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흥교당 천형구 교무
하단교당 김형진 교무
대전충남교구 조건중 교무

결국 소통의 부재다

천형구 교무
천형구 교무

이번 새 전서 사태를 보면서 원인제공을 한 사람들은 용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경험 미숙과 과잉욕구가 준 교훈을 깊이 느끼면서 반면교사 삼아야 하겠다.

우리 교도가 묻는다. “교무님! 원불교 교법은 너무 좋아요. 합리적이고 개방적이고 대중적이고 그런데 제도와 운영과 방편을 보면 가장 비합리적이고 가장 폐쇄적이고 가장 개인적인 것 같습니다.” 맞는 말도 아니고 그렇다고 틀린 말도 아니다. 이번 사태로 인해 재가출가들의 사기저하와 함께 신심 하락이 이루 말할 수 없다. 상처받은 마음이 크다. 교도로서 상처 난 자존심을 어떻게 회복시켜 줄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선다. 또 묻는다. “교무님! 신문에 보니까 수위단회 기사를 봤는데 이분들이 진짜 수위단원님들이 맞나요? 이번 사태와 연관이 없는 분들 같던데 책임은 없는 건가요?” 

밖에서 볼 때는 수위단회가 최고 의결기구로서 모든 안건에 대해 치열하게 논의한 후 최종적으로 결정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원의회의 막강한 결정권과 간부회의라는 이상한 행정 편의 조직에 떠밀려 모든 안건을 일사천리로 통과시킨다. 수위단회가 최고의 상위 조직임에도 불구하고 집행기구인 원의회의 결정에 따라 보고만 받고 결의만 해주면 되는 구조가 관행처럼 돼버렸다.

이번 전서 사태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교정원은 일선 교당에 무조건 하달하고 공지로만 끝나는 행정편의 중심에서 벗어나도록 고민해야 한다. 출가교화단을 관리 차원에서 위에서 감시 감독하는 느낌을 주어선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결국 소통의 부재다. 교단적인 긴급사항은 각 항단에서 심의도 하고 검토도 해서 각단에까지라도 충분히 소통되었으면 한다.

교단을 이끌어 가는 두 축이 있다. 하나는 종법원, 교정원, 교구, 지구, 교당으로 이어지는 행정 라인과 종법사, 수위단원, 각항단장, 각단장, 각단원으로 이어지는 공부 라인이다. 확실한 정체성을 만들어가야 한다. 상명하달식의 교화행정업무 라인과 상봉하솔식 공부위주의 라인 모두가 공부위주 교화종이 되는 풍토가 필요하다. 위에서부터 아래로 아래에서부터 위로 소통되는 문화가 되어야 한다. 총부와 교당은 행정중심 이전에 신앙수행공동체이다. 교무는 행정가 이전에 수행자요, 교화자 이전에 신앙인이다. 시대의 조류에 반짝해서 약간의 업적을 이룬 후 중앙총부에 입성하는 그런 방식은 이제 지양해야 한다. 그야말로 교도들의 영적 지도자가 되어 문답감정을 통해서 삶의 문제를 해결해 주고 해오감정을 통해서 욕구를 채워줘야 한다.

이번 새 전서 사태에 많은 사람이 울분을 토해가며 지적을 했다. 집행부는 소중하게 귀담아들어야 한다. 원불교의 강점 중 하나는, 그 사람 아니면 안 될 것 같아도 없으면 없는 대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기흥교당


일은 어찌 되었든 바루어가야 한다

김형진 교무
김형진 교무

세계의 많은 종교의 역사를 보면 대부분 경전(經典)은 구비문학적 요소들이 많았고 또는 구전(口傳)으로 전해졌거나 개개인의 기억에 의지해서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원불교 경전의 근간을 이루는 『정전』은 소태산 대종사가 재세(在世) 시에 이미 『불교정전』을 완정했기에 다른 종교와 큰 차이를 보인다. 『불교정전』 이후 오늘날 우리가 접하는 원불교 전서는 원기68년에 바뀐 내용으로 구성된 내용이다.

이번 원기106년도 개정 증보판 전서의 탄생 역사를 뒤돌아보면 원기103년 수위단회 회의에서 ‘교서 오·탈자 수정의 건’을 결의해 교화훈련부가 실무 업무를 진행해 수위단회의 교서 감수위원회에서 수차례에 걸쳐 감수 작업을 마치고, 교서 편정에 대한 최종 책임이 있는 수위단회에서 인준이 되어 일반에게 공개됐다. 그러나 일반에게 공개되자마자 각종 오자(誤字)와 본문의 뜻이 다르게 읽힐 수 있는 윤문과 함께 『불조요경』의 그림 삽입이 순서가 바뀐 것을 비롯해 상당히 많은 문제가 발견돼 현장에 보급된 전서를 회수하고 폐기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나고 말았다. 

