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산 이동안 대봉도
(道山 李東安 1892~1941)

도산 이동안 대봉도(道山 李東安 1892~1941)
도산 이동안 대봉도(道山 李東安 1892~1941)
시창12년(1927) 3월 9일 불법연구회 영춘헌 신축 강당(현 종법실) 앞에서 찍은 병인동선 남자부 기념사진.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이동안 선진.
시창12년(1927) 3월 9일 불법연구회 영춘헌 신축 강당(현 종법실) 앞에서 찍은 병인동선 남자부 기념사진. 뒷줄 왼쪽 두 번째가 이동안 선진.
시창14년 3월 16일(1929) 불법연구회 금강원 앞에서 제8회 무진동선 기념사진. 소태산 대종사 좌측 두번째가 이동안 선진.
시창14년 3월 16일(1929) 불법연구회 금강원 앞에서 제8회 무진동선 기념사진. 소태산 대종사 좌측 두번째가 이동안 선진.

 

회상의 재산 절반을 주고라도
도산 이동안 대봉도가 장티푸스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게 되자 소태산 대종사는 매일 같이 그가 머물던 산업부를 방문해 차도를 살피며 “우리 회상의 재산 절반을 주고라도 그를 살릴 수가 없겠느냐? 재산은 모으면 된다. 그러나 그와 같은 일꾼은 다시 구하기가 어렵다. 누구든지 그를 살려주기만 한다면 우리 회상 재산의 절반이라도 아깝지 않게 주겠다”고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원기26년(1941) 그가 끝내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열반에 들자 “너무 상심하지 마옵소서” 하고 위로하는 제자들에게 “마음까지 상하기야 하리오마는 내 이 사람과 갈리면서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도다” 하고 “그는 우리 회상 초창기에 나의 뜻을 전적으로 받들어 신앙길을 바로잡았고 그 후로 모든 일을 할 때는 직위에 조금도 사량계교가 없었다”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의 발인식을 당해 “도산은 19년을 하루같이 우리 회상을 위해 다방면으로 근무 노력했으니 가는 곳마다 오직 그의 공적이 쌓였고 잘못이란 거의 나타난 일이 없었다. 도산은 직명 같은 것에 끌리는 일이 없었다. 총부의 부장이나 지부의 부장이나 보화당이나 산업부나 기타 무엇이든지 시키는 대로 절대복종했다. 시골이나 도회지나 지방의 좋고 나쁜 곳도 택하는 일이 없는 그야말로 모범적인 전무출신이었다. 자신의 가정에 대해 반드시 도와줘야 할 일 이외에는 절대 끌리지 않고 날이 오래고 달이 깊어갈수록 오직 우리 회상의 발전만을 위해 걱정하고 노력했다”며 그의 일생을 기렸다. 소태산 대종사가 천도 설법을 하던 도중 말을 잇지 못하고 소리 내어 흐느끼자 대중들 또한 슬픔을 이기지 못해 대각전 마루에 막 뒹굴었다.

