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기67년 현 교당 부지에 30평의 교당을 지었고 원기80년 신축하며 현재 무안교당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원기67년 현 교당 부지에 30평의 교당을 지었고 원기80년 신축하며 현재 무안교당의 모습을 갖추게 됐다.

[원불교신문=권원준 기자] 드넓은 갯벌 앞에 서 있으니 몇 시간을 달려온 마음이 말랑해진다. 따가운 햇볕 아래 시원한 바닷바람이 무척 반갑다. 이곳이 주는 고요함과 평온함은 가슴 한켠을 편안하게 한다. 힘쓸 무(務), 편안할 안(安), 무안. 김석원 무안교당 교무는 “무안을 일컬어 수행정진에 힘쓰면 심신의 편안함을 얻을 수 있는 곳이다”고 소개한다. 


40년 역사를 써 내려오며
무안지역 교화의 비상을 위해 날개를 펼친 무안교당을 찾았다. 무안 관내가 한눈에 들여 다 보이는 남산자락에 우뚝 솟은 교당의 모습은 교도들의 자부심이다. 곱게 전지된 나무, 가지런히 정리된 마당, 법의 기운이 가득한 법당. 교당 이곳저곳을 거니는 동안 교도들의 알뜰한 손길이 닿지 않는 곳이 없는 듯했다. 

정성의 도량, 무안교당의 시작은 원기64년이다. 당시 무안에 거주하는 안청도 교도가 출장법회를 제의했다. 그 제의에 당시 박성석 목포교당 교무가 흔쾌히 출장법회를 열어 교화의 씨앗을 심었다. 안청도 교도가 운영하던 여관방 하나를 법당으로 만들었고 원기65년 이성호 초대교무가 부임하며 선교소 인가를 받았다. 이후 낙지 골목의 닭집을 리모델링해 이안봉불을 했고 원기67년에 지금의 교당 자리인 무안읍 성남리 174-1번지에 터를 마련했다. 처음 30평으로 지었던 건물은 원기80년 조제중 2대 교도회장이 1억을 희사해 현재의 건물을 지었다. 40여 년의 세월에 10명의 교무가 다녀가며 교도들과 알뜰살뜰 무안교화의 역사를 써 내려왔다. 

무안교당의 역사와 함께한 신완기 교도회장은 생생했던 당시의 이야기를 전했다. “제 입교일이 원기66년 1월 1일입니다. 당시 닭집이라 불리던 집을 제가 법당으로 리모델링했죠. 그 인연이 저를 원불교로 이끌었습니다. 당시 작은 법당에 50명의 교도가 다 들어 올 수 없어 법당 뒤에 서서 잘 알지도 못하는 성가를 목이 터져라 불렀습니다. 그때 우리 교당이 가장 활성화됐을 때죠.” 신 회장은 당시 활발하던 교화상황을 이야기하며 “현재 제2의 중흥기를 만들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원기104년 교도들이 완도훈련원에서 진행된 교도정기훈련에 참석했다.
원기104년 교도들이 완도훈련원에서 진행된 교도정기훈련에 참석했다.

소통과 화합이 최우선
2년 전 무안교당에 발령받은 김 교무. 당시 교도들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교당역사상 첫 남자교무였기 때문이다. 회장단은 이구동성으로 “남자 교무님이 오신다고 하니 식사 문제, 생활 문제 등 걸리는 것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습니다”면서 “하지만 2년을 모시고 산 지금은 이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라고 말한다. 교도들이 김 교무에게 찐하게 반한 이유가 있다. 김 교무는 교도들과의 관계에서 소통과 화합을 우선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김 교무의 소신이고 교화 철학이다. 이를 바탕으로 교화를 실천하고 있다. “교화의 첫 번째는 챙김입니다. 인연이 닿은 곳은 어떤 식으로든 챙깁니다. 두 번째는 살핌입니다. 인연들을 유지하기 위해 내가 어떤 공부를 하는지, 어떤 방향으로 실천하는지 끊임없이 살핍니다. 세 번째는 실천입니다. 작은 일이라도 교도들과 함께 실천하는 것입니다. 깨달음이 실천이고, 실천이 교화입니다. 결국, 교화는 공부와 깨달음의 실천으로 귀결이 되죠.” 이런 김 교무의 철학은 곳곳에서 힘을 발휘하고 있다.


