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타원 양하운 종사
(十陀圓 梁夏雲 1890~1973)

십타원 양하운 종사
십타원 양하운 종사
대산종사가 종법사에 취임하던 원기47년 사택(현 교정원장숙소) 앞에서.
대산종사가 종법사에 취임하던 원기47년 사택(현 교정원장숙소) 앞에서.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님이시여! 이 세상에 나타난 것은 반드시 숨은 것을 바탕으로 함과 같이 드러난 성자의 배후에는 반드시 숨은 무명의 성자가 있는 것입니다. 대사모님께서는 숙겁의 서원과 인연으로 사부님 같으신 주세성자의 고행 대각 시로부터 회상 창건과 중생교화에 이르시기까지 그 밑받침이 되시고 숨은 보좌역을 유감없이 다하시었으니 그 공덕이야말로 사부님과 우리 회상의 교운으로 더불어 무궁할 것입니다.”


원불교 정토 1호
십타원 양하운 종사 발인식을 당하여 대산종사가 그 영전에 올린 법문이다. 명(明)이 있으면 반드시 암(暗)이 있고 겉(表)이 있으면 속(裏)이 있듯 소태산 대종사의 뒤에는 무명성자로 살다간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가 자리해 있다. 양하운 대사모는 숙세의 인연으로 소태산 대종사의 배위(配位)가 되어 그 뒷바라지는 물론 자녀 양육과 살림살이 등 사가 일을 전담해 소태산 대종사가 새 회상을 건설하는데 오롯이 헌신할 수 있도록 내조의 정성을 다했다.


이번 달에는 일평생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소태산 대종사의 그림자와 같은 삶을 살다 가신 십타원 양하운 종사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십타원 양하운 종사는 1890년 음 12월 3일 전남 영광군 백수면 홍곡리에서 부친 하련 선생과 모친 박현제화 여사의 4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났다. 16세 되던 해 한 살 연하인 소태산 대종사와 결혼해 원불교 정토 1호가 되어 권장부의 삶을 시작했으며 슬하에 3남 1녀의 자녀를 두었다.


하지만 소태산 대종사는 오직 구도에만 힘쓸 뿐 가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나마 가사를 책임지던 시아버지(박회경, 1910년 열반)가 결혼한 지 몇 년 지나지 않아 갑작스럽게 열반의 길을 떠나면서 가사의 책임은 모두 그의 몫으로 남겨졌다. 이른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논밭을 떠날 수 없었고 여름과 겨울에는 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하고 실 뽑고 베 짜는 길쌈 준비로 여념이 없었다. 그야말로 일 속에서 해 뜨고 일 속에서 해지는 날들이 계속됐다.


빼어난 미모는 없었지만 큰 키에 건강한 몸을 타고난 양하운 대사모는 소태산 대종사를 대신해 남정네들이나 할 법한 힘든 일을 척척 해냈다. 한때 소태산 대종사가 부채를 청산하기 위해 탈이파시를 다녀온 일이 있었으나 부채를 청산한 뒤로는 다시 우두커니 병이 도져 밥을 먹다가도 길을 가다가도 정에 드는 일이 잦아졌다. 판수를 불러 경을 읽기도 하고 점을 보기도 하고 무당을 불러 굿도 해보았으나 병세는 나아지지 않았다.


양하운 대사모는 한밤중이면 인적이 그리 많지 않은 후미진 산골짜기에 위치한 개암골 기도터에 올라가 정화수를 떠놓고 사방으로 아홉 자리씩 절을 하고 간절히 빌었다. 


“천하 만물 다스려 잡아서 귀의되기를 바라옵고 복이 무쇠방석으로 되기를 점지해 주소. 우리 처사 양반 소원 풀어주고 병이 나아주기를 비옵고 비옵니다. 비옵고 비옵니다.” 
양하운 대사모는 이렇게 3년간 매일같이 개암골 기도터를 오르내리며 지극 정성으로 천지신명에게 빌고 또 빌었다.

 

빚지지 않는 권장부의 삶
3년간 계속된 간절한 기도 정성의 위력이었을까? 1916년 4월 28일, 마침내 소태산 대종사가 대각을 이뤘다. 운동 부족과 영양 결핍으로 얼굴은 부석부석한데다가 온몸에 부스럼 투성이었던 소태산 대종사의 용모는 하루가 다르게 달라졌다. 초췌하고 병색이 완연하던 용모와 피골이 상접한 몸에 혈기가 돌고 살이 오르고 피부가 윤활해지고 얼굴이 명랑해지면서 영명한 기상이 뭇사람에게 드러나 감복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 무렵 양하운 대사모가 그만 말라리아에 걸리고 말았는데 두질 세질 곤두박질을 칠 정도로 병세가 심했다. 그런데 소태산 대종사가 그에게 담배연기를 훅 하고 내뿜자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병세가 말끔히 사라졌다. 머리가 아플 때는 소태산 대종사가 이마에 손을 짚어주면 말끔히 개었고 배가 아플 땐 토끼 똥을 먹으라 하여 그대로 했더니 낳았다. 그런 일들이 있은 후로 양하운 대사모는 소태산 대종사를 남편이 아닌 스승으로 받들고 모시기 시작했다.


