넣고 주먹밥을 만들어 데모하는 사람들에게 공양했다. 교당 부엌이 주먹밥 공장이었다. 지금도 미나리 김치만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한=5.18의 상징을 세 가지로 본다. 총, 피, 주먹밥. 그 당시 시위하는 젊은 사람들 누구에게나 주먹밥을 줬다. 시민들을 위해 원불교에서 주먹밥을 제공한 것이다. 시민뿐만 아니라 상무대 군인들 역시 먹을 것이 없었다. 당시 광주교당 교도의 조카가 군인 가족이 있었다. 상무대에도 먹을 게 없다며 교당에 도움을 요청하자 밥 굶지 말라고 이편, 저편 가릴 것 없이 도움의 손길을 줬다.
 

이선조 영광교구장 / 당시 광주교당 부교무
이선조 영광교구장 / 당시 광주교당 부교무

5.18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교도들
조=5.18 항쟁의 총체적 기획과 조직적 저항을 통해 5.18 항쟁을 만들어 낸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의 중심에는 원불교 교도가 핵심 중 핵심으로 앞장서고 있었다. 이 자리에 함께한 한상석 전남대학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과 고 박관현 전남대학교 총학생회장이다.

한=영광이 고향이다. 어머니가 신앙이 독실하셨고 아버지도 관직에 계시다 보니 교도 회장도 하고 원불교는 나의 모태신앙이다. 학생회 때는 서광주교당을 다니며 광주교당 행사에도 종종 참석하곤 했다. 군대 갔다 복학해서 4학년 때 5.18을 맞이했다. 대체적으로 유신의 분위기 때문에 학생들이 안 나서려는 분위기였다. 2월에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를 만들었다. 지방에 위치한 국립대치고는 빨랐다. 학생회칙을 만들면서 학생회 임원자격을 3학년으로 낮췄다. 3학년 총학생회장을 뽑아야 해서 당시 사회조사반 동아리 활동을 하고 있는 박관현을 발굴했다. 박관현은 어머니가 영광 불갑교당 교도였다. 5월 14~16일 전남도청 앞에서 학생들이 시위했다. 정보과장하고 담판을 지어서 학생과 경찰이 서로 유대가 됐다. 그런데 5.18 계엄군이 들어오면서 5.18 직전까지의 상황과 이후의 상황이 완전 달라졌다. 난 1980년도 연말에 광주교도소에 들어갔고 박관현 군은 늦게 잡혀 들어왔다. 그 당시는 5.18 사태라 했고, 우리를 보고 폭도라고 했다. 그러면서 폭도는 배가 고파야 한다고 일체 면회도 안 시키고 책도 2권으로 소지할 수 있는 수를 제한시키고 운동도 시키지 않을 때였다. 내가 단식투쟁을 하니 공주교도소로 쫓아 보냈다. 그러고 나서 박관현 군이 광주교도소로 들어왔다. 박관현 군도 단식투쟁을 벌이다 열반에 들었다.

선=당시 원불교와 인연이 있는 전팔현 검사가 박관현 사인을 검증하는 담당자가 됐다. 자살인지 단식투쟁을 하다 죽었는지 사인을 밝혀야 하는데 객관적으로 교무님이라면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자문을 구했다. 시신을 조용히 처리해야 할지 아니면 시신을 들고 전라남도 시내를 다 돌아야 할지를 말이다. 이런 사안으로 광주 사람들이 더 화를 내게 만들어야 하는데 종교인으로서 시민들도 가라앉히고, 열반에 든 이도 가라앉혀야 하니까 조용히 시신을 불갑으로 모셔갔다. 지금도 5.18 즈음이 되면 늘 참배를 한다.

한=당시 박관현 군이 총학생회장으로서 좋은 연설들을 했고, 민주항쟁이 끝나고 열반했기 때문에 살아있으면 여러 가지 이야기가 더 많았겠지만 지금은 전설이 됐다. 