제 2의 중흥기 만들어
박수은 부회장은 “저희 교당은 매달 전 교도가 참석하는 교화협의회를 통해 교당의 대소사를 결정합니다. 또 법회에 참석하지 못한 교도에게 일일이 설교 동영상을, 1년 365일 법문카드를, 수요기도를 참석하지 못하는 교도에게는 온라인으로 참여의 길을 열어줬습니다. 촌에서 쉽지 않은 일들을 하나하나 다 실현하며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셨어요. 교무님의 챙김, 살핌, 실천이 교도들을 성장시키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김 교무는 교당 운영을 연간계획에 따라 짜임새 있게 진행하고 있다. 특히 교화단 활동을 중심으로 다양한 법회를 기획해 교도들이 자연스럽게 교당으로 발걸음을 옮기게 했다. 매주 전 교도가 돌아가며 강연, 마음공부 감상담을 발표하는 것도 큰 재미다. 첫 주 법회는 생일기도와 월초기도를 통해 가족이 함께하는 법회로, 셋째 주는 보은기도와 차량기도로, 매월 마지막 법회는 특성화 법회와 잠자는 교도를 위한 기도 법회로 진행하고 있다. 일찍이 온라인 법회를 개설해 팬데믹 상황에도 법회의 공백을 최소화 했다. 또 수요교리법회를 통해서는 심도 있는 교리 공부까지 하고 있으니 넓고 깊은 활동을 통해 무안교당 교화에 내실을 다지고 있다. 

또 하나, 기도의 힘을 빼놓을 수 없다. 전 교도가 100일 기도를 진행 중이다. 그런데 특이한 점이 있다. 100일간 하는 것이 아니라 3월 결제부터 11월 28일 해제식 날까지 100일을 하면 되는 것이다. 김 교무는 “기도를 교도들이 부담 없이 생각했으면 하는 바람으로 기획했어요. 이렇게 하니 오히려 동기유발이 돼 매일 하는 분들이 많아 이심전심 된 것 같아요. 평상시 기도를 하지 않았던 교도님도 수요일 만큼은 화상으로 기도를 하고 있어요”라며 기도의 힘이 교당을 이끄는 힘이 되고 있음을 전했다. 

조덕균 부회장의 교무님 자랑이 끊이질 않는다. “넷째 주 법회 때 법의문답을 진행하는데 방송에서 나오는 분들보다 훨씬 더 명쾌하게 답을 주십니다. 저희 한테만 있는 것이 너무 아깝습니다.” “다시 무안교당의 교화가 활성화 되고 있다”는 조 부회장은 “현재 꾸준히 30여 명이 법회를 출석하고 연내 평균 출석 40명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코로나 팬데믹 속에서도 꾸준히 발전하는 무안교당의 상황을 알렸다. 
 

김 교무는 교도들과 끊임없는 소통으로 교당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김 교무는 교도들과 끊임없는 소통으로 교당발전을 이룩하고 있다.

자발적인 교도, 핵심 동력
이러한 교화의 바탕에는 또 하나의 동력 원심회가 있다. 원심회는 교당 임원들의 조직으로 교도들이 활동할 수 있도록 음양으로 교도들을 챙기며 교화의 든든한 기둥 역할을 하고 있다.

신 회장은 “40년을 말로만 교당에 다녔습니다. 요즘 두 달간 아무리 힘들어도 빠짐없이 일기를 쓰며 ‘공부가 이런 것이구나’라고 느끼고 있죠. 이왕 공부하는 것 법강항마위까지는 해야 하지 않겠나 하는 서원을 세웠습니다”라는 바람을 전하며 교도들의 모범이 되고 있다.

무안교당은 지역 사회 교화를 위한 역할도 꾸준히 진행 중이다. 교당 봉공회는 지역 사회를 위한 자원봉사를 비롯해 대각개교절에는 군과 연계해 쌀을 기부한다. 한창일 때는 100가마까지 했다. 또 젓갈 장사를 통한 수익금은 다문화 가정, 노인 그리고 경찰 등에게 물품을 기부하고 있다. 명절대재 때는 소년·소녀 가장에게 장학금과 김치 나누기를 진행하며 지역 사회에 원불교를 알리고 있다. 
 
인구소멸의 길을 가고 있는 지방 도시들과 다르게 무안군은 2012년부터 인구가 꾸준히 늘고 있다. 이제 10만에 육박하며 시 승격을 바라보고 있다. 이에 교도들은 새로운 꿈을 꾼다. 무안의 발전처럼 무안교당의 교화발전도 함께 이뤄지길. 

“우리 교도님 모두가 마음공부를 통해 부처 이루고 주위 인연들에 불법을 실천할 때 원불교는 무안지역에 자연스럽게 전해질 것입니다. 우리가 꼭 그 주인공이 됐으면 합니다.” 김 교무의 간절한 바람이다.
 

김석원 교무는 산악회 활동을 통해 활발한 교화를 이어오고 있다.
김석원 교무는 산악회 활동을 통해 활발한 교화를 이어오고 있다.

[2021년 6월 1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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