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는 태생적으로 투명함을 지향한다. 공(空), 원(圓), 정(正)을 속성으로 한 일원(一圓)의 진리를 신앙하고 수행하기 때문이다. 소태산 대종사의 ‘청풍월상시(淸風月上時) 만상자연명(萬像自然明)’시구에도 만물의 실상을 드러내는 밝은 달이 일원의 광명을 상징하며 등장한다.

정신개벽의 개벽(開闢)은 ‘열 개’에 ‘열 벽’자를 더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다. 우리의 지난 100년은 작고 기댈 데 없는 교단이 오직 합리적이고 개방적인 투명한 조직 운영으로 버티며 성장해온 경이로운 역사다. 하지만 예전 같지 않은 듯한 교단의 투명성을 점검해보자. 

첫째, 교단 정보는 적절히 공유되고 있는가. 교단의 공적 정보는 교단의 공공재이다. 정보사회에서 정보란 곧 권력과 힘을 의미한다. 특정 부서 특정인이 정보를 독점한다면 그 정보는 특권이 된다. 정보 처리와 보관, 공유와 유통에 대해 각별한 관심이 필요하고 정보접근권에 대한 이해도 필요하다. 교단사에 대한 관심은 곧 주인의식의 발로임을 잊지 말자. 

둘째, 의사결정 과정은 공개적인가. 공적 행위는 타당한 제한 사유가 없는 한 모두 공개되어야 한다. 대중들에게 위임받은 의사결정 권한의 행사 과정 또한 위임자들에게 공개해야 마땅하다. 이것은 대의민주주의의 전제 조건이다. 특히 대규모 사업 추진시 소수 지도부의 뜻이 소문으로 퍼져 공적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어야 한다. 

셋째, 공의 수렴을 잘하고 있나. 예컨대, 이단치교는 상의하달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교화단은 상하좌우의 소통이 원활하게 일어나는 창구여야 한다. 교단은 정작 중요한 일이 있을 때 교화단을 통한 의견수렴에 서툴고 소홀하다. 기술의 발달로 여론수렴을 손쉽게 할 수 있는데도 손을 놓고 있는 경우가 허다하다. 표현하지 않아서 읽히지 않는 대중의 마음을 읽어낼 수 있는 사회과학적 방법을 최대한 활용해야 한다. 
 
넷째, 교단 언론에 대한 태도는 어떤가. 언론은 역사적 사실의 기록, 교단 구성원간의 소통 촉진, 통찰의 제공을 목적으로 삼는다. 언론에 대한 방어적 자세나 비협조적 태도는 교단의 역사 기록에 공백을 초래하고 소통에도 문제를 일으킨다. 기자는 개인이 아니라 수많은 재가 출가 교도들의 눈과 귀고 입이다. 언론매체를 사회적 공기(公器)라고 하는 이유를 기억해야 한다. 언론이 제 역할을 해야 교단도 투명해진다.  혹시 집행부가 ‘당신들은 몰라도 돼, 우리가 다 알아서 해줄게’ 식의 마음을 추호라도 가진다면 그것이 바로 사사로움의 씨앗이 된다. 교단의 공화주의를 병들게 하고 건전한 여론 형성을 방해하고 교단의 주인들을 객으로 만들어버린다.

교단 구성원들이 서로의 마음을 헤아리며 심월상조(心月相照)하려면 교단은 더 투명해져야 한다. 모든 면에서 한없이 투명해져야 주세교단으로 성장할 수 있다. 

[2021년 7월 12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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