조=학원자율화추진위원장, 총학생회장에 이어 동아리연합회장도 원불교 학생교도였다. 80년 당시 학생운동의 중심은 학과가 아닌 동아리였는데 전남대 원불교학생회 회장이 전남대 동아리연합회 회장을 맡았다는 점에서 전남대 원불교학생회가 전남대 학생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원불교 학생교도들이 학생운동을 주도하고 있었기 때문에, 학생교도들이 광주교당을 거점으로 연락하거나 모이거나 하며 다른 동아리 학생들에 비해 5.18항쟁 시위대에 매일 다수가 조직적으로 참여했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원불교 교도들이 금남로, 충장로, 광주천, 전남여고 앞 도로, 동계천, 계림로타리 등의 여러 지역에서 5.18 항쟁에 적극 참여했는데 광주교당, 동광주교당, 서광주교당 등의 교도들이 적극적으로 많이 참여했다.

한=당시 영산성지사무소장이었던 김현 교무가 광주 미국문화원 방화사건에 연루된 학생을 숨겨줬다고 신발도 제대로 못 신고 평상복 차림으로 끌려갔다. 엄청난 고문을 당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가톨릭에서 그런 일이 있으면 난리가 난다. 성직자인데 최소한의 법복을 입을 수 있도록 배려가 필요했는데, 그 사건 이후 총부를 비롯해 교단에서 어느 누구하나 그럴 수가 있냐고 나선 적이 없었다. 성직자가 끌려갔는데 교단적인 대처가 없었다는 점이 아쉽다. 이것은 굉장히 잘못된 것이다. 최근 사드 관련 소성리 문제, 영광 원전 문제 등에서도 의식있는 교도들은 나서고 있지만 교단의 분위기, 특히 총부의 분위기는 가급적 멀리하고 개입도 안 하려는 듯 하다.
 

한상석 교도 / 당시 전남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
한상석 교도 / 당시 전남대 학원자율화추진위원회 위원장

이=5.18 후 한 달이 좀 지나서 상황보고를 해야 해서 총부에 갔다. 그런데 총부에서 전혀 나의 이야기를 믿지 않고 폭동이라고만 생각했다. 방송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회를 전복시키기 위해 하는 것이라 생각해 답답했다. 왜 시국 인식이 그럴 수밖에 없는지 안타까웠다. 그래도 교단의 젊은 층은 정의감이 있는데 어른들은 그런 것이 부족했다. 1900년 전후해서 이쪽 남도가 동학이라던지 강증산, 대종교 등 엄청나게 정부에 저항해서 거의 전멸하다시피 했다. 동학운동에서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교단 어른들은 그런 처절한 상황을 많이 봤기 때문에 인식이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나 생각이 든다. 

선=광주사태가 의롭지 못한 것이라고 확실히 가리를 내주는 어른이 없었다. 교단이 무너지면 안 된다, 그것 때문에 무너지면 선진님들과 대종사님의 본의가 꽃피지 못할 수 있다는 교단에 대한 애착 때문이지 않을까 싶다. 한편으로는 대종사님의 생명관은 다른 것이었던 것 같다. 대종사 당대에는 한 사람도 희생시키지 않고 제자들을 지켜왔다. 다른 종교는 순교자들이 있다. 순교를 통해 종교의 생명을 지켜왔다. 하지만 새로운 종교에서는 누구를 희생해서 종교가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의 제자도 희생시키지 않는 대종사님이 지켜온 생명관을 우리가 지켜온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그것이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에 대한 위안이 됐다.

 


5.18 위령재와 광주교당 종각
조=광주교당 교무와 교도들은 도청 상무관에서 희생 영령에 대한 천도재를 민주항쟁 기간 내내 거행했다. 원불교에서는 5.18 당시 희생된 영령들을 위한 위령재를 5.18 민주항쟁 때부터 40년 넘게 이어오고 있다. 현재는 5.18 당일 오후 민주묘지에서 위령재를 진행하고 있다. 

이=당시 교당 대문 밖에 나가보면 시내 여기저기에 사람들이 죽어 있었다. 계엄군들이 시체를 상무관으로 다 집결시켰다. 상무관에 가면 처참하게 죽어 있는 사람들이 전부 다 늘어져 있었다. 민심이 흉흉하니까 수습해야 하는데 사람들 볼 때는 못하고 아침 저녁으로 상무대에 가서 묵념하고 천도재를 지냈다. 

조=광주교당에서는 매일 타종을 하는데 총알이 빗발 침에도 불구하고 목숨을 걸고 계속 타종을 해 시민들의 불안을 달래주기도 했다. 교당에서 죽음을 무릅쓰고 종각에 올라 타종한 것은 시민들이 계속 타종해주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그 당시만 해도 높은 건물이 별로 없어서 광주교당의 종각 높이면 계엄군 눈에 종각에 오르는 교무님들이 한눈에 다 들어왔을 것이다. 

