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원불교신문=류현진 기자] “우리가 수도인만 하자는 것이 아니라 지도자가 되려면 시대를 따라 학문을 배워야 해.” 광주원광신협과 원광새마을금고 설립에 앞장서고 원칙경영의 탄탄한 기초를 세운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76·愉山 李圓京). 그는 학교법인 원광학원 상임이사로도 13년간 재직하며, 원광학원법인을 단단한 반석에 올려놓는다.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교전 읽고 감명받아
이 원로교무는 전북 완주군 조천면 동산리에서 태어났다. 고2에서 고3으로 학년이 올라가던 시기, 앞으로 어떤 일을 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 고민이 한창일 때 방에 있던 원불교 교전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그의 고향에는 동네 이름을 딴 동산촌교당(현 동산교당)이 있었고, 이 원로교무의 어머니는 교당에 다니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에 교전을 여러 번 읽었는데 많은 감명을 받았어. 생활에 밀접하고 참 훌륭한 말씀이 많았어.” 교전을 통해 감화를 받는 그는 동산촌교당의 초대 학생회장을 맡게 된다. 그가 고3 때 승타원 송영봉 종사가 동산촌교당의 교무로 부임한다. 조천초등학교 교장으로 있던 교도가 승타원 종사에게 그의 학교에 와서 강의를 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도 함께 가서 강의를 듣게 됐다. “원불교에 저런 여성 지도자들이 계신다면 나도 한번 교무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는 승타원 종사의 권유에 따라 전무출신의 길을 걷게 된다.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광주원광신협 설립
그는 대구교당과 종로교당에서 부교무 시절을 보냈다. 그후 발타원 정진숙 교무가 있는 광주로 가게 된다. 그곳에서 이 원로교무는 광주교구 사무국장과 광주교당 교무를 겸임하며 광주원광신협의 기초를 세운다. “대종사님은 저축조합을 만드셨어. 또 방언공사도 하셨지. 쌀밥을 먹으려면 논이 있어야 해, 구인제자들과 협동·단결해 방언을 막아 농사를 지으셨어. 실제로 교도와 지역주민에게 소득을 창출해 주는 힘, 그런 종교라 흥미를 가지게 됐어.” 

그는 원불교의 신앙운동과 지역사회 개발을 어떻게 함께 해나갈 것인가 고민했다. “교리 중 특히 사요에 매력을 느꼈어. 그중에서도 자력양성에 감명을 받았지. 지역사회와 함께 발전하려면 우선 지역민들의 소득을 증대시켜서 지위를 향상시켜주고, 또 교육에도 힘써야 하고, 공익을 위해서는 공도자 숭배도 해야만 하고, 사요를 지역사회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을까 고민했어.” 그는 사요를 실천하는 방법의 기초로 신협 운동에 뛰어들었다. 지역사회와 연결되는 교화를 하기 위해 신협 교육을 받아야겠다는 그의 요청을 발타원은 흔쾌히 받아들였다. 발타원의 후원으로 이 원로교무는 서울에 올라가 신협 연합회에서 실시하는 신협교육을 받았다. 처음에는 사무실이 없어 그냥 책상 하나를 놓고 시작했다.

“매주 일요일 법회 때마다 교도들에게 예금해 놓은 것이 있으면 이왕이면 우리 신협에 예금해 달라고 부탁했어. 마침 여자 청년 한 사람이 보험회사에 다녀 경리를 볼 줄 알아서 도움을 받았어. 조금씩 기금이 쌓여서 사무실을 신축하게 됐지.” 그는 신협운동을 위해 1층이었던 광주교당 법당을 2층으로 올리고, 1층에 원광어린이집을 만들었다. 또 정문 양쪽에 건물을 세워 어엿한 신협 사무실이 생겼다. 그가 광주원광신협을 만들고 초대상무를 지내면서 직원이 3명으로 늘어나고, 지역사회와 교도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등 신협의 기반을 튼튼히 다져놓았다.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원광새마을금고 설립
그가 광주에서 신협의 기초를 다지고 지역사회와의 연결 고리를 확장해 가려고 할 때쯤, 좌타원 김복환 종사가 그를 찾아온다. “당시 교육부장이었던 좌타원님이 오셔서 ‘너는 광주에서 일할 사람이 아니다. 총부에서 일을 해야 한다’고 하셔. 신협을 만든 지 3년밖에 안 됐는데, 지역교화를 활짝 꽃피우지 못한 채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이 마음에 걸렸어. 그런데 좌타원님이 대산종사님의 ‘대(大) 은행설립’이라는 경륜을 말씀하셔서 마음을 돌렸지.”