묘량수신조합 창설의 주역
새 회상 창업기에 보화당을 설립하는 등 교단 경제의 기반을 튼튼히 한 교단 사업계의 주역, 고매한 인품과 독실한 신성을 겸전하고 영육쌍전의 모범을 보인 도산 이동안 대봉도. 그는 1892년 12월 22일에 전남 영광군 묘량면 신천리에서 부친 향산 이장운 선생과 모친 중타원 김남일화 여사의 5남 2녀 가운데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천성이 인자하고 세밀해 타인의 세정을 잘 알아줬으며 감화력과 포용력이 풍부해 지도자의 자질을 갖추고 있었다. 원기3년에 8촌 형인 일산 이재철 종사의 인도로 소태산 대종사를 친견하고 그 비범함에 감복해 알뜰한 제자가 됐으며, 이후 소태산 대종사의 지도로 원기5년 ‘묘량수신조합’을 설립해 고향인 신흥 마을의 경제적 자립을 세우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초기에는 길룡리저축조합을 본받아 소비 절약과 근검저축으로 생활 개선과 자립운동에 앞장섰으나 어느 정도 자금이 확보되자 저리 융자, 농사 방법 개량, 황무지 개간, 신정 예법을 통한 생활 개선과 도덕운동을 펼쳤다. 또한 조합 회실을 이용해 야학을 실시해 배움의 기회를 넓혀갔다. 원기9년 큰 흉년을 당해 묘량수신조합이 중심이 돼 좁쌀 수십 섬을 만주에서 사들여 왔는데 이듬해 봄 가격이 크게 폭등해 상당한 이익이 발생했으나, 도산은 조합원들에게 수입 당시 가격으로 나눠주게 함으로써 모두가 춘궁기를 무탈하게 넘길 수 있도록 도왔다. 이 일로 신흥 마을 인근에서는 묘량수신조합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졌고 도산 대봉도에 대한 지도자적 역량이 널리 알려지게 됐다.

그러나 도산 대봉도는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원기8년 만 31세의 나이로 식솔들을 아우에게 부탁하고 전무출신의 길에 들어섰다. 그의 입교로 친동생인 응산 이완철 종사를 비롯한 많은 가족이 그의 뒤를 이어 출가를 함으로써 그 일족이 원불교 명문가를 이루는 계기가 됐다. 원기9년 익산 보광사에서 열린 불법연구회 창립총회에 영광 대표인 한 사람으로 참여했던 도산 대봉도는 본격적으로 새 회상 건설에 참여하며 직접 농사를 짓기도 하고 엿장사 등을 하면서 초기 교단의 물질적 토대를 만드는 데 힘썼다. 엿장사 당시 한 번도 행상을 해본 경험이 없었던 그는 쑥스러움 때문에 도무지 엿을 사달라고 외장을 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을 해낸 것이 따라다니는 아이들에게 엿을 떼 주고 대신 소리를 치게 하는 것이었고 그 덕분에 가지고 간 엿을 다 팔 수 있었다.

당시는 회상 창립의 초기라 의식의 곤란은 물론 정신 육신의 노고가 자심(滋甚)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밤이면 청법의 환희와 진리연구에 몰두해 이른바 주경야독의 근로정신으로 일반후진의 모범이 됐으며, 그러한 정신이 계승돼 훗날 산업부가 구성될 수 있었다. 도산 대봉도는 후에는 소태산 대종사의 명을 받들어 불법연구회 초대회장이었던 김제 추산 서중안 대호법이 경영하는 한약방에서 실무를 보면서 뒷날 공익 후원 기관인 보화당을 일으킬 역량을 길렀다. 

보화당 창설과 정도 경영 
그 뒤 도산 이동안 대봉도는 상조부장을 거쳐 육영부장 겸 공익부장을 지내면서 공익 후원기관이 필요함을 절감하고 보화당을 세울 것을 주장해 일산 이재철 대봉도, 공산 송혜환 대봉도와 더불어 창립발기인이 됐다. 즉 원기19년(1934)에 중앙총부 공익부에서 자본금 1만여 원을 투자해 합자회사인 ‘보화당’을 이리 본정 1정목(현재 인화동)에다 창설해 교단 산업계의 선구자 역할을 했고, 신용과 정성을 신조로 손대는 사업마다 번성시켜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교단 기초를 닦았다. 보화당 감독 또는 전무이사 등의 직책으로 보화당 운영의 책임을 맡은 도산 대봉도는 박리다매의 원칙으로 질이 좋은 약재를 썼고, 좋은 약재를 쓰기 위해 무역선을 전국 유수한 대도시 약포마다 서로 연락해 상통했으며, 멀리 중국 각처까지 취인선을 둬 약재를 직수입하기도 했다.