선=5.18이 일어나니까 혹시 종을 치다 총에 맞을까 종 치는 것을 쉬었다. 여기저기 총음이 들리고 총 맞고 우는 소리가 들렸다. 인근 공원에서는 공포탄이 날라왔다. 그런데 앞에 학원가에 있는 학부모가 전화를 했다. 교무님이 종을 쳐줘서 안심을 얻고 살았는데 왜 원불교에서 종을 안치냐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우리는 종이라도 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은 좌선복을 안 입는데 그 당시에는 솜으로 두툼하게 만들어 몸을 둘러싸는 좌선복이 있었다. 총알이 빗발쳐서 좌선복을 뒤집어쓰고 종각에 올라 타종을 했다. 처음에는 무서웠는데 나중에는 종을 치고 나니까 시원했다. 내가 총을 맞더라도 이 종을 치고 죽는다는 생각에 뿌듯했다. 그러니까 그 자모가 종소리를 들으니까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했다. 5.18을 지킨 민주의 종이었다. 

조=5.18 당시의 원불교 항쟁 활동에 대해서 원불교 전체 차원에서 가장 의미 있는 추모 및 기념 행사는 5.18 당시 죽음을 무릅쓰고 광주교당 종각에 올라 시민들을 위해 타종 소리를 널리 들려준 민주의 타종과 5.18 이후 희생자들을 추모해온 위령재 행사라고 할 수 있겠다. 
 

조원식 교도 / 당시 전남대 학생, 시위대 행동대장 , 『원불교, 남도와 만나다』 저자
조원식 교도 / 당시 전남대 학생, 시위대 행동대장 , 『원불교, 남도와 만나다』 저자

교단의 향후 과제
한=교단 전체적으로 5.18을 어떻게 보느냐에 대해 아직 정리가 안 됐다는 생각이다. 5.18항쟁, 6월항쟁 등 민주화운동 전체에 대한 교단의 입장이 서야 한다. 

조=원불교 교사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광주교당은 종각 등 광주시의 근현대유산이자 5.18 관련 사적지로 관심받을 만한 부분이 많다. 광주교당 교도 가운데는 5.18항쟁의 제1선에서 총을 들고 맞서 싸우다가 부상한 분들, 도청에 들어가서 시민 항쟁에 활약한 분들도 있다. 기독교와 가톨릭은 종단 차원에서 5.18 관련자들을 찾아서 홍보한다. 타 종단은 이미 1980년대~90년대 초반에 이러한 작업을 했다. 5.18 민주항쟁에 대한 원불교의 참여·활동·지원 등 진실규명 기록화와 디지털화 사업이 필요하다. 

한=원불교 광주교당에서 이러이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스토리가 좀 붙어야 한다. 교단 차원에서 5.18 관련 원불교인들을 수소문해 집담회를 개최하면 효과적일 것이다. 당사자들이 모여서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 놓을 수 있도록 하고, 작가가 집담회에 참석해서 소재 거리를 스토리로 엮으면 원불교와 5.18이란 글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조=5.18과 원불교의 관계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최소 30명 이상의 구술이 필요하다. 그것을 바탕으로 원불교의 극적인 콘텐츠를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다. 교단에서 5.18의 의미를 얼마나 적극적으로 해석하느냐가 관건이다. 광주교당을 5.18 사적지로 추가시키고, 목숨을 건 종각 타종, 주먹밥 나눔, 시민들의 피신 지원 등 다양한 스토리텔링과 함께 5.18 체험 코스로도 넣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이런 것들이 집약되기 위해서는 인사제도가 개선돼야 한다. 교단발전의 저해 요인 중 가장 근원적인 것이 인사제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와 같은 인사제도로는 지역적인 토착종교가 될 수 없다. 정년까지 이곳에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면 지역사회의 문제를 공부하지 않을 수 없다. 확실한 정신을 가진 사람은 뜻이 있는 곳에서 헌신하게 놓아둬야 한다. 매번 이삿짐을 싸는 인사제도를 바꿔야 한다.
 

진행= 윤관명 seesun@wonnews.co.kr 
정리= 류현진 기자 rhj@wonnews.co.kr

[2021년 5월 1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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