소태산 대종사는 대각을 이룬 뒤 그나마 가지고 있던 집이며 밭이며 가마솥이며 쇠요강까지 모두 팔아 방언공사에 투자했다. 양하운 대사모로서는 이제 마땅히 기거할 집마저 없어져 버린 것이었다. 그러나 양하운 대사모는 방언공사가 시작되자 두말없이 소태산 대종사는 물론 그 제자들과 인부들의 식사 수발에 정성을 다했으며, 원기 9년에는 정식 임원으로 발령을 받아서 2년여 동안 영산교당 식당 운영의 책임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방언공사 당시 사재 전부를 교중에 내놓은 관계로 강변주막과 구간도실 그리고 영산원 아래채 등을 전전하며 생활하다가, 1926년(원기11) 임실 조갑종 가(家)와 익산 송학리를 거쳐 1928년(원기13)에야 소태산 대종사가 머물던 중앙총부 인근 도치동으로 이사를 올 수 있었다. 그러나 여전히 생활 대책은 막연했으므로 배산 인근의 소작답을 얻어 생계를 영위했으며, 노상 동네 품팔이를 다녔고 중앙총부 전답의 김매기나 빨래, 바느질품 등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처럼 양하운 대사모가 마땅히 거처할 집 한 칸 없이 남의 곁방을 떠돌며 논과 밭으로 험한 일을 마다하지 않고 사는 모습을 보고 대중들이 이를 죄송히 여겨 여러 차례 대책 마련을 청했으나 소태산 대종사는 그때마다 빚이 된다며 한사코 이를 만류했다.(『대종경』 실시품 25장 참조) 양하운 대사모 역시 “내가 전생에 남같이 큰 복을 짓지 못했는데 이생에 이 진리를 알고서 대중에게 빚질 수 없다”라며 이를 거절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양하운 대사모는 여자 혼자 몸으로 집안일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분망한 와중에서도 교도로서의 의무는 반드시 지켰고 교중에서 하는 이런저런 행사에는 빠지지 않고 참여하는 열정을 보였다. 어려운 살림살이 속에도 예회 날이면 만사를 제쳐놓고 어김없이 본관으로 달려와 예회에 참석을 했으며 공중사업에도 힘닿는 대로 정성을 다했다. 특히 공부심이 장해 매년 동선기에는 정식으로 입선을 해 여느 입선인들과 같이 공부를 했다.

 

자력생활을 표준으로
여느 해 겨울 날, 양하운 대사모가 두 아들을 데리고 예회를 보고 나오니 진눈깨비가 사정없이 몰아치는 데다가 땅바닥이 질척질척해 내왕하기가 여간 불편하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 나온 두 아들은 제대로 먹이지를 못했는지 얼굴이 꺼칠꺼칠해 남 보기가 안쓰러울 정도였다. 마침 점심때가 됐는지라 제자들은 이런 대사모를 보고 자꾸 식당으로 들어가 식사나 하고 가라며 붙잡았다. 이것을 본 소태산 대종사가 대사모를 불렀다.


“하운이. 밥 먹지 말고 집에 가거라. 빚지지 말고.” 밥을 얻어먹자고 온 것도 아닌데 소태산 대종사로부터 이런 말을 들었으니 부끄럽고 서운할 법도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제자들이 대사모가 참 안됐다며 돌아서서 “하운 사모님이 종사님 말씀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고 이야기들을 했다. 이 이야기를 사람들로부터 전해들은 양하운 대사모는 훗날 “아, 무슨 눈물이 뚝뚝 떨어져? 부끄럽고 또 섭섭해서 눈물이 쪼끔 나오려고 했지” 하고 담담하게 웃어넘겼다.


“내가 공사에 큰 보조는 하지 못할지언정 공사에 전력하는 종사님에게 방해될 일을 해서야 되겠는가. 또는 내가 공중의 물건을 먹을 만한 자격과 가치가 없이 먹는 것은 이 이상 큰 죄가 없는 일이니 나는 종사님의 공사하시는 대로 방해되지 않게 하고 죄도 짓지 아니하고 차라리 삼순구식(三旬九食)을 할지라도 오직 내 힘으로 생활을 하는 것이 이 이상 행복 되고 양심상 편안한 일이 없네.” 양하운 대사모는 이처럼 항상 자력양성을 표준 삼았다.

 


1943년(원기28) 6월 1일 소태산 대종사가 열반했다. 양하운 대사모는 “아이구 이 일을 어째, 아이구 이 일을 어째” 하며 교단사를 걱정했다. 그러나 소태산 대종사의 열반에도 불구하고 교단은 한결같이 발전했다. 십타원 양하운 대사모는 자녀들이 학업을 마치고 교단과 사회에 봉사하는 것을 보며 수양 정진하다가 1973년 1월 7일 84세를 일기로 열반했다. 장녀 박길선은 송도성과 결혼했고, 장남 박광전은 전무출신으로 원광대학교 발전을 앞장서 이끌었다.

 

십타원 양하운 종사
참고 서적 
박용덕 교무의 원불교 선진열전3
 『구수산 칠산바다』
송인걸 교무의 『대종경 속의 사람들』

 

[2021. 6. 25. 마음공부26호 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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