그는 정토회교당에 발령을 받아 일하며, 익산에 원광새마을금고 설립에 앞장서고 상근 부이사장을 맡게 된다. 처음에는 정토회교당(당시 남중동) 1층에서 새마을금고를 시작했다. 시내에 나가야 더 발전하고 성공할 수 있다는 생각에 이리교당 건물을 신축할 때 그 1층에다가 새마을금고를 옮긴다. 익산 중심가에 자리한 새마을금고는 자산규모도 커지게 되고, 활발한 사업으로 새마을금고연합회에서 인정을 받는다. 

그가 토대를 닦은 광주원광신협과 원광새마을금고는 지금껏 한 번도 금융사고가 난 적이 없다. 그가 청렴하고 원칙대로 운영하는 기초를 닦아 놓았기 때문이다. “돈을 만지니까 유혹이 많았어. 당시 돈을 빌려다 땅을 사면 다 오르던 시절인데 땅 투기를 위한 대출은 안 해줬어. 규정을 벗어난 대출은 한 번도 해준 적이 없었지. 직원들에게는 더욱 철저히 했어.”
 

교정원 기획실에서 
원광새마을금고가 안정화 되자 교정원 기획실에서 그를 요청하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과제는 교단 3대 설계였다. 그 당시만 해도 종법사의 법문과 경륜으로 교단이 움직이던 시기였다. 연도별로 제대로 계획을 세워서 가면 좋겠다는 여론이 일었고, 이 원로교무가 적임자라 판단해 그를 부른 것이다. 

6개 분과로 나눠 교단 3대 설계가 진행됐고, 이 원로교무가 전체 총괄팀장을 하며 6개 분과 중 전무출신 제도분과를 맡았다. “개인의 성장이 교단 성장의 원동력이라 생각했어. 성장은 혼자 힘으로는 안 되니까 협동해야 하고, 협동의 원동력은 경제야. 경제가 마련되지 않고는 그런 꿈이 이뤄질 수 없어. 헌신 봉사하는 정신을 주축으로 살려주고, 동시에 개인의 발전과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전무출신 제도를 만들고 싶었어. 그렇게 하려면 생활 보장을 해줘야 해.”

기획실에 근무하는 5년 동안 많은 노력을 기울였지만 역부족이었다. 교무를 엄격하게 선발해야 한다, 교무들의 생활을 보장해줘야 한다, 개인이 성장하려면 교무에게 재량권을 줘야 하고, 교정원을 줄이고 교구자치제를 해야 한다, 3년·6년마다 옮겨 다니는 인사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등. 3대 설계를 하며 교단의 경제와 시스템을 변화시키기 위한 그의 주장은 그다지 반영 되지가 않았다. 실망감을 느낀 그는 교정원을 떠나 다시 원광새마을금고로 돌아가 새마을 운동에 주력한다.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유산 이원경 원로교무

학교법인 원광학원 상임이사
좌산상사가 종법사에 취임하게 되며, 그를 불렀다. 학교법인 원광학원을 독립시키려고 하니 이 원로교무가 그 일을 맡아달라는 것이었다. “새마을 운동을 계속하고 싶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일이 더 크다고 하시니 더 고집할 수가 없었어.” 당시 원광학원 법인은 정관상에만 존재하고 총장이 법인 역할을 하고 있었다. 총부 재무부에 책상만 하나 있을 뿐이었다. 인사권과 재정권 확립 등 학교법인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데 8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법인의 재산도 500억으로 불렸다. “처음에 학교법인이 뭐하러 들어오냐고 교직원들의 저항이 심했어. 대학이라는 곳이 여러 이권이 개입되다 보니 협박을 받기도 하고, 조폭이 찾아오기도 했는데 그런 것에 굴하지 않았어. 13년 동안 살아남은 비결은 단돈 10만 원도 받은 일이 없어. 월급으로 만족하고 돈이 생기는 것은 모두 법인에 귀속시켰어.”


학문을 통해 시대정신 읽어야
“경제와 금융을 모르고는 앞으로 교단의 지도자가 될 수 없어. 원불교는 지역사회와 연결하고 교도들의 생활개선과 함께 소득증대에도 도움이 돼야 할 것이야.”

그는 세상에서 제일 힘이 센 사람은 자기를 이기는 사람이라는 요훈품 15장 말씀을 좋아한다. “자신을 어떻게 성장시키고, 발전시킬 것인가가 늘 나의 화두였어. 자신의 역량을 키우는 일이 교단 발전에 도움이 되고, 사회 발전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야. 좌선, 염불, 경전 공부도 부지런히 해야지만 시대를 따라 학문을 배워서 지역사회와 소외계층들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고 엮어갈 줄 알아야 역량이 생길 것이야.” 

[2021년 7월 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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