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일 교무
김경일 교무

[원불교신문=김경일 교무] 정신수양은 삼학(三學) 가운데 첫 번째 강령으로 정신을 잘 수양하자는 것이다. 정신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국어사전에는 육체나 물질과는 대립되는 영혼이나 마음, 또는 사물을 느끼고 생각하며 판단하는 능력이나 작용이라고 설명되고 있다. 흔히 정신이란 마음 또는 영혼 등과 혼재되어 애매하게 쓰일 때가 많다. 

그런데 『정전』(正典)에서는 정신에 대하여 “마음이 두렷하고 고요하여 분별성과 주착심이 없는 경지”라고 정의되어 있다. 정신은 마음 이전의 마음세계다. 그럼 무엇을 마음이라고 하는가? 마음이란 생각이나 감정이 일어나서 분별하고 주착하는 작용이다. 정신이 작동하면 우리가 흔히 말하는 마음 작용이 된다. 보고 듣고 생각하면서 분별하고 느끼는 것이 다 마음의 작용이다. 이런 마음작용을 가능하게 하는 근본마음을 정신이라고 하는 것이다. 흔히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성품 또는 본성(本性)의 의미라고 이해하면 된다. 

수양이란 닦을 수(修)자에 기를 양(養)자를 쓴다. 위에서 말한 정신을 잘 닦고 기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대종사께서는 수양에 대하여 “안으로는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함”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럼 왜 우리는 정신을 수양해야 하는가? ‘생각하는 갈대’라는 말처럼 사람은 생각하는 동물이다.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매 한가지다. 사람이나 동물들은 따로 배우지 아니하여도 근본적으로 아는 힘이 있는 것은 경험적으로 알 수 있는 일들이다. 

내가 어려서 돼지 새끼가 어미 뱃속에서 나오자마자 젖꼭지를 찾아 빠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한 번도 보고 배우지 아니하였는데 저처럼 알까?’하는 의심이 들었다. 지금도 생각할수록 신기하기만 하다. 사람도 태어나면 따로 학습하지 않아도 춥고 배고픈 것을 안다고 한다. 이게 본능이 아닐까 싶다. 따로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다. 그 앎을 따라 하고자 하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그게 욕심(欲心)이다. 

본래적으로 모든 유정물(有情物)은 욕심의 존재다. 특히 그 가운데도 유난히 최령한 인간은 보고 듣고 생각하고 배워서 아는 힘과 하고자 하는 욕망이 보통 동물들보다 몇 배가 많고 크다. 욕심(欲心)이 과하여 욕심(慾心)이 된다. 이를 탐욕(貪欲)이라고 한다. 이 탐욕이 발동하여 제어하지 못하면 예의나 염치나 윤리나 도덕을 벗어나서 그릇되게 취하게 된다. 무력으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다가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을 받게 되는 것은 물론 교소도를 갈 수도 있다. 또는 이와 같은 탐욕으로 우리 머릿속은 가지가지 망상에 시달리기도 하고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지고 갈라져서 정신분열도 되고 욕심대로 안 되면 세상을 원망하거나 비관하는 염세(厭世) 병자가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현대인들은 유달리 신경 쇠약자가 많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OECD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불명예도 가지고 있다. 자본주의 역사가 짧은 가운데 높은 성취를 이룬 고도성장의 배후에는 이런 아픔이 있다. 꼭 이런 중증이 아니라도 평범한 사람 가운데 마치 정신이 불타서 황폐해진 듯한 번아웃(Burn out) 증후군을 호소하는 사람이 많다고 한다. 정신수양은 현대인들에게 흩어지는 정신을 모으고 온전한 정신을 회복하여 물욕(物慾)에 현혹되지 않고 삶을 주도적으로 살아가게 하는 힐링의 필수과목이다.

 

/원불교대학원대학교

[2021년 7월 19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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