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우진 교학대 서원관 교무

송우진 교무
송우진 교무

대종사님 성탑에서 하나이신 여섯 분
매일 아침 성탑을 돌며 기도를 올리다 보면 대종사님과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이 무척이나 그리워집니다. 지금 이 순간 곁에 계셨다면 어떤 말씀을 해 주셨을까. 어서 성불하라고 다독이며 힘내라고 해 주셨을까. 맡은 바 임무에서 보은을 열심히 하는 모습에 칭찬을 해 주셨을까. 게을러지고 삼독심에 흔들리는 나를 보며 호되게 꾸지람을 하셨을까 생각하게 됩니다.

대종사님을 떠올리면 저는 법당 한곳에 계시던 둥근 성안이 그려집니다. 대각을 이루시고 당신께서 신앙의 대상이 되지 아니하시고 법신불 일원상을 천명하시어 모든 중생들에게 미륵불 용화회상으로 가는 큰 길을 열어주신 주세불 대종사님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그리워지는 이즈음.

지난해 육일대재가 떠오릅니다. 원기105년 육일대재는 특별했습니다. 종법사님과 좌산상사님, 경산상사님께서 함께하셨기 때문이었죠. 세 분 스승님을 모시고 기념식을 하는 내내 행복했고 마친 후 좌산상사님, 경산상사님, 전산종법사님께서 대종사님 성탑, 정산종사님 성탑, 대산종사님 성탑에서 심고 올리고 활짝 웃으시던 그 모습은 지금도 눈에 선명하고 영원히 잊혀지지 않을 감동의 모습이었습니다. 

이 여섯 분의 스승님은 무엇으로 하나가 되시었을까요?
 
대각전에 봉안 된 심불 일원상
원기20년 4월 총부 대각전이 준공되고 그 정면 불단에 심불 일원상을 정식으로 봉안했습니다. 이를 교사에서는 새 회상이 신앙의 체계를 확립해 종교의 체제를 완전히 갖춘 또 하나의 중대한 사실이라고 밝혔습니다. 새 회상의 신앙의 대상을 일원상으로 확정 시행하신 것입니다.

이는 주세불이신 대종사님께서 신앙의 대상으로 서지 않으시고 진리 당체를 드러내 주신 일대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총부 대각전에 심불 일원상을 봉안한 후 대종사님께서는 불법연구회(원불교 초기 교단명)의 모든 교당에 차례차례 일원상을 봉안합니다. 초량교당, 영산 대각전, 신흥교당, 용신교당, 원평교당에 불단을 마련하고 일원상을 봉안하고 뒤이어 모든 교당도 불단을 신설해 일원상을 봉안하게 하셨습니다. 동시에 설법 혹은 법문으로 일원의 종지를 천명해오시다가 원기23년 ‘심불 일원상 내역급 서원문(일원상서원문)’을 친제 발표하십니다. 그렇게 일원상은 새 회상의 최고 종지로서 신앙의 대상과 수행의 표본이 된 것입니다.

일원상을 모본하라
일원상에 관련된 많은 법문이 있지만 그중 제가 참 좋아하는 법문은 원기22년(1937년) 회보 40호에 실린 ‘일원상을 모본하라’입니다. 익산교당 대각전에서 하선 해제식을 거행하며 대종사님께서 법좌에 오르시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 이제 간단히 우리 공부법을 가지고 저 세상에 나가서 연락 사용하는 방법을 말하여 주리니 그대로 실행하여 볼지어다. 제군은 그동안 심불 일원상 즉 사은의 내역을 배웠고, 따라서 신앙하고 숭배하였다. 그러면 오늘부터라도 집에 가거든 그 일원상(원형)을 조그마하게 하나씩 만들어서 몸에다 지니든지 벽에다 붙이든지 하고 행주좌와어묵동전간에 오직 일원의 공한 자리만을 생각하여 사심 잡념을 떼어버리라. 그런다면 곧 일원상을 체받는 것이 될 것이니, 비하건데 글씨 배우는 아이들이 선생의 체줄을 보고 그대로 쓰듯 그 일원의 원만무애한 모형을 본떠보라는 말이다. 

먼저 일원상을 숭배하기로 하면 형편에 따라 가장 가까운 곳에 모셔두고 체받아 사용하라는 말씀입니다. 당시에는 비단에 수를 놓거나 종이, 베에 일원상을 그려야 했겠지만 요즘 우리 옆에 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물질개벽의 상징인 스마트폰이 있습니다. 항상 지니고 다니는 이 스마트폰에 일원상을 촬영하고 바탕화면에 고정시켜 두었습니다. 스마트폰을 꺼내 무언가 할 때마다 일원상을 보게 되는 것이죠. 참 좋더라고요. 둥근임께서 언제나 제 곁에 계시며 저를 지켜주는 느낌입니다.