도산 대봉도는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을 신조로 상하구별 없이 누구를 대하든 그 특성을 알아 자비롭게 지도했다. 보화당 약방을 처음 시작했을 때 모든 손님을 인격과 인정으로 감화시켜 한번 온 손님은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도산 대봉도는 건재를 매입할 때는 저울이나 품질을 따지기보다는 상대방을 철저하게 믿고 샀다. 약재를 팔 때도 상대방의 인격을 신용해 곧잘 외상으로 물건을 내줬다. 그는 매년 비축해 놓은 건재약을 재고 정리하고 조금이라도 썩거나 불량제품이 발견된 때는 귀중품이라도 고객들이 보는 앞에서 가차 없이 소각시켰다. 비싼 약을 불태워버렸다는 소문이 돌자 사람들은 보화당을 신임하게 됐고 날로 매상이 증가하고 시설이 확장돼 그 전도가 양양해졌다.

영육쌍전 실천의 화신불
도산 대봉도는 보화당을 창설한지 만 5년 뒤인 원기24년 보화당 전무이사직을 놓고 공익부장 겸 육영부장에 다시 복직했고, 원기25년에는 산업부장으로 전임됐으며 수계농원을 창설했다. 산업부장으로 재직 시, 그는 일하러 온 인부들에게 그냥 일만 시키지 않았다. 그들의 근기에 맞게 법문을 쉽고 적절하게 이야기해 주어 일하는데 재미를 붙이게 했다. 그는 사업상의 외교를 할 때 상대편의 시비와 모략을 오직 성실과 덕으로 감화시켰고, 근심과 괴로움을 가진 후진을 보면 새 힘과 용기가 나도록 격려했다. 아랫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 쓸 줄 알았던 도산 대봉도는 늘 “비록 한 가지 재주도 가진 것이 없더라도 남의 재주를 발양해서 잘 쓸 줄 알면 열 가지 백 가지 재주를 지닌 사람보다 더 위대한 인격자다”고 말하곤 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전무출신의 가정이 잘돼야 공사에 지장이 없을 것”이라며 어려운 전무출신들의 사가(私家)를 틈틈이 보살펴 주었으며, 최소한 1년에 두 번은 고향에 내려가 일가친척들을 교화했다. 그가 고향에 왔다 하면 온 동네 사람들이 도산 대봉도가 창립한 신흥교당에 모여들었고, 그동안 이웃 간의 불화라든지, 부부싸움이라든지, 사업상의 일이 잘 안 풀린다든지 하는 모든 문제를 다 해결해 줬다. 이렇게 도산 대봉도는 처한 그 자리 그 자리가 교화의 장이었고 모든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자비와 지혜, 용단과 지조 이 모두를 두루 갖춘 큰 인물이었다. 그는 신의를 소중히 여겼으며, 공중사를 중히 여기고 박리다매의 원칙을 철저히 지켰다. 또 사업을 하면서도 교화와 교육을 위한 일환으로 영육쌍전의 정신을 실행했으며, 덕불고 필유린(德不孤必有隣), 이소성대(以小成大)는 천리의 원칙이란 표준으로 공부와 사업을 했다.

원기26년 교단의 중진으로 한창 일할 나이에 그가 49세를 일기로 열반에 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도산 대봉도의 정신을 계승해 윤타원 이정만 정사, 성타원 이성진 종사, 예산 이철행 종사 등 3남매가 전무출신의 길을 걸었으며, 그 후손들이 대를 이어 전무출신의 길을 걷고 있다.

 

도산 이동안 대봉도 약력
1892년 전남 영광 묘량 출생
원기 9년 일산 이재철 종사 연원으로 입교
원기 9년 출가
중앙총부 주요 요직 두루 역임
원기 19년 보화당 창설
원기 20년 도산 법호 증여
원기 26년 산업부장으로 봉직 중 
49세를 일기로 열반


정리 오정행 교무ㆍ경장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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