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전서』 개정증보판 사태 수습을 위한 교단의 고심이 깊다. 며칠 앞으로 다가온 임시수위단회가 아니더라도 교단적 취사력이 시험대에 오른 느낌이다. 소태산은 “정신을 수양하여 수양력을 얻었고 사리를 연구하여 연구력을 얻었다 하더라도, 실제 일을 작용하는 데 있어 실행을 하지 못하면 수양과 연구가 수포에 돌아갈 뿐이요 실효과를 얻기가 어렵나니, 예를 들면 줄기와 가지와 꽃과 잎은 좋은 나무에 결실이 없는 것과 같다 할 것이니라”고 작업취사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소태산의 작업취사는 ‘정의는 취하고 불의는 버림’을 의미한다. 취사(取捨)는 말 그대로 취하고 버리는 것이다. 숙명적으로 늘 선택의 갈림길에 서게 되는 인간에게 취사공부가 중요한 까닭이다. 취사선택에 따라 고와 락, 은과 해, 죄와 복, 불행과 행복, 진급과 강급으로 결과가 갈린다. 냉엄한 인과의 이치이다. 

소태산은 제생의세의 삶을 취하고 편안한 부귀영화의 길을 버렸다. 파란고해를 버리고 광대무량한 낙원을 취하기 위해 진리적 종교의 신앙과 사실적 도덕의 훈련만을 취하고 나머지 화려한 방편들은 과감히 버렸다. 삽과 곡괭이를 들고 들판에서 일하는 이들을 부처님으로 모시기 위해 금빛 불상을 놓아버렸다. 부처님의 마음은 취했지만 불가의 제도와 관습은 버렸다. 불교의 미래를 위해 과거의 불교와 결별했다. 취사가 어려운 이유 중 하나는 ‘버림’없이 ‘취’하려는 데 있다. 무언가를 버리지 않으면 취해지지 않는 이치가 있다. 잡기 전에 놓아야 하고 채우기 전에 비워야 한다. 그래서 ‘취사’는 ‘사취’이기도 하다. 결국 ‘취’와 ‘사’는 같은 말이다. 취사하기 어려운 때는 무엇을 버릴 것인가부터 생각할 필요가 있다. 『정전』에는 ‘시비를 몰라서 실행이 없거나’, ‘불같이 일어나는 욕심’, ‘철석같이 굳은 습관’들이 취사를 어렵게 하는 이유로 등장한다. 소태산이 인간의 마음 바닥에서 발견한 것들이다. 취사에 앞서 우리들 마음 깊숙이 자리한 욕심, 습관, 부족한 실행력부터 성찰해야 할 때다. 

진심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을 때 버림은 쉬워진다. 핵심 가치, 최우선 가치가 분명할 때는 아무리 어려운 경계도 취사를 방해할 수 없다. 부처님들과 성현들의 삶이 그 증거다. 석가모니가 성을 버리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소태산이 평생을 무아봉공한 이유는 그들이 지키고 싶었던 거룩한 그 무엇이 있었기 때문일 터이다. 혈연보다 진한 법연에게 시비를 가리고 책임을 물어야 할까 말까. 교단 대소사에 대한 책임이 최고지도자에게 향하도록 하는 오랜 관행과 시스템을 온존시켜야 할까 말까. 이번 일을 전서 발행에 한한 실무적 사고로 치부해야 할까. 먼지 쌓인 교헌 개헌안을 다시 꺼내서라도 교단 혁신의 계기로 삼아야 할까. 어려운 경계들이 우리의 취사력을 시험하고 있다. 어렵더라도 온전한 생각으로 취사한다면 그 결과는 은혜로울 것이다.

[2021년 7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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