행주좌와어묵동전간에
오직 일원의 공한 자리만을 생각하여
사심 잡념을 떼어버리라.

그렇게 가까이 모셨으니까 일원상을 볼 때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휴대폰을 꺼내 일원상을 바라보기만 하면 별 의미가 없겠죠. 내 마음이 둥글게 느껴지지 않을 때마다 어느 때든지 보고 대조해 원만한 일원상을 체 받아 닮아가야 합니다. 이어서 이렇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를 들면 무슨 일을 하다가 하기 싫은 사심이 나는 것은 일원상을 위반하는 마음이니, 그런 때에는 즉석에서 그 사심을 물리치고 오직 온전한 한 마음으로 그 일에 전일한 것이 일원상을 체받는 것이요, 또는 불의의 재물이 욕심난다든지, 부당한 음식이 먹고 싶다든지 하거든 곧 그 욕심을 없애 버리고 오직 청렴한 마음으로 전환시키는 것이 일원상을 체받는 것이며, 혹은 가족을 대할 때에도 미운 데에 마음이 끌린다든지 사랑스러운 데에 끌려서 중도를 잃는다면 일원상하고는 어긋난 일이니 오직 증애심을 놓아버리고 항상 원만공정히 하는 것이 일원상을 체받았다고 할 것이다.

마음에 쏙쏙 들어오시나요. 아주 쉬운 말씀으로 일원상을 어떻게 체 받는지 설명해 주시지요. 우리가 늘 마음을 사용하고 살아가는데 어떤 경계를 당할지라도 일원상과 같이 원만하게 마음을 쓰라는 말씀입니다. 

살다 보면 하기 싫은 일도 많고 탐심도 많이 나고 화나는 일도 매우 많습니다. 그렇게 오욕과 삼독심은 우리 둥근 마음을 어긋나게 만들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겐 대종사님께서 드러내 주신 진리 당체, 나의 본래 모습이자 나의 참마음인 일원상이 있습니다.

살아가면 반드시 만나게 되는 수많은 경계 속에서 우리는 오직 일원상을 마음의 표준 삼아 명심해 일원과 같이 공하고 둥글고 바른 본성으로 돌이키는 데 힘써야 합니다. 그러기에 일원상을 모본하라라는 법문은 이 문장으로 마무리됩니다.

제군은 명심하여 억천만사에 일원상을 모본(模本)할지어다.

스승님과 함께 걷는 길
어둑해지고 노을이 붉게 물드는 시간 총부 대각전에 앉아 물끄러미 일원상을 바라봅니다. 원기 20년 4월 익산총부에 대각전이 준공되고 그 정면 불단에 심불 일원상을 정식으로 봉안하며 대종사님께서는 어떤 감상이 드셨을까요.

대각 후 영산에서 방언공사하며 법계인증을 받은 순간들, 변산에서 새 회상의 새 교법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고민했던 순간들, 익산에서 창립총회를 하고 총부 기지를 건설하고 전무출신들과 새 회상을 만들어가며 간고했지만 행복했던 시간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가지 않으셨을까요. 그렇지만 무엇보다 일원의 진리가 천명됨으로 모든 중생들이 미륵불 용화회상으로 갈 수 있는 큰 길이 열렸음에 가슴 벅차셨을 것입니다.

여러분은 일원상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시나요. 땅거미가 내릴 무렵 교당에 온다면 한번 법당의 불을 끄고 물끄러미 일원상을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아 불단의 일원상이 희미해지고 고요가 찾아오면 짙은 어둠 속에서 마음의 일원상이 환희 빛나는 순간이 올 것입니다. 그 순간 심불 일원상을 바라보며 심인으로 일원과 하나이신 원각성존 소태산 대종사님을, 정산종사님을, 대산종사님을, 좌산상사님, 경산상사님, 전산종법사님과 우리 교단의 스승님들을 차례로 떠올려 보세요. 

내 본래 모습이 스승님들과 하나인 심불 일원상임을 확인하세요. 우리 함께 억천만사에 둥근 일원상을 모시고 본받아서 참 일원을 발견하고 나투며 스승님들 가는 길을 뒤따르겠다 서원합시다. 

그러면 대종사님께서 잘했다 잘했다 칭찬해 주시고 정산종사님, 대산종사님과 손잡고 둥근님의 빛 속에서 성불의 길을 걷고 있는 행복한 꿈을 꿀 수 있을 것입니다.

[2021년 6월 4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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