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61년 UN석포교당 창립주
기도와 수행이 전부인 삶
교당에 오면 다 된다는 믿음

신영도화 UN석포교당 교도
신영도화 UN석포교당 교도

[원불교신문=이은전 기자] 대종사는 전무출신이란 ‘정신과 육신을 오로지 공중에 바친 터인지라, 개인의 명예와 권리와 이욕은 불고하고, 오직 공사에만 전력하는 것이 본분’인 사람이라고 했다. 영타원 신영도화(靈陀圓 辛靈度華·84·UN석포교당) 교도는 개인의 명예와 권리와 이욕은 불고하고 정신을 오로지 공중에 바쳤지만 육신은 공중에 바치지 못한 재가교도다. 원불교를 늦게 만나 이번 생은 전무출신을 못했지만 다음 생은 반드시 출가해 공중사만 하리라 서원을 세웠다. 

전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몰라도 이 법을 얼마나 갈구했던지 우연히 친구를 따라 갔던 청학교당에 들어서는 순간 모든 마음이 녹아버렸다. 원불교를 처음 만났음에도 오래 전부터 앉아있었던 곳처럼 편안했고 그 기운이 그렇게 맑을 수가 없었다. 평소 찾아다녔던 절과 달리 일요일이면 법회가 열려 공부도 시켜준다니 더 좋았다. 그때가 올망졸망 아직 어린 아이 셋을 키우던 그의 나이 서른아홉, 원기61년으로 45년 전이다.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었습니다. 교당의 기운이 좋아 저절로 마음이 끌리더라구요. 교무님이 얼마나 좋은지 자꾸만 교당에 가고 싶었어요.” 그렇게 몇 번 가다보니 집은 대연동인데 아이 셋을 데리고 영도까지 법회 보러 다니기가 현실적으로 너무 어려웠다. 교당은 가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교무님께 토로하니 집 근처에 교당을 세우면 출장법회를 오겠다고 했다. 

더 이상 머뭇거릴 필요 없이 바로 집 근처 상가를 임대해 교당을 열었다. 떡하니 문은 열었으나 올바른 교도 한 명 없어 아는 사람 집집마다 들러 설거지가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교당에 데리고 왔다. 그렇게 여섯 명으로 첫 법회를 지도했던 사람이 김광인 청학교당 초대 교무다. 그때부터 얼마나 정성을 쏟았는지 모른다. 교당의 주인이 되고 보니 모든 것이 내 손에 달렸다 싶어 자나 깨나 교당을 살리는 일 밖에 다른 관심은 하나도 없었다.

“이 교당이 잘못되면 어쩌나 싶어 산으로 들로 다니며 교당 기도만 했어요. 개인적인 기도는 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신심이 아직 없는 교도들이라 한 명이라도 안 나올까 싶은 마음에 하루도 교당을 쉴 수가 없어 매일 나갔습니다.”

근처에 교당이 있는데 왜 다시 교당을 내냐고 시비하는 사람들이 많아 마음을 끓였다. 몇 번이나 간판을 뗐다 붙였다 했다. 자고 나면 항의하는 사람이 찾아와 교당을 피해 산으로 기도하러 다닐 때도 많았다. 
 

‘아침기도의 노래’ 부를 때마다 
영생이 이대로 다 이루어질 거라는
 믿음으로 행복해요


“그때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납니다. 얼마나 힘들었는지 몰라요. 그냥 오로지 교당을 내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습니다. 교당 만들어서 내가 잘된다 어쩐다는 생각은 하나도 안떠올랐고 그저 사람들이 많이 와서 여기서 공부하면 그것이 좋았어요. 수많은 아이들이 법명 받아갔어요. 큰 법사님께 진리의 이름인 법명을 받아가는 것이 얼마나 복입니까. 그것이 보람입니다.” 

그렇게 눈물을 쏟으며 지켜낸 교당이 점차 안정을 찾으면서 교도들이 늘어났다. 많이 올 때는 그 좁은 곳에 100명까지 다닥다닥 모여앉아 법문을 듣기도 해 이제는 마음을 놓아도 될 것 같았다. 특히 신자연 교무가 근무하던 15년 동안은 학생·청년회가 활성화 돼 얼마나 뿌듯한지 몰랐다. 교무와 교도가 한마음으로 합력해 교당을 살리기 위한 기도에 매달렸다. 천도재도 줄을 이었다. 

“하루 종일 교당에서 살았어요. 교무님과 똑같은 생활을 하다 보니 기도와 좌선이 몸에 붙어 머리가 맑아지는 느낌이 강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어떤지 몰라도 영가들이 자꾸만 찾아와 호소했고 그 말을 전해 듣는 사람들이 다 교당에 천도재를 부탁했어요.”

교무님과 밀착돼 모든 생활을 함께 하면서 이름만 재가교도이지 생활은 전무출신이었고 처음 교당을 낸 창립주가 되다보니 자연스럽게 서원도 중생제도가 돼버렸다. 우리 교당에 나오는 모든 교도들이 잘됐으면 좋겠고 이 사람들과 인연된 모든 사람들이 다 잘되기를 바라는 것 밖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오로지 기도에만 매달렸다. 

“교무님이 앉으시면 나도 앉고, 교무님이 기도하시면 나도 기도하고, 교무님이 산책하시면 같이 산책했어요. 교무님과 함께 생활하던 15년 동안 아침기도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어요. 나에게 수행이 몸에 붙게 해주신 분, 내 삶의 가장 큰 스승이 신자연 교무님이십니다.”

올해 초에 대상포진으로 오래 동안 고생할 때도 매일 교당에 왔다. 온 몸이 아파 앉지도 눕지도 못하고 밤을 꼬박 새우며 고생하면서도 교당에 나와서 기도했다. 

“교당에 왔다 가면 몸이 개운해집니다. 사람들이 그걸 모르더라구요. 교당에 와서 기도하면 아픈 몸도 낫고 집안 우환도 해결되고 다 잘 풀리는 걸 주변 인연들에서 수도 없이 확인했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교당 안 나오는 사람들 보면 안타깝습니다.”

다음 생은 결혼하고 아이 키우는 인간 세상일은 그만하고 싶고 총부에서 살고 싶다는 말을 했더니 그게 바로 전무출신이라고 해석들을 했다. 교당이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은 이후로 중생제도에서 세계 사업으로 바뀐 서원과도 맞아떨어진다. 평생을 기도로 살아온 그가 가장 좋아하는 성가는 ‘아침기도의 노래’다. 

“45년간 불렀어요. 아침마다 이 노래 부를 때면 모두 이대로 될 것이다 싶어 너무 좋아요. 기도생활 해보면 빠르다 늦다 시기 문제이지 다 이루어집디다. 평생 기도를 안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싶어 아찔합니다. 기도가 내 전부입니다.”

거룩하신 법신불 사은이시여! 
오늘도 건강한 몸 맑은 맘으로 
부지런히 부처님 길 닦게 하소서, 
오늘도 고마운 맘 고운 말씨로 
인연마다 화한 꽃이 피게 하소서, 
오늘도 좋은 세상 이루기 위해 
모두 함께 보람찬 일 하게 하소서.

[2021년 6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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