종교에서 경전(經典)의 위치는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중요한 교전 편수의 과정들을 복기해 보면 『대산종사법어』만 하더라도 일찍부터 열람판을 발간해 대중들이 접할 수 있었던 기회와 시간이 나름 충분히 주어져서 많은 부분에서 보완이 이루어졌으나 이번 증보판 전서 발간의 경우에는 대중적인 공람의 기회도 없었고 일반 대중들에게는 더더욱 열람의 기회마저 없이 시간에 쫓기듯이 일이 진행되면서 여러 가지 과정들이 생략되어 진행됐다.

창교 백년이 조금 넘은 교단사를 비롯해 제 종교가에서 경전 발간에 이러한 일이 일어났다는 뉴스를 접해 본 일도 없을 것이다. 경전 발간은 교단 문화적 자산의 축적만큼이나 보편적 시대상을 아우르는 총체적 부분에서 접근해야 하기 때문이다. 일은 이미 일어났고 일어난 일을 어찌 되었든 바루어가야 한다. 일에는 반드시 시비(是非)가 따르고 지도자들은 이 시비이해를 구분해 불의를 징계하고 정의를 세워야 이번 사태가 해결되는 것이다. 대중을 귀히 알고 좀 더디 가더라도 살아있는 공동체 운영이 되려면 공감과 소통을 많은 방면으로 시도해야 할 것이다. 

현장에서 맞이한 이번 전서 사태는 교도님들에게도 참으로 송구하다. 증보판 전서를 소개하고 구매하도록 안내했다가 다시 문제가 생겨 다시 회수하는 일련의 사태가 보편 상식적으로도 이해는 어려운 상황이다. 어떤 사유로 인해 일련의 사태가 발생했고, 교단 지도부가 어떻게 처리해 가는지 대중들은 초미의 관심이다. 이 문제를 풀어가는 것이 교법적이라면 받아들이지 못할 사람이 있겠는가? 이번 사태에 따른 의사결정 라인과 그 실무 업무를 담당한 교정원의 책임 있는 자세를 바란다.

/하단교당


소통 시스템의 필요

조건중 교무
조건중 교무

교서는 어느 종교이든지 아주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원문을 바꿔서는 안 된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그 시대 젊은이들이 손쉽게 읽을 수 있도록 그 시대의 언어로 윤문해야 한다는 의견도 있다. 모두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때문에 교서에 대해 윤문하는 것은 신중에 신중을 기하고 윤문을 해도 원문과 지난 교서를 함께 출판해 사람들이 아울러 볼 수 있도록 한다.

책을 만들게 되면 오자가 없을 수 없다. 그래서 오자 없는 책은 없다. 이번에 전서 새 증보판에 대하여도 사람이 하는 것인데 책임을 운운하는 것은 지나치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그러나 교서를 내는 일은 일반 책을 내는 것과는 다르다. 이번 전서 증보판은 초교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현장 교무들에게 한 부씩 보내서 내용과 오자에 대한 의견을 듣고 또 듣고 고쳐야 한다. 집단지성으로 함께해야 한다. 이러한 최소한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의견에 귀 기울어야한다.

이번 전서 사태와 더불어 지난 중요사안들에 대해서도 대중의 의견을 묻는 듯했으나 실상 일선 현장의 뜻과 달리 밀어붙였다는 생각이 함께 어우러져 교무들에게 더 큰 상실감을 느끼게 하고 있다. 전서 새 증보판 등 일련의 일에 대해 속내를 살펴보면 대중의 뜻이 무시되고 있는 듯한 시스템, 현장 교무들의 의견을 무게감 있게 전할 수 있는 소통의 채널이 없다는 것이다. 

국가 시스템을 예를 들자면 ‘민원사무처리에관한법률’을 행정시스템의 핵심요소로 참고 할만하다. 정부와 기관에 대하여 특정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도록 국민이 요구하고 소통하게 되어있다. 이를 정부나 행정기관에서는 제1의 핵심요소로 삼아 ‘소통시스템’을 끊임없이 변화 발전시키고 있다.

교단의 ‘소통시스템’은 교단 4대를 준비하는 지금 이 시점에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시스템을 만드는 데 필요한 요소는 간단하다. 투입 예산과 인력과 시간이다. 우리는 그 요소를 충분히 갖추고 있다. 교무들의 의견을 한데 모아서 이것을 교정원에 전달하고 교정원은 교무들의 의견을 바탕하여 실행에 옮기는 시스템을 갖추지 않으면 이런 사태는 계속 발생할 것이다. 시스템의 문제이지 개인의 문제가 아니다. 교무들의 의견에 바탕을 둔 ‘집단지성’으로 산적한 교단의 과제들을 해결해 나가야 한다.

전산종법사는 출가단보에서 앞으로의 교단은 대중의 기운으로 가니 공의로 운영해 가야 한다는 내용의 뜻을 밝혔다. 대산종사에게 한 기자가 “‘귀교의 운영 방침은 무엇입니까’ 하고 여쭈니,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공의를 생명으로 아는 수위단회를 중심으로 한 공화제도로 교단을 통치하고 있느니라’”라고 답했다. 공의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소중한 생각을 모두 담은 대중의 뜻이다. 공의는 몇몇 분들의 뜻이 아니다. 대중의 뜻은 대중만이 알고 있다. 대중과 소통해야만 한다. 

/대전충남교구

[2021년 